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김순석, 최정환, 이덕인, 박흥수, 정태수, 최옥란, 그리고 박기연과 우동민. 그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한 번씩 불러본다. 내겐 익숙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시민들에게는 아마도 대부분 낯설 이름들. 지난 12월3일 ‘세계 장애인의날’, 이들의 삶과 투쟁과 죽음에 대한 곡진한 기록을 담은 책 <유언을 만난 세계: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오월의봄)가 출간되었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장애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자 특수교육과에 진학했던 1996년, 캠퍼스 곳곳에는 최정환과 이덕인을 살해한 김영삼 정권을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그해 겨울 에바다복지회의 비리와 인권유린 사태가 세상에 알려졌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국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 활동을 하며 ‘장판(장애인운동판)의 전태일’과도 같았던 김순석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2001년 대학 졸업과 함께 노들장애인야학 사무국장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한 나는 정태수의 집에 찾아가 소주를 얻어 마셨고, 명동성당 앞 노숙농성장에서 최옥란을 만났으며,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박흥수의 영구임대아파트에서 망자의 체취와 함께 며칠을 머물기도 했다. 박기연과 우동민은 장애인 이동권 확보와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위한 투쟁 현장에서 마주치곤 했던 나의 동지들이었다.

본격적인 장애인운동 활동가로서의 삶을 결의했던 20년 전, 나는 이 운동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애인운동 주체들이 겪어온 환경의 열악함과 고단함 때문이었을까. 기록된 장애인운동의 역사는 너무나 단편적이었고, 내가 접할 수 있던 텍스트라곤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시절 작성된 A4 여덟 쪽 남짓의 약사가 전부였다. 그런 아쉬움과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자 2007년 <차별에 저항하라: 한국의 장애인운동 20년, 1987~2006>을 쓰게 되었고, 그 책에는 박기연과 우동민에 앞서 간 여섯 명 열사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한계들로 인해 그들의 투쟁과 죽음에 대한 기본적 사실만을 나열했을 뿐, 열사들의 삶은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유언을 만난 세계>의 성취는 놀랍고도 소중하다. 발터 베냐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6번 테제에서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위험의 순간에 번득이는 어떤 기억을 제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진실은 사실의 단순한 퍼즐 맞추기, 혹은 사실의 합이 아닌 것이다. 기록되어 있고 전해들을 수 있는 ‘사실’의 한계 속에서도, 이 책의 필자들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실’을 담은 여덟 명 열사의 삶의 이야기를 기어코 구성해냈다.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희구하며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 간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또한 개인사를 넘어선 장애의 사회사가 담겨 있다. 그 작업은 이 책의 부제처럼 ‘장애해방열사’들이 ‘죽어서도 여기 머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또 다른 투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부디 많은 이들이 함께 읽어 주시길. 열사들의 투쟁, 그리고 그들의 삶을 엮어낸 필자들의 분투는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을 통해 완성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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