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의 헌법재판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신이 재임 중 저지른 최대의 정치적 실수가 얼 워런을 연방대법원의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고 말한 일이 있다. 워런은 골수 공화당원이고 보수주의자로서 캘리포니아주의 지사를 세 차례나 역임하였지만, 막상 대법원장이 되고 나서는 수많은 진보적 판결을 주도하였다.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도 비슷한 실수를 했다. 낙태권은 미국의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간 대립구도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다. 그런데 닉슨이 임명한 해리 블랙먼 대법관은 1973년에 여성의 낙태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법률이 위헌이라는 이정표적 판결을 내렸다. 임명권자의 입장에서는 ‘배신 때리기’이겠으나, 사법사를 읽을 때 이런 이야기는 흥미롭기 짝이 없다.

[세상읽기]낙태죄의 헌법재판

미국의 연방대법관 후보자가 상원의 인준청문회에 서면, 거의 예외 없이 낙태죄에 대한 의견이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블랙먼이 다수의견을 집필하여 낙태권을 인정한 ‘로 비 웨이드’ 판결을 유지 또는 폐기하는 것 중 어느 입장에 서는가라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판결은 대법관 후보자의 성향을 가르는 시금석이다. 보수주의자들에게 이 판결의 폐기는 중요한 정치적 목표이며 높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 과제다. 매년 이 판결이 내려진 날에는 수십만명의 낙태반대론자들이 연방대법원 청사까지 행진하는 행사를 벌일 정도다. 이 판결이 내려진 후 낙태죄 법리의 변천은 복잡하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보수적 성향으로 분류되었던 대법관들이 보였던 뜻밖의 태도 변화다.

샌드라 오코너 대법관은 레이건 대통령이 사상 최초로 여성을 연방대법관으로 임명하겠다는 선거공약을 실천하여 대법원에 들어간 사람이다. 당연히 보수적 성향을 가질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가 1983년에 대법관으로 취임한 후 연방대법원이 보수 5인과 진보 4인의 구도를 갖추게 되자, 보수파들은 로 판결이 폐기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1989년의 웹스터 사건에서 오코너는 로 판결의 폐기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이 사건에서는 심지어 보수파의 거두인 렌퀴스트 대법원장마저 명시적으로 로 판결을 폐기하지는 않는다는 의견을 내어 오코너와 발을 맞추었다. 그뿐이 아니다. 보수 성향의 현임 대법원장인 존 로버츠마저 취임 전 인준청문회에서 로 판결의 폐기에 대하여는 “오랜 선례는 그 구속력을 존중하여야 한다”라며 어물쩍한 의견을 내놓더니, 2018년에는 낙태 관련 판결에서 주류 보수파와는 다른 유보적 의견을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보수적인 대법관들이 낙태 문제에서 돌연 예상을 뒤집거나 슬그머니 달라지는 것은 왜인가? 낙태권을 인정한 판결이 오래 유지되면서 확립된 선례가 되어서 그럴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 선례가 미국 시민의 법감정으로 점차 굳어져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법으로 낙태권을 제한하는 것이 옳은지는 단순히 보수냐 진보냐로 결정짓기 어려운 복잡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타당성은 불문하고 대충의 이슈를 추려 보면, 인간 생명의 절대성,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유 내지 프라이버시권, 종교적 신념, 낙태의 의학적 필요성 또는 위험성, 진료에 관한 의사와 환자의 권리의무, 보건의료정책, 형사정책상 처벌의 범위와 한계, 처벌대상에서의 성차별, 성도덕, 음성적 낙태의 폐해, 가족계획, 아이 양육에 필요한 사회적·경제적 여건의 미비, 미혼모 문제, 인구정책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하나 생각하다 보면 어지러울 정도다. 문제를 단순화하여 여성과 태아 중 누구를 보호하여야 할지만을 생각해 보아도, 머리가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이런 단순화조차 바로 그 프레임에 갇힌 사고방식이 낙태죄를 존속하게 하는 근본적 원인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2012년에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이 합헌이라고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도 위헌의견을 낸 4인의 헌법재판관 중 평소에는 보수적 성향을 보인 이들이 있었던 일이다. 헌법재판소는 오는 4월 중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선고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결정이 주목을 끄는 이유는 현재의 헌법재판소 구성이 종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어느 여론조사에서는 여성의 75.4%가 낙태죄 처벌조항의 개정에 찬성하였다.

그런데 블랙먼은 왜 보수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판결을 내렸을까? 이 온화하고 겸손한 노신사는 로 판결의 초두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과제는 이 문제를 감정이나 편향됨 없이 헌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대법관으로 임명한 대통령의 정치철학이나 정치적 이익이 아니라 기본적 인권을 보장한 헌법의 정신과 원칙이었다. 우리 헌법재판소에도 이런 사법철학이 꿋꿋하게 살아 있음을 보고 싶다.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기에는 낙태죄 문제에서 고려해야 할 요소가 한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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