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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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오늘’ 당신의 안부를 묻는 드라마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는 우울증을 앓는 주인공에게 그의 소꿉친구가 열심히 드라마 내용을 알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정신건강의학과 간호사인 주인공 정다은(박보영)은 가까운 환자를 자살로 떠나보내고 자신도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 정신병동에 입원한 상태였다. 친구 유찬(장동윤)은 다은이 좋아하는 드라마들을 챙겨보고 면회 갈 때마다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쩌면 다은이 “다음 화가 궁금해서라도 살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주류 시청 형태를 ‘몰아보기’로 바꿔버린 넷플릭스 시리즈에서 나온 대사라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아무튼 어떤 드라마에는 그런 힘이 있다. 자신과 다른 여성들의 목숨을 구했던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처럼 어둠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힘이. 2023년의 드라마계를 돌이켜보면,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삶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메시지가 강렬한 작품들이 큰 호평을 얻었다. 앞서 예를 든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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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진일보한 의학 윤리 국내 최초의 정신건강 의학드라마는 2014년 SBS에서 방영된 <괜찮아, 사랑이야>다. ‘위로의 대가’ 노희경 작가가 극본을 쓴 <괜찮아, 사랑이야>는 의학드라마로서 차별화된 소재를 내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정신질환을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마음의 감기”로 그려내며 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에 기여했다. 주인공인 정신건강의학전문의 지해수(공효진)부터가 불안증세와 관계기피증을 지닌 인물이다. 드라마는 해수가 근무하는 병원뿐 아니라 그가 거주하는 셰어하우스에도 여러 정신질환을 지닌 인물들을 배치해 병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를 담아냈다. 소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해체된 다양성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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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수동적 생존에서 능동의 삶으로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사진)에서 제일 먼저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당연하게도 제목이다. 역동적인 ‘액션’이 아니라 일반적인 움직임을 의미하는 단어를 택한 것은 이 작품의 비범함을 말해준다. 이 드라마는 다양한 능력을 지닌 초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이야기임에도, 전형적인 슈퍼히어로물과는 거리가 있다. <무빙>의 ‘움직임’은 능력자들의 ‘배틀 액션’이라기보다 보통 사람들의 생존형 분투로 그려지며, 더 나아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내는 삶 그 자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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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연인’이 병자호란의 역사를 그리는 방식 1636년(인조 14년) 겨울, 평화로운 마을 능군리에 첫눈이 내린다. 마을 최고령 부부의 회혼례가 열리는 날이었다. 풍악 소리의 흥겨움이 절정에 이를 무렵,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혼인 잔치가 중단되고 만다. “오랑캐가 쳐들어왔소! 오랑캐가 임금을 가두었소!” 과거 전란의 비극으로 정신을 놓아버린 듯한 백발노인은 연신 고함을 지르며 마을을 돌아다닌다. “오랑캐가 쳐들어왔으니 나라가 망했구나. 사직이 무너지겠구나. 문을 닫아라. 여인들은 낯을 감추고 사내들은 쇠를 들어라!” MBC 사극 <연인>(사진)이 병자호란의 시작을 묘사한 장면에는, 이 작품의 중요한 역사관이 압축돼 있다. 우선 역사를 평범한 사람들의 시점으로 기술하는 황진영 작가 특유의 관점이 이번 작품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 작가는 이육사 시인의 생애를 그린 <절정>(MBC), 삼국시대의 치열한 전쟁을 담아낸 <제왕의 딸 수백향>(MBC), 연산군 시대의 민초 혁명을 다룬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MBC) 등 전작들을 통해 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선보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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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과잉 서사 시대에 재확인한 단막극 가치 매체 다변화 시대에 단막극도 변화를 모색 중이다. 가령 지상파의 유일한 단막극 시리즈인 KBS <드라마 스페셜>은 2021년부터 TV 시네마 부문을 신설하고, 극장 상영과 OTT 선공개 등 새로운 공개 방식을 선보였다. 2017년부터 꾸준히 단막극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tvN도 변화에 합류했다. 지난해 기존의 단막극 프로젝트 브랜드명이었던 <드라마 스테이지>를 <O’PENing>(이하 <오프닝>)으로 변경한 tvN은 1부작 단막극 외에도 쇼트폼과 2~4부작 등의 형식적 변화를 꾀한 바 있다. 지난달 16일 시작된 <오프닝 2023>에서는 TV 방영 외에도 OTT 티빙을 통해 전편을 동시 공개한 방식의 변화가 눈에 띈다. OTT로 한 작품을 접한 시청자들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면 바로 다른 작품을 잇따라 감상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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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명품 선망’이라는 시대정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인 넷플릭스는 매체 특성상 공생관계일 수밖에 없는 ‘인플루언서’ 소재 콘텐츠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왔다. 인플루언서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2010년대 후반, 패리스 힐턴을 비롯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스타들의 명암을 조명했던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밈>(2019), 유명 사진작가의 인스타그램 피드 하나로 ‘깜짝 스타’가 된 무명배우의 성장통을 그린 오리지널 일본 드라마 <팔로워들>(2020) 등이 대표적이다. 인플루언서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은 지난달 30일 공개된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셀러브리티>(사진)에서도 이어진다. 유명 인플루언서인 고교 동창 손에 이끌려 SNS 세계에 입성한 주인공이 빠른 속도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그보다 빠르게 추락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인플루언서들의 영향력이 한층 막강해진 시대의 풍경을 담아낸다. 공개 직후만 해도 화제성이 그리 크지 않았으나, 2주째인 지난 12일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TV(비영어) 부문 1위에 올라 이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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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인류의 마지막 다정함에 관하여 박하경(이나영)은 고등학교 국어 교사다. 수업, 진로 상담, 학생회 관리, 행정 업무까지, 각종 ‘투 두 리스트(To Do List)’로 꽉 채워진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녀는 일주일에 딱 하루 ‘머리를 비우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토요일 이른 아침, 단출한 가방 하나를 둘러메고 떠나는 짧은 여행의 목적은 “걷고, 먹고, 멍때리는 것”이 전부다.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사진)는 주인공의 여행을 닮은 이야기다. 총 8부, 회당 25분 내외의 미드폼 시리즈는, 통상적인 여행 드라마와 달리 특별한 사연이나 사건 하나 없이 당일치기 여행자 하경의 느슨한 동선을 따라간다. 1회 해남, 2회 군산, 3회 부산, 4회 속초, 5회 대전, 6회 서울의 고궁과 박물관, 7회 제주, 8회 경주 등 매회 여행지는 바뀌는데, 그 지역의 랜드마크에도 큰 관심이 없다. 하경에게 여행이 “특별한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간혹 어떤 순간을 실감하는 게 다”인 행위이듯, 드라마 역시 그 순간순간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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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택배기사’와 ‘K디스토피아’의 위기 올해 상반기 최고의 기대작 중 하나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택배기사>(사진)가 지난 12일 공개됐다. 동명의 웹툰에 기반한 이 작품은 혜성과의 충돌로 종말을 맞이한 세계의 이야기를 그린다. 혜성 대충돌 당시 대부분의 대륙은 물에 잠겼고 한반도는 사막으로 변했다. <택배기사>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로부터 40년 뒤, 사막화와 극심한 대기오염으로 고통받는 한반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종말 이후의 한반도는 산소 권력을 중심으로 재편된 세상이다. 산소호흡기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해진 세상은 산소를 독점한 초거대기업을 출현시켰고, 생존자들은 산소 공급량에 따라 코어, 특별, 일반 구역 주민으로 나뉘어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 구역의 바깥에는 최하층 난민들이 존재한다. 구역 이동이 금지된 난민들은 오염된 공기 안에서 각종 질환과 굶주림과 차별에 시달리는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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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K사극’의 퓨전화 경향과 현주소 국내 퓨전사극의 원조라 불리는 MBC <다모>(2003)의 성공 이후, 사극의 퓨전화는 완전히 주류로 자리 잡은 현상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극의 퓨전화를 넘어 판타지화가 부쩍 두드러지고 있다. 초자연적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본격 판타지 장르가 아니더라도, 가상의 시대를 내세운 작품들이 점점 증가하는 양상이다. 실제로 올해 방영된 사극 가운데 실제 왕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없다. 지난 1월 종영된 <환혼>(tvN)은 “역사에도,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물이었고, 같은 달 종영된 <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MBC)은 아예 평행우주 세계관을 내세운 드라마였다. 지난 11일 종영한 <청춘월담>(tvN), 현재 방영 중인 <꽃선비 열애사>(SBS), <조선 변호사>(MBC) 등 세 작품은 전부 가상의 왕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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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모래시계’의 유산과 변화한 시대정신 지난 3월6일부터 방영 중인 KBS 월화드라마 <오아시스>(사진)는 오랜만에 등장한 선 굵은 정통시대극이다. 1970년대부터 격동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서사,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는 두 남성과 한 여성, 그들의 삼각 멜로 구도 등 여러 면에서 전설적인 시대극 <모래시계>(SBS)의 유산을 물려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동시에 여수라는 특정한 지역적 배경 설정, 영화계를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사 반영, 10대 시절의 우정으로 먼저 시작된 세 남녀의 입체적 관계 등 <오아시스>만의 개성도 적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시간적 배경이 상당 부분 겹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모래시계>와 <오아시스>에서 시대정신의 변화가 느껴진다는 데 있다. 중심 배경인 군사독재정권 시기를 ‘야만과 폭력의 시대’로 인식하는 관점은 같지만, 주인공들의 운명을 가르는 핵심 갈등의 성격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시대극은 과거를 현재의 거울로 삼는 장르인 데다, 두 드라마의 방영 시기에는 30여년의 격차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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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학폭, 사회계급의 격차가 남긴 흉터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사진)에서 잔혹한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문동은(정지소·송혜교)이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한 것은 2004년 겨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여름,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공포, 시행됐다. 시행령은 그 이전까지 물리적 폭행 위주로 인식되던 학교폭력의 개념을 따돌림, 명예훼손, 모욕 등 정신적 가해 행위로까지 확대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학교폭력의 현실과 그에 대한 위기의식을 반영한 결과다. 드라마 속에서 문동은이 당한 학교폭력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행위였다. 그것도 최고 수위로. 하지만 동은은 법은커녕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엄마는 애초에 학대자였고, 담임교사는 방관자였으며, 견디다 못해 찾아간 경찰도 가해자의 편이었다. 드라마는 가해자의 입을 빌어 그 이유를 말해준다. “아무도 널 보호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경찰도, 학교도, 네 부모조차도. 그걸 다섯 글자로 하면 뭐다? 사회적 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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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탐욕의 카르텔에 맞서는 공조 히어로물 국내에서 법조인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는 크게 법정물과 영웅물로 나뉜다. 지난해 법조인 드라마 열풍 속에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 <소년심판>(넷플릭스)과 같은 정통 법정물이 큰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더 오랜 전통을 지닌 후자 역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 마피아 변호사 캐릭터를 내세운 <빈센조>(tvN)나 천재 사기꾼으로 재탄생한 변호사의 이야기 <빅마우스>(MBC) 등 최근 작품을 보면 한국형 슈퍼히어로물로서의 성격이 점점 노골화되는 경향을 알 수 있다. 지난 6일, 방영을 시작한 SBS 금토드라마 <법쩐>(사진)도 말하자면 후자의 계보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꽤 변칙적인 히어로물이다. 이 계보의 전통을 따르자면, 극 중에서 “싸움꾼 청년 검사”로 묘사되는 장태춘(강유석)이 히어로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작품의 제1 주인공은 뜻밖에도 명동 사채 바닥에서 일을 시작해 막대한 부를 일궈낸 사모펀드 대표 은용(이선균)이다. 은용은 시장의 흐름을 읽어내는 비상한 두뇌와 자본력을 기반으로 조카인 태춘을 도우며 거악과 싸운다. 여기에 검찰 조직에 환멸을 느끼고 검사직을 그만둔 법무관 육군 소령 출신 박준경(문채원)이 동료로 합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