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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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숨 쉴 공간’과 메마른 세계관 열흘 전 이재명 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등 피고사건의 파기환송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지난 7월 대법원이 선고한 전원합의체 판결 취지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그 대법원 판결을 읽다가 ‘숨 쉴 공간’이라는 구절에 눈이 번쩍 뜨였다. 문장을 옮기면 이렇다.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는 그 생존에 필요한 숨 쉴 공간, 즉 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중립적인 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다시 어느 보수논객이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부부에게 사용한 ‘종북’ ‘주사파’라는 표현을 두고 2018년 10월에 선고된 다른 전원합의체 판결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숨 쉴 공간이란 글귀가 등장한다. 2011년 광우병에 관한 <PD수첩> 보도 사건에서 내려진 판결에도 이 용어가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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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우리에겐 왜 긴즈버그가 없냐고? 미국 연방대법관 긴즈버그가 타계하자 우리나라의 언론도 일제히 그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그에게 붙여진 ‘진보의 아이콘’이라는 칭호에도 불구하고 보수 성향 언론사들도 관련 기사를 크게 내는 게 좀 신기해 보였는데, 어떤 기사는 연방대법원 청사 앞에 모여든 추모객들의 사진을 실으면서 그 아래에 “우린 왜 이런 대법관이 없나”라고 썼다. 쓴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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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광화문 집회와 사법적 판단 지난 광복절의 광화문 집회는 서울행정법원이 서울시의 집회금지 처분에 집행정지 결정을 내리면서 강행되었다. 해당 재판부 판사의 해임이나 탄핵을 바라는 청와대 국민청원 참여자가 8월30일 기준 33만명을 넘어섰다. 집행정지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의 인터넷 댓글을 보면 판사가 자신의 우파적 성향에 따라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판사가 법대로 내린 결정을 왜 문제 삼느냐는 주장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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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차별금지법안은 통과되어야 한다 “짐승도 그 짓은 안 합니다.” 지난 퀴어축제 때 옆에서 반대집회를 하던 이들이 내건 구호다. 아니다, 한다. 미국과 노르웨이의 연구팀은 2008년 조사 결과 1500종이 넘는 동물에서 동성애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나는 짐승도 하니 인간도 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짐승이 하지 않는 일은 인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식의 무지한 논법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다만 과학적 사실을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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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누더기 세법 이런 세상은 어떨까. 출근하려는데 늘 있던 버스 정거장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부로 폐지되어 버렸다나. 다른 정거장에 가서 버스에 타려니, 신용카드는 더 이상 쓸 수 없고 현금을 내라고 한다. 간신히 현금을 구해 출근해서, 의뢰인이 데리고 온 증인과 회의를 시작하려는 순간 오늘부터는 회의 전에 서면으로 내용을 밝혀 대표변호사의 허가를 받으라는 전갈이 온다. 급히 허가를 받아 회의를 시작하는데 비서가 메모를 전한다. 변호사가 증인신문 전 증인을 만날 수 없도록 법이 바뀌었단다. 가상의 예지만 이래서야 살겠는가. 최소한의 안정은 삶의 기본조건이다. 예측하지 못한 변동은 불만의 단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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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존댓말 판결문 대한항공 비행기가 괌의 공항 근처 산에 추락한 사고가 일어난 해는 1997년이다. 사고 원인은 악천후, 착륙유도시설의 설치 위치 이상, 공항의 활공각 유도장치 고장, 기장의 피로로 인한 판단착오 등이었다. 그런데 조종실에 있던 부기장과 항공기관사는 기장의 판단 착오를 바로잡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왜였을까? 서열의식 문화와 한국어의 공손표현이 문제를 일으켰다. 블랙박스에 담긴 대화를 보면, 사고 전 기장이 악천후 속에서도 비구름을 뚫고 나가면 활주로가 보이리라는 기대를 보이자, 부기장은 이렇게 말한다. “비가 더 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지역에서 말입니다.” 부기장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렇게 기상상태가 나쁜데 다른 대비책 없이 육안으로 공항에 접근하다니요. 비구름에서 빠져나오면 때맞춰 활주로가 보일 거라고 생각하시는가 본데, 아니면 어쩌시렵니까? 바깥은 캄캄하고, 비는 퍼붓고, 활공각 유도장치는 고장인데도요?”였을 것이다. 비행기가 구름을 빠져나온 후 아직도 공항까지 거리가 20마일이나 남은 것을 아는 항공기관사가 다시 기장에게 말한다. “기장님, (지금까지) 기상레이더가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이 어두운 밤에 비행기를 착륙시키면서 육안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였던 것으로 보인다. 추락 9초 전에야 두 사람으로부터 명확한 의사표시가 나온다. “착륙 취소”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 것이다. 기장이 복창했지만 사고를 막기엔 이미 늦었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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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미션 임파서블’ 선거부정 지난 4·15 총선의 결과를 놓고 한 달 가까이 선거부정 시비가 이어지고 있다. 음모론자들의 주장은 사전투표함 바꿔치기와 득표수 전산조작이다. 선거사무와 선거소송에 여러 번 관여한 내 경험을 바탕으로 사전투표함 바꿔치기 시나리오를 구상해 본다. 우선 사전투표지를 구한다. 사전투표지는 투표소에서 본인 확인 후 투표용지발급기로 즉석에서 인쇄되는 데다 일련번호가 새겨진 QR코드가 있어서 위조는 불가능하다. 도리 없이 투표용지발급기와 투표지 원고, 각 지역구 선관위의 청인과 전국 사전투표소의 투표관리관 사인을 비밀리에 확보했다가 투표일 전에 대량으로 출력해서 은밀하게 보관하고, 거사에 앞서 각 선거구에 보내야 한다. 이 정도 일엔 여러 사람이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손발을 맞춰야 하는데, 무슨 수로든 동조자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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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 靑眼白眼 신앙이 사람을 해칠 때 196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의사가 일요일에 급한 수술을 하느라 환자의 수염을 면도했다가 형사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이유였다. 안식일에 일정 행위를 금하는 기독교의 계율이 17세기 식민지 시절부터 ‘블루 로(Blue Law)’라는 이름의 법으로 강제되어 위반하면 형사범으로 처벌되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그 법조항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블루 로는 안식일의 일하기, 여행, 요리, 귀금속 착용, 키스, 빗자루로 쓸기, 침대 정리 등을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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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 靑眼白眼 ‘너! 고소’와 ‘너! 기소’ “너! 고소.” 몇 년 전 어느 변호사가 사무소 인근에 붙인 포스터의 광고 문구다. 고소는 범죄의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가해자를 처벌해 달라고 고하는 행위다. 고소권 없는 사람이 처벌을 바라며 고하는 행위는 고발이다.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고소 건수는 연간 55만건쯤 된다. 일본의 경우 대략 1만건인 데 비하면, 절대수로 50배이고 인구비를 감안하면 100배를 상회한다. 공직자와 공조직도 고소 대열에 끼어 있다. 검찰총장이 신문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민간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정당 대표가 칼럼을 쓴 교수와 이것을 게재한 신문사를 고발한다. 고소는 일단 고소한 사람을 피해자로 만들고 고소당한 사람을 가해자로 만든다. 이 구도에서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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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 靑眼白眼 다수의견과 소수의견 전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 블랙리스트가 문제를 일으킨 데 이어, 현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이런저런 리스트가 있다고 시비가 일자, 공무원들 사이에 ‘일을 열심히 하면 직권남용죄, 무서워서 아무 일도 안 하면 직무유기죄’라는 탄식이 돌았다는데, 과장이다 싶으면서도 한편 걱정스럽긴 했다. 어디까지가 남용이고 어디서부터는 남용이 아닌가. 공무원이 권한을 행사하여 남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남의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 직권남용죄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겉으로는 권한 내의 행위 같지만 실은 의도가 불순한 행위를 말한다. 권한 밖의 행위는 직권남용죄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세무공무원이 세무조사를 나가 몸수색을 하면 직권남용죄가 아니라 불법수색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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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 靑眼白眼 “검사님, 앉으세요” 유신 시절, 깐깐하다고 소문난 어느 재판장이 검사를 혼낸 이야기다. 공판에 참여한 검사가 무료했던지 시도 때도 없이 볼펜을 손에 쥐고 촉을 내밀었다 들였다 하면서 딸깍 딸깍 소리를 냈다. 재판장이 정리(현재의 칭호는 법정경위다)를 부르더니 검사를 가리키며 일렀다. “어이, 정리, 저기 저 볼펜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 있잖아, 법정 밖으로 내보내게.” 그 검사, 얼굴이 벌게지더니 다시는 그 짓을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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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 靑眼白眼 사법개혁 어디까지 왔나 소송제도 일부를 개선하자고 만든 위원회에 어느 법과대학 교수가 외부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간사의 브리핑이 끝나자 그 교수가 물었다. “그래서, 이 제도로 국민에게는 어떤 혜택이 돌아간다는 겁니까?” 딱히 대답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발언이 좀 생뚱맞다 싶었고 솔직히 듣기 싫었다. 그 기억은 변호사로서 법정의 운영 실태를 보면서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개선이든 개혁이든 관청에서 하는 일은 그 신선함이 국민에게 피부로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