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마지막 다정함에 관하여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인류의 마지막 다정함에 관하여

박하경(이나영)은 고등학교 국어 교사다. 수업, 진로 상담, 학생회 관리, 행정 업무까지, 각종 ‘투 두 리스트(To Do List)’로 꽉 채워진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녀는 일주일에 딱 하루 ‘머리를 비우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토요일 이른 아침, 단출한 가방 하나를 둘러메고 떠나는 짧은 여행의 목적은 “걷고, 먹고, 멍때리는 것”이 전부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사진)는 주인공의 여행을 닮은 이야기다. 총 8부, 회당 25분 내외의 미드폼 시리즈는, 통상적인 여행 드라마와 달리 특별한 사연이나 사건 하나 없이 당일치기 여행자 하경의 느슨한 동선을 따라간다. 1회 해남, 2회 군산, 3회 부산, 4회 속초, 5회 대전, 6회 서울의 고궁과 박물관, 7회 제주, 8회 경주 등 매회 여행지는 바뀌는데, 그 지역의 랜드마크에도 큰 관심이 없다. 하경에게 여행이 “특별한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간혹 어떤 순간을 실감하는 게 다”인 행위이듯, 드라마 역시 그 순간순간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다.

얼핏 심심해 보이지만, <박하경 여행기>의 담백함에는 꽤 진하고 깊은 맛이 녹아 있다. 단순히 헐거운 이야기가 아닌, 치밀한 서사를 사려 깊게 비워낸 여백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첫 회 해남의 템플스테이 에피소드를 보자. 하경을 안내하던 진영 보살(주인영)은 그녀의 짐을 보자마자 말을 건넨다. “가방을 단출하게 잘 싼 거 보니까 여행 고수인갑네. 난 여기 절에 처음 올 때 45ℓ짜리 가방에 온갖 거를 다 챙겨 왔어요.”

드라마는 진영 보살의 사연이 무엇이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45ℓ라는 숫자를 통해 그녀의 치열한 삶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한다. 대사 한마디 없이 삶의 무게를 전하는 여백의 서사는, 산에서 길을 잃은 하경이 묵언 수행자(선우정아)와 잠시 동행하는 장면에서도 잘 나타난다. 묵언 수행자가 완벽한 기술로 돌탑을 쌓는 모습이 코믹하게 그려지는 와중에, 그렇게 능숙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돌을 떨어뜨려야 했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박하경 여행기>가 여백의 서사 기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데에는 주인공 하경의 캐릭터가 큰 역할을 한다. 주연 배우 이나영은 6월3일자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국어 교사라는 설정 하나 말고는 박하경의 히스토리나 캐릭터가 정해진 게 없었기에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게 이 작품은 하경의 개인사를 덜어낸 자리에 그녀가 여행지에서 만난 수많은 사연의 조각들을 공들여 배치할 수 있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박하경이 단순한 관찰자로 물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경은 무심한 듯 보여도 세상사에 꽤 예민하고 섬세하게 반응하는 인물이고, 바로 이 지점이 많은 사연을 끌어모으는 힘이 된다. 이 같은 하경 캐릭터에 대한 중요한 단서는 3회 ‘메타멜로’ 편에서 등장한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스타일의 여행지 로맨스 문법을 차용한 이 에피소드에서 멜로 상대 이창진(구교환)은 사소한 말에도 호응해주는 하경이 신기한 듯 말한다. “무슨 얘길 하든 다 받아주시네요?”

이 같은 하경의 자세는 첫 회에서 진영 보살의 뜬금없는 객관식 질문에 답하는 장면, 2회에서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김연주(한예리)의 예술 행위에 호응하는 장면 등 여러 번에 걸쳐 일관되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교사라는 직업에서 비롯된 기계적 습관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예의 바른 호응의 자세다. 이는 생각이 다른 이에게 무조건 벽을 쌓는 시대, 소통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는 지금 이 시대에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덕목이다.

그런 측면에서 하경의 배려와 호응은 그녀의 ‘최애 작가’ 구영숙(길해연)이 구상 중이라는 아포칼립스 장르물 속 “인류의 마지막 다정함”을 닮았다. 그 다정함은 7회 제주 편에서 빛을 발한다. 단지 빵을 사기 위해 제주를 찾은 하경은 빵집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의 첫 심부름을 따라간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아이가 집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는 발걸음을 옮긴다.

심부름에 성공한 아이는 혼자 무섭지 않았냐는 아빠의 물음에 “누가 날 지켜주는 것 같았다”고 답한다. <박하경 여행기>는 그렇게 우리 사회가 빠르게 잃어가는 배려와 다정함에 관한 이야기다.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