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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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김순석, 최정환, 이덕인, 박흥수, 정태수, 최옥란, 그리고 박기연과 우동민. 그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한 번씩 불러본다. 내겐 익숙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시민들에게는 아마도 대부분 낯설 이름들. 지난 12월3일 ‘세계 장애인의날’, 이들의 삶과 투쟁과 죽음에 대한 곡진한 기록을 담은 책 <유언을 만난 세계: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오월의봄)가 출간되었다. 장애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자 특수교육과에 진학했던 1996년, 캠퍼스 곳곳에는 최정환과 이덕인을 살해한 김영삼 정권을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그해 겨울 에바다복지회의 비리와 인권유린 사태가 세상에 알려졌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국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 활동을 하며 ‘장판(장애인운동판)의 전태일’과도 같았던 김순석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2001년 대학 졸업과 함께 노들장애인야학 사무국장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한 나는 정태수의 집에 찾아가 소주를 얻어 마셨고, 명동성당 앞 노숙농성장에서 최옥란을 만났으며,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박흥수의 영구임대아파트에서 망자의 체취와 함께 며칠을 머물기도 했다. 박기연과 우동민은 장애인 이동권 확보와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위한 투쟁 현장에서 마주치곤 했던 나의 동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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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10월26일의 죽음 지난달 26일 노태우가 사망했다. 많은 이들이 10월26일이라는 날짜의 공교로움을 이야기했다. 한국 사회 군사독재의 문을 연 자와 닫은 자가 그처럼 같은 날 죽어간 것에 대해. 날짜가 공교로웠다면, 그가 떠나가는 모습은 그로테스크했다. 독재자의 딸을 하야시킨 촛불시민의 힘에 기대 출범한 정권이, 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한 국가내란 수괴의 명복을 빌며 국가장으로 예우해 떠나보내다니. 이걸 어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여러 날 가끔 생각해보았다. 10월26일 죽어간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중증장애여성 활동가 김주영. 9년 전 그날, 그녀는 활동지원사가 퇴근한 후 발생한 원인 모를 화재에 목숨을 잃었다. 터치펜을 입에 물어 직접 119에 신고했고, 소방차는 5분 만에 도착했으며, 그녀가 숨진 자리에서 현관까지는 고작 다섯 걸음이었다. 활동지원사만 곁에 있었다면 그리 허망하게 떠나가지 않았을 생명. 학살자의 시신은 공권력의 호위 아래 장지로 향했지만, 김주영의 노제는 공권력에 막혀 해산되었다. 그때도 대선 정국이었고,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던 지금의 대통령은 더 이상 이런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만들겠노라 소리 높였다. 그녀의 죽음으로 활동지원 24시간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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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변형과 변혁, 그리고 기후위기 만물은 변한다. 인간 또한 변화를 추구한다. 변화와 관련된 두 단어 ‘변형’과 ‘변혁’은 받침 하나가 다르다. 어쩌면 말 그대로 ‘한 끗 차이’다. 양자는 변화라는 동일한 방향성 내에서 정도나 양상의 차이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표면적 의미의 유사성과 달리 정반대의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즉 변혁이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한다면, 변형은 오히려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으려는 욕망과 지향을 지닐 수 있다. 인류세와 자본세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명명마저 등장시킨 기후위기의 시대, 한국 사회에서도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변화가 추구되고 있다. 5월 말 대통령 직속 ‘2050 탄소중립위원회’(탄중위)가 출범하여 얼마전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가 발표되었고, 2050년 탄소중립 시나리오의 의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기후정의운동 진영에서는 ‘탄중위해체공대위’가 구성되어 격렬한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를 내왔으며, 탄중위 위원직을 가장 먼저 사퇴한 청소년기후행동은 오는 22일 글로벌 기후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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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장애와 질병이라는 ‘범주’ ‘범주’는 국어사전에 “동일한 성질을 가진 부류나 범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인간은 일정한 범주를 통해 세계의 존재와 대상을 구분하고 인식한다. ‘범주’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category’의 형용사형 ‘categorical’은 ‘단정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에 따라 그가 이러저러한 사람일 거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장애인 운동을 하면서 오랫동안 고민해 온 범주가 있다. 바로 장애와 질병이다. 본격적으로 고민을 하게 된 건 정신장애인 운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였고, ‘아픈 사람 정체성’과 ‘질병권’이라는 개념의 등장, HIV 감염인도 장애인차별금지법상의 장애인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논의의 활성화도 또 다른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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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홍길동과 탈시설 로드맵 한국의 장애 관련 법률 중 정부가 자발적으로 만든 건 1977년 특수교육진흥법과 1981년 심신장애자복지법 두 개뿐이다. 그 이후 법들은 모두 장애인들의 현장투쟁을 통해 만들어졌다. 장애계에서는 이 두 법을 ‘홍길동법’이라 칭했다. 양자의 법에 장애인 교육을 진흥하는 내용도 장애인 복지를 보장하는 내용도 전무하여, 차마 그 명칭대로 불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달 초 국무총리 소속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는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탈시설 로드맵)을 발표했다. 2012년 8월부터 1842일간 진행된 농성의 성과로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 탈시설이 포함되었지만, 4년 넘게 허송세월하다 임기를 불과 9개월 남겨둔 시점에야 그 기본계획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이 탈시설 로드맵은 삼중의 의미에서 ‘홍길동 로드맵’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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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편의증진법과 행정편의주의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1984년 휠체어 이용 장애인 김순석 열사가 자신의 목숨을 끊으며 서울시장 앞으로 남긴 유서의 일부분이다. 그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접근권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항거로 평가된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지금, 장애인들이 처한 현실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최근 보건복지부는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편의증진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고 의견서를 받았다. 현행 편의증진법은 음식점, 편의점, 약국, 미용실 등 소규모 공중이용시설의 경우 300㎡(약 90평) 이상에 대해서만 편의시설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는데, 그 기준을 50㎡(약 15평)로 낮추는 것이 주요 개정 내용 중 하나다. 이 개정안은 언뜻 상당한 수준의 개선을 도모한 듯 보이지만, 장애계는 일제히 이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왜 그랬을까? 기본적으로 이번 시행령 개정의 적용을 받는 소규모 공중이용시설은 사업장 대부분이 말 그대로 소규모다. 예컨대 편의점의 경우 전국 4만3000여 곳 중 50㎡ 이하인 사업장이 약 80%를 차지한다. 또한 이 개정안은 2022년 이후 신축·증축·개축하는 건물에만 적용되기에 그 이전부터 영업을 해왔던 곳 역시 추가로 제외된다. 결국 300㎡에서 50㎡로의 기준 강화는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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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공정성’을 어찌할 것인가 지난 4월, 교육자를 양성하는 국립대학인 진주교대가 2018년도 입시에서 장애학생의 성적을 조작해 불합격시킨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를 주도한 입학관리팀장은 “장애인은 날려야 한다” “장애인이 네 아이 선생이라고 생각해 봐라” 등의 노골적인 혐오 발언까지 했지만, 진주교대는 오히려 내부 고발을 한 입학사정관의 징계를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소식을 전해들은 나와 동료들은 분노했고,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으리라 생각했다. 최근 한국 사회의 공정성 담론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문제가 다름 아닌 입시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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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이동권 투쟁 20년과 민주주의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를 계기로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올해로 꼭 20년이 되었다. 이동권 투쟁 20주년을 맞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다양한 행사와 직접행동을 진행 중이다. 특히 광주민주항쟁 41주년이던 지난 5월18일에는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사거리에서 버스 다섯 대를 점거하고 “장애인에게 민주주의는 없었다”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몇몇 활동가들은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점거한 버스 위로 올랐다. 내게는 그 광경이 41년 전 그날의 모습을 실천적으로 재현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장애인 이동권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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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오세훈 시장에 대한 추억 4·7 보궐선거로 오세훈씨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선거 중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탈시설장애인당’이라는 가짜 정당을 결성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중 하나는 서울시장 후보들에게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서울시를 위한 11대 장애인정책 요구안’을 전달하고 정책협약을 맺는 일이었다. 여러 후보가 이에 응했지만, 거대 양당 후보와는 면담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오세훈 후보와 직접 대면할 기회가 생겼다. 선거 일주일 전 그가 장애계와 간담회를 하기 위해 여의도 이룸센터를 방문했는데, 전장연이 3월 중순부터 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위해 농성을 벌이고 있는 장소도 바로 이룸센터 앞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언론사의 카메라를 의식했기 때문일까. 그는 농성장에 있던 장애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농성단 대표가 전달한 정책요구안을 받아든 후 사진 촬영까지 했다. 하지만 자리를 뜨면서 정책요구안이 담긴 봉투를 되돌려주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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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당장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집에서 독립을 해야 했다. 교사가 꿈이었지만 우선 돈부터 모아야 했고, 처음 뛰어든 직업 전선이 술집 주방 일이었다.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기 전이라 요식업계 경기가 나쁘지 않았다. 보수도 제법 됐고, 당시에는 숙식을 제공하는 술집이 많았기에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종로3가 피맛골에 위치한 호프집에서 3년 일했다. 한동안 숙소 생활을 하다 동료 둘과 월세방을 얻어 살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게이였다. 나의 첫 번째 퀴어 친구였다. 정확히는 퀴어임을 나에게 밝힌 첫 번째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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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가짜 정당의 진짜 정치 탈시설장애인당.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장애인운동 진영에서 창당한 정당의 이름이다. “장애인 의제를 알려내고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위성정당”이자, “본선거 시작 전에 산화할 가짜 정당”이라고 홈페이지에 당의 성격을 밝혀놓고 있다. 탈시설 권리, 장애인 포괄적 재난 지원,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이동권, 교육권, 자립생활, 의사소통, 문화예술, 발달장애인, 장애여성, 건강권 등 11개 영역의 정책요구안을 내걸고, 각 요구안을 대표하는 11명의 장애인 후보가 다양한 캠페인과 거리 유세를 벌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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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쇠사슬과 세계 지난 1월22일은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 참사’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참사를 계기로 새로운 변혁의 주체들이 한국 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쇠사슬을 온몸에 감은 채 지하철 선로와 버스를 점거하며 이동권을 주장하는 중증장애인들 말이다. 그들에게 쇠사슬은 ‘장애인차별철폐투쟁가’의 가사처럼 “수십 년 세월을 골방에 갇혀 시설에 처박혀” 살아가도록 만드는 이 세계의 억압을 상징했다. 동시에 그 비장애중심주의적 세계를 자신의 몸과 연결해 한 뼘씩 이동시켜내는 무기이기도 했다. 20년 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기도 했고, 바뀌지 않기도 했다. 대다수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저상버스와 특별교통수단이 도입되었지만, 대도시 이외 지역의 이동권은 처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도, 시혜의 문화도 여전하다.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도화되고 장애등급제는 단계적 폐지 수순에 돌입했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서비스는 그들의 필요가 아닌 예산에 맞춰 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