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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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법률가의 한계와 정치의 사법화 가족이 병원에 입원하면 담당 의사를 대하는 자세가 예사롭기 어렵다. 보기만 해도 꾸벅, 말 한마디만 들어도 꾸벅, 그저 죄인이라도 된 양 설설 기게 된다. 거짓된 겸손이 아니다. 절박한 마음에 진심으로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다. 의뢰인이 변호사를 대하는 태도도 비슷하다. 그나마 변호사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꿀 수라도 있지만, 판사나 검사 앞에 서게 되면 그럴 자유도 없다. 공권력은 독점적이다. 모든 공권력 앞에서 당장 일을 처리해야 할 입장에 처한 사람들은 우선 권력자에게 쩔쩔매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존숭을 보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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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대법원장의 거짓말 소액사건을 담당하던 판사 시절, 빌려준 돈을 되돌려받지 못했다는 원고의 주장과 그 돈 진즉에 갚았다는 피고의 주장이 맞서는 사건을 만났다. 차용증도 영수증도 없었고, 혹시 누군가에게 돈을 전해달라고 한 것 아닌가 물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라고 했다. 생각하다 못해 객기를 부렸다. 그럼 두 사람 중 거짓말한 사람이 천벌을 받아도 좋으냐고 물었다. 원고가 급히 “네, 축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피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족집게도사가 아닌 다음에야 판사 노릇 하기는 정말 어렵다. 판사는 거짓말에 지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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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위안부 손해배상 판결을 보는 시각 ‘국왕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The king can do no wrong)’는 18세기 영국의 법학자 블랙스톤이 <영국법 주해>에 적은 말이다. 국왕의 행위에 대해서는 사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엔 왕권의 신성을 인정하는 인식이 깔려 있다. 민족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이 법언은 ‘국왕’이 ‘국가’로 바뀌고 국가행위(act of state)에 대한 면책 주장으로 이어졌다. 영미법계의 이 법리는 국제관습법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주권면제 이론이다. 어느 주권국가의 행위는 그 동의가 없는 한 다른 주권국가의 사법적 심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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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추·윤 갈등’을 보는 법 ‘추·윤 갈등’을 놓고 백가쟁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어느 쪽이든 지나친 비분강개는 다소 수상하고 문제의 해법도 못 된다. 법적인 시각으로는 이렇다. 법무부 장관의 권한 범위와 한계는 어디까지고 검찰총장의 임기 보장과 징계의 관계는 어떠한가, 징계위가 윤석열 총장의 비위로 인정한 사실은 정당한 징계 사유인가 등이 쟁점이다. 사태를 정치적 시각에서 보면 혼란스럽다. 법무부 장관과 여권이 내세우는 명분은 검찰개혁이고, 심지어 검찰 자체도 말로는 개혁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런데 여권이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외치면, 검찰은 여권의 속내가 검찰 길들이기라고 반박한다.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부르짖으면, 여권은 그 실질이 개혁에 대한 저항이며 조직이기주의라고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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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이상한 말, 틀린 말, 막말 연주에 해설을 곁들이는 음악회에서 사회자인 전직 아나운서가 인사말을 한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쁜 것은 맞는데, 와중이라니? 와중(渦中)은 ‘물이 소용돌이치듯 복잡한 일이 벌어진 가운데’라는 뜻이다. 그냥 ‘바쁘신 중에도’라고 했으면 좋았을 게다. 곡 해설이 이어진다. “이제 말러의 교향곡을 들으시겠습니다. 말러는 교향악단을 지휘하면서도 호시탐탐 작곡을 했던 음악가였습니다.” 말러가 호시탐탐(虎視眈眈) 작곡을 하였을 때 그는 정말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려보듯 하였을까. 그러다가 사회자는 ‘이율곡씨’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자녀 교육 방법을 찬양한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 몰라도,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런 지칭법은 아무래도 기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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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숨 쉴 공간’과 메마른 세계관 열흘 전 이재명 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등 피고사건의 파기환송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지난 7월 대법원이 선고한 전원합의체 판결 취지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그 대법원 판결을 읽다가 ‘숨 쉴 공간’이라는 구절에 눈이 번쩍 뜨였다. 문장을 옮기면 이렇다.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는 그 생존에 필요한 숨 쉴 공간, 즉 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중립적인 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다시 어느 보수논객이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부부에게 사용한 ‘종북’ ‘주사파’라는 표현을 두고 2018년 10월에 선고된 다른 전원합의체 판결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숨 쉴 공간이란 글귀가 등장한다. 2011년 광우병에 관한 <PD수첩> 보도 사건에서 내려진 판결에도 이 용어가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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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우리에겐 왜 긴즈버그가 없냐고? 미국 연방대법관 긴즈버그가 타계하자 우리나라의 언론도 일제히 그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그에게 붙여진 ‘진보의 아이콘’이라는 칭호에도 불구하고 보수 성향 언론사들도 관련 기사를 크게 내는 게 좀 신기해 보였는데, 어떤 기사는 연방대법원 청사 앞에 모여든 추모객들의 사진을 실으면서 그 아래에 “우린 왜 이런 대법관이 없나”라고 썼다. 쓴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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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광화문 집회와 사법적 판단 지난 광복절의 광화문 집회는 서울행정법원이 서울시의 집회금지 처분에 집행정지 결정을 내리면서 강행되었다. 해당 재판부 판사의 해임이나 탄핵을 바라는 청와대 국민청원 참여자가 8월30일 기준 33만명을 넘어섰다. 집행정지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의 인터넷 댓글을 보면 판사가 자신의 우파적 성향에 따라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판사가 법대로 내린 결정을 왜 문제 삼느냐는 주장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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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차별금지법안은 통과되어야 한다 “짐승도 그 짓은 안 합니다.” 지난 퀴어축제 때 옆에서 반대집회를 하던 이들이 내건 구호다. 아니다, 한다. 미국과 노르웨이의 연구팀은 2008년 조사 결과 1500종이 넘는 동물에서 동성애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나는 짐승도 하니 인간도 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짐승이 하지 않는 일은 인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식의 무지한 논법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다만 과학적 사실을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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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누더기 세법 이런 세상은 어떨까. 출근하려는데 늘 있던 버스 정거장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부로 폐지되어 버렸다나. 다른 정거장에 가서 버스에 타려니, 신용카드는 더 이상 쓸 수 없고 현금을 내라고 한다. 간신히 현금을 구해 출근해서, 의뢰인이 데리고 온 증인과 회의를 시작하려는 순간 오늘부터는 회의 전에 서면으로 내용을 밝혀 대표변호사의 허가를 받으라는 전갈이 온다. 급히 허가를 받아 회의를 시작하는데 비서가 메모를 전한다. 변호사가 증인신문 전 증인을 만날 수 없도록 법이 바뀌었단다. 가상의 예지만 이래서야 살겠는가. 최소한의 안정은 삶의 기본조건이다. 예측하지 못한 변동은 불만의 단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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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존댓말 판결문 대한항공 비행기가 괌의 공항 근처 산에 추락한 사고가 일어난 해는 1997년이다. 사고 원인은 악천후, 착륙유도시설의 설치 위치 이상, 공항의 활공각 유도장치 고장, 기장의 피로로 인한 판단착오 등이었다. 그런데 조종실에 있던 부기장과 항공기관사는 기장의 판단 착오를 바로잡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왜였을까? 서열의식 문화와 한국어의 공손표현이 문제를 일으켰다. 블랙박스에 담긴 대화를 보면, 사고 전 기장이 악천후 속에서도 비구름을 뚫고 나가면 활주로가 보이리라는 기대를 보이자, 부기장은 이렇게 말한다. “비가 더 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지역에서 말입니다.” 부기장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렇게 기상상태가 나쁜데 다른 대비책 없이 육안으로 공항에 접근하다니요. 비구름에서 빠져나오면 때맞춰 활주로가 보일 거라고 생각하시는가 본데, 아니면 어쩌시렵니까? 바깥은 캄캄하고, 비는 퍼붓고, 활공각 유도장치는 고장인데도요?”였을 것이다. 비행기가 구름을 빠져나온 후 아직도 공항까지 거리가 20마일이나 남은 것을 아는 항공기관사가 다시 기장에게 말한다. “기장님, (지금까지) 기상레이더가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이 어두운 밤에 비행기를 착륙시키면서 육안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였던 것으로 보인다. 추락 9초 전에야 두 사람으로부터 명확한 의사표시가 나온다. “착륙 취소”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 것이다. 기장이 복창했지만 사고를 막기엔 이미 늦었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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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미션 임파서블’ 선거부정 지난 4·15 총선의 결과를 놓고 한 달 가까이 선거부정 시비가 이어지고 있다. 음모론자들의 주장은 사전투표함 바꿔치기와 득표수 전산조작이다. 선거사무와 선거소송에 여러 번 관여한 내 경험을 바탕으로 사전투표함 바꿔치기 시나리오를 구상해 본다. 우선 사전투표지를 구한다. 사전투표지는 투표소에서 본인 확인 후 투표용지발급기로 즉석에서 인쇄되는 데다 일련번호가 새겨진 QR코드가 있어서 위조는 불가능하다. 도리 없이 투표용지발급기와 투표지 원고, 각 지역구 선관위의 청인과 전국 사전투표소의 투표관리관 사인을 비밀리에 확보했다가 투표일 전에 대량으로 출력해서 은밀하게 보관하고, 거사에 앞서 각 선거구에 보내야 한다. 이 정도 일엔 여러 사람이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손발을 맞춰야 하는데, 무슨 수로든 동조자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