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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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언네서세리아트 시대’의 노동 2021년 새해가 되었다. 내가 작년 마지막으로 참여한 공식 일정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취업박람회’였다. 원래 국회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한 차례 연기되어 크리스마스이브에 온라인에서 이뤄졌다. 나는 ‘이것도 노동이다: 노동의 패러다임을 바꾸다’라는 타이틀 아래 진행된 토론회의 발제자로 함께했다. 발제를 준비하며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다 알게 된 용어가 하나 있다. 바로 ‘언네서세리아트’(unnecessariat)다. ‘불안정노동 계층’을 의미하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조어가 등장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제 우리는 말 그대로 ‘불필요한 계층’을 뜻하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자본은 노동 배제적 이윤 축적 체제를 구축하고 있고, 이런 조건 속에서 많은 이들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은 과장된 수사가 아니게 되었다. 김정희원은 반복적으로 출현할 신종 바이러스에 취약한 인간 자체가 자본에 하나의 ‘생물학적 위험’(biohazard)으로 간주되면서,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 이런 흐름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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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코로나19, 생명권력, 탈시설 2020년도 12월로 접어들었다. 올 한 해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하여 미증유의 삶의 양상을, 그리고 크나큰 피해와 고통을 겪어야 했고 여전히 겪고 있다. 이러한 피해와 고통은 물론 전 세계적이고 전 국민적인 것이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결코 균등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와 힘없고 가난한 이들일수록 더 많은 위험과 삶의 위기를 경험해야 했으며, 그런 이들 가운데 또한 장애인이 있었다. 최근 코로나19와 관련된 글을 한 편 쓸 일이 있어 이런저런 자료를 좀 찾아보게 되었는데,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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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당사자와 당파성, 그리고 관계론 얼마 전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한 ‘같이 잇는 가치’ 행사의 오픈 포럼에 다녀왔다. 이 행사는 장애와 비장애의 공존을 위한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표방했고, 포럼의 주요 문제의식은 장애인뿐 아니라 장애인과 관계 맺는 우리 모두가 당사자임을 인식하자는 것이었다. 국어사전에 당사자는 “어떤 일이나 사건에 직접 관계가 있거나 관계한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영어에서 당사자를 뜻하는 단어는 ‘party’이며, 흔히 ‘parties concerned’나 ‘parties involved’와 같이 표현된다. 즉 우리가 장애를 생물학적 손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장애 당사자란 장애라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는’ 이들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당사자라는 것은 장애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연루되어 있는’ 사회적 문제라는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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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장애인친화도시는 없다 최근 인천시의회로부터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작년 말 제정된 ‘인천광역시 장애인친화도시 조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대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려 하는데 발제를 맡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여성친화도시나 아동친화도시 같은 말은 들어봤으나 장애인친화도시라는 말은 다소 생소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장애인친화도시 조례 제정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작년 상반기에 대구시, 하반기에 경기도, 경북 김천시, 인천시, 그리고 올해 상반기에 전남 목포시에서 비슷한 이름과 내용을 지닌 조례가 제정되었다. 예상컨대 이런 흐름은 앞으로 일종의 유행처럼 좀 더 확산될 것이다. 지자체 차원에서 장애인의 권리에 관심을 두고 조례를 제정하는 건 기본적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볼수록, 과연 이 조례가 장애인의 삶에 실질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의구심을 지우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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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장판과 푸코 지난 8월 중순, 국회에서는 의원 연구모임인 ‘약자의 눈’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이 주관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전국 확대 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의 성격상 여러 정부 부처와 지자체 관계자들이 토론자로 초청되었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연구원은 유독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비판의 요지는 “이 사업의 효과성과 노동의 성과를 계측할 합리적 기준이 없다”는 것. 이날 토론회를 온라인으로 시청하면서, 나는 얼마 전 출간된 노들장애학궁리소 박정수의 신간 <‘장판’에서 푸코 읽기>를 떠올렸다. 푸코는 스스로를 철학자가 아니라 고고학자이자 지질학자라고 말했지만 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을 여럿 만들어 냈다. 그중 하나가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선험적이고 무의식적인 인식틀을 의미하는 ‘에피스테메’다. 그는 근대 인간학을 지배하는 에피스테메가 언어, 생명, 그리고 바로 노동에 대한 실증과학적 지식이 응집되면서 출현했다고 말한다. 장애인공단 연구원은 장애와 노동에 대한 앎을 그날 토론자들 중 가장 많이 축적하고 있는 소위 전문가였다. 그리고 그 앎은 푸코의 지질학적 개념틀을 응용하자면 ‘자본세’(資本世)의 에피스테메에 입각해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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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중앙의 무책임과 지역의 반동 활동가들이 흔히 ‘장판’이라고 줄여 부르는 장애인운동판엔 투쟁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 장판의 투쟁은 두 기초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전국적 연대 활동이 전개되는 흔치 않은 양상을 띠었고, 양쪽 모두 이슈는 24시간 활동지원 서비스 문제였다. 경기 화성시는 지난 6월16일 소위 ‘장애인 활동지원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시 차원에서 제공하는 추가 서비스를 월 최대 192시간에서 30시간으로 대폭 삭감하는 내용을 담았다. 왜? 소수의 장애인에게 과도한 세금이 낭비되고 있다는 이유로. 이로 인해 24시간 활동지원을 이용하던 최중증장애인들은 월 서비스 시간이 162시간이나 줄면서 지역사회에서의 삶이 불가능해질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포항시에선 수년간에 걸친 장애인들의 요구 끝에 지난 7월1일부터 24시간 활동지원 정책을 시행하기로 했지만, 그 대상은 단 3명으로 제한되었다. 이마저 시행 이틀 전 일방적으로 유예해 버렸다. 왜? 장애인단체들이 서비스 제공 대상의 확대를 요구하며 시청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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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J의 첫 출근과 뉴노멀 1980년대 말,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태동시킨 청년장애인들이 외쳤던 첫 번째 사회적 요구는 장애인 노동권 보장을 위한 법률의 제정이었다. 소위 금수저로 태어난 최상층 계급이 아닌 이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민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계를 꾸려갈 수 있으므로. 그들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되었고, 올해로 법률 시행 30년이 되었다. 그렇다면 장애인의 노동권은 현재 어떤 상태에 있을까? ‘2019년 장애인경제활동실태조사’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우리나라 장애인의 고용률은 34.9%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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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나는 깊게 절망하기로 했다 지난달 22일, 광주의 한 폐자재 처리 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파쇄기에 몸이 끼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고 김재순씨, 발달장애를 지닌 26세 청년 노동자. 시민대책위의 조사 결과 이 업체는 2인1조 근무 원칙을 지키지 않았고, 최소한의 안전 설비도 부재했으며, 10인 미만의 영세사업장이라 안전관리자 선임 의무 등에서도 제외되어 있었다. 김재순씨는 과거 이 고되고 위험천만한 일을 그만둔 적이 있지만, 3개월 만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왜? 그가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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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사랑과 편견 얼마 전 난생처음 한 단행본에 추천사라는 걸 쓰게 되었다. 폴리아모리스트 홍승은씨가 자신의 두 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신작 에세이집에 말이다. 처음 추천사를 요청받고 나서 몇몇 지인에게 이 얘기를 전하자, 그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네가 폴리아모리에 대해 뭘 안다고 그에 관한 책에 추천사를 써?” 맞다. 나는 현재 모노아모리적 연애 관계를 맺고 있고, 폴리아모리는 나에게 다소 낯선 무엇이다. 그런데 낯설고 잘 모르는 것을 대하게 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기본적 자세는? 존중하고, 경청하며,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원고를 읽었고 그리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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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잠재적 가해자와 페미니스트 내가 무척 아끼고 좋아하는 후배 K. 그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료 교사이기도 하다. 언젠가 교사회의 뒤풀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형은 K를 왜 그렇게 좋아해요?”라고 묻기에, 그 친구가 ‘사회화가 안되어서’ 그런 것 같다고 답변했다가 예상치 않게 큰 웃음을 유발한 적이 있다. 나에게 그건 꽤 진지한 답변이었는데 말이다. 사회화된다는 건 기존 사회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 즉 문화를 습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30년 이상 살아온 K의 사고방식과 계산법은 너무나 비자본주의적이며,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장해온 남성이면서 매우 탈가부장적이기도 하다. 그에게서 늘 많을 걸 느끼고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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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코호트 격리와 ‘이미’ 어쩌다 보니 몇 해 전부터 국가생명윤리정책원이 운영하는 공용기관생명윤리위원회에 심의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사회운동만 해왔던 나는 ‘코호트’라는 학술 용어를 이 회의에서 처음 접했고, 그 뜻을 잘 몰라 티 안 나게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한 기억이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이제 코호트는 전 국민이 다 아는 단어가 되었다. ‘코호트 격리’라는 말을 통해서. 코호트 격리라는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 말이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대상이 되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선 말이다. 코호트는 공통적인 특성이나 경험을 지닌 인구 집단을 말하고, 격리는 지역사회로부터 차단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까지 지역사회와 단절된 삶을 강제당했던 정신장애인과 중증장애인들은 사실 ‘이미’ 코호트 격리 상태에 있었던 셈이다. 이미 격리되어 있던 이들을 동일한 장소에서 다시 격리한다는 건, 마치 ‘두 번 죽인다’는 말처럼 한편으로는 모순되고 또 한편으로는 무참하게 들렸다. 첫 코호트 격리는 모두가 알다시피 청도대남병원의 정신병동에서 이루어졌고, 그런 조치 속에서 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들은 실제로 사회적 존재로서 한 번 죽임을 당하고, 다시 생물학적 존재로서 두 번 죽임을 당했다. 그러고서야 그 격리에서 해제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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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장애인이 있다 올해 초 <철학, 장애를 논하다>라는 번역서를 냈는데, 얼마 전 모 인터넷 매체에 긴 서평이 한 편 올라왔다. 제목은 “ ‘장애’라는 유령이 나타났다”. 강렬하고도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의 영역에서 장애는 실제로 유령처럼 취급되어 왔으니. 그리고 다시 문득, 2018년 말 여당 대표가 자당의 전국장애인위원회 출범 행사에서 장애인 비하 발언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장애인들을 앞에 두고 “정치권에… 정신장애인들이 많이 있다” “신체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장애인들은 그에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