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사회계급의 격차가 남긴 흉터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학폭, 사회계급의 격차가 남긴 흉터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사진)에서 잔혹한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문동은(정지소·송혜교)이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한 것은 2004년 겨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여름,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공포, 시행됐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시행령은 그 이전까지 물리적 폭행 위주로 인식되던 학교폭력의 개념을 따돌림, 명예훼손, 모욕 등 정신적 가해 행위로까지 확대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학교폭력의 현실과 그에 대한 위기의식을 반영한 결과다.

드라마 속에서 문동은이 당한 학교폭력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행위였다. 그것도 최고 수위로. 하지만 동은은 법은커녕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엄마는 애초에 학대자였고, 담임교사는 방관자였으며, 견디다 못해 찾아간 경찰도 가해자의 편이었다. 드라마는 가해자의 입을 빌어 그 이유를 말해준다. “아무도 널 보호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경찰도, 학교도, 네 부모조차도. 그걸 다섯 글자로 하면 뭐다? 사회적 약자.”

학교폭력예방법은 동은이 당한 폭력의 근본적 배경에 우리 사회의 고착화된 계급 구조가 있음을 읽어내지 못했다. <더 글로리>는 부모의 재력과 권력이 교실의 서열 구도에도 적용되는 양상을 상세히 묘사한다. 교내 서열 최상층 박연진(신예은·임지연)이 가해자 그룹의 리더로서 아래 서열의 아이들에게 폭력의 하청을 주면, 그들이 가장 밑바닥층에 놓인 아이들을 직접 괴롭히는 구조다.

실제로 학교폭력이 심화되는 시기는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계급 양극화가 본격화되는 시대와 맞물렸고, 특별법 제정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2000년대 초 이후 대중문화에 부유하고 아름다운 ‘일진짱’들이 대거 등장한 것도 학교 서열 구도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특히 드라마는 상류층 동경과 사회적 약자 혐오를 동시에 반영한 학교폭력 소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상위 1%의 자제들’만 다닌다는 명문사립 신화고를 배경으로, 미모와 재력을 갖춘 교내 서열 1위 그룹 ‘F4’와 그 리더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서민’ 금잔디(구혜선)의 이야기를 그린 2009년 <꽃보다 남자>(KBS)가 대표 사례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글로리>의 극본을 쓴 김은숙 작가의 전작 역시 이 분야에 포함된다. 그가 2013년 내놓은 SBS 드라마 <상속자들>에는 명문사립 귀족고등학교로 불리는 제국고 이야기가 그려진다. 드라마는 제국고 학생들을 ‘네 개의 계급’으로 분류한다.

재벌 2, 3세 집단인 경영상속자집단, 주식상속자집단, 명예상속자집단, 그리고 경제적 소외계층이자 집단따돌림의 대상인 사회배려자 집단. “센 놈한테 맞느냐 좀 덜 센 놈한테 맞느냐 그게 문젠데, 근데 사실 더 큰 문젠 앞으로도 네 인생이 주욱 이럴 거란 거지. 왜? 우리가 커서 네 고용주가 될 테니까.” 서열 최상위층 학생이 사회배려자 전형 입학생을 괴롭히며 내뱉은 말은 <더 글로리>의 박연진 대사와 거의 흡사하다.

방영 당시 <상속자들>은 큰 인기와 별개로, <꽃보다 남자>와 같이 명백한 학교폭력을 로맨스 장치로 사용한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상류층의 계급을 세분화하며 우리 사회 지배계급의 생리를 상세히 묘사한 김은숙의 문제적 계급 인식은 <더 글로리>로도 이어졌지만, <상속자들>은 결국 잘생긴 재벌 2세와 가난한 캔디의 신데렐라 로맨스로 마무리됐다.

말하자면 <상속자들>의 ‘극야’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더 글로리>는, 그래서 김은숙이 뒤늦게 쓴 반성문처럼 다가온다. 동은이 고등학생 시절 자신에 앞서 박연진 패거리의 피해자였던 윤소희(이소이)를 기억하는 장면은 꽤 의미심장하다. 당시 괴롭힘을 당하던 윤소희를 외면한 죄책감이 늘 동은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고, 훗날 복수를 결심한 그는 ‘좀 늦었지만 방관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더 글로리>는 과연 신데렐라 판타지의 전도사였던 김은숙 작가 필모그래피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판타지로도 계급 이동을 꿈꾸기 힘들 만큼, 우리 사회의 계급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 글로리> 속의 학교폭력은 그 격차가 남긴 지울 수 없는 흉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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