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6일의 죽음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지난달 26일 노태우가 사망했다. 많은 이들이 10월26일이라는 날짜의 공교로움을 이야기했다. 한국 사회 군사독재의 문을 연 자와 닫은 자가 그처럼 같은 날 죽어간 것에 대해. 날짜가 공교로웠다면, 그가 떠나가는 모습은 그로테스크했다. 독재자의 딸을 하야시킨 촛불시민의 힘에 기대 출범한 정권이, 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한 국가내란 수괴의 명복을 빌며 국가장으로 예우해 떠나보내다니. 이걸 어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여러 날 가끔 생각해보았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10월26일 죽어간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중증장애여성 활동가 김주영. 9년 전 그날, 그녀는 활동지원사가 퇴근한 후 발생한 원인 모를 화재에 목숨을 잃었다. 터치펜을 입에 물어 직접 119에 신고했고, 소방차는 5분 만에 도착했으며, 그녀가 숨진 자리에서 현관까지는 고작 다섯 걸음이었다. 활동지원사만 곁에 있었다면 그리 허망하게 떠나가지 않았을 생명. 학살자의 시신은 공권력의 호위 아래 장지로 향했지만, 김주영의 노제는 공권력에 막혀 해산되었다. 그때도 대선 정국이었고,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던 지금의 대통령은 더 이상 이런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만들겠노라 소리 높였다. 그녀의 죽음으로 활동지원 24시간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박근혜 정권이 출범했고, 장애인들은 5년의 시간을 통째로 광화문역 지하에서 농성을 하며 버텼다. ‘장애등급제 폐지하라!’ ‘부양의무제 폐지하라!’ ‘장애인 수용시설 폐지하라!’를 외치며. 촛불의 물결이 일렁였고, 문재인 정권이 출범했으며, 새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이 농성장을 찾아 김주영의 영정 앞에 머리를 숙였다. 농성을 풀었고, 민관협의체가 구성되었으며, 2019년 7월부터 장애등급제가 단계적으로 폐지되면서 ‘서비스지원 종합조사표’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문재인 정권이 노태우의 국가장을 결정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대선을 앞두고 있으니까’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되리라는 정략적 판단을 했을 거라고.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들도 모두 그의 빈소를 찾아 표심에 미칠 영향을 저울질하며 요령껏 한마디씩 떠들고 갔다. 흔히 정당은 정권을 잡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라고 이야기된다. 당연하고 진부한 말이다. 그런데 이 진부한 말이 문득 좀 기이하게 느껴진다. 마치 살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거라는 말처럼. 그러니까 나는 묻고 싶은 것이다. 당신들이 왜? 무얼 위해서?

김주영 동지 9주기 날, 장애인들은 ‘종합조사표=종합조작표’ ‘기획재정부=설계자’ ‘보건복지부=장물아비’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여의도에 모였다. 그리고 서비스지원 종합조사표를 불태웠다. 이 종합조사표에 따라 2019년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활동지원 수급자격 갱신을 신청한 장애인 5만7370명 중 8333명(약 15%)의 서비스 시간이 장애등급제 폐지 이전보다 오히려 삭감됐다. 월평균 22시간, 많게는 241시간까지. 나도 이해할 수 없고 서비스를 판정받는 당사자들도 당최 납득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찬 기괴한 조사표. 그리고 또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갈 조사표. 그로테스크한 정치가 창궐하는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그들의 10월26일도 그녀의 10월26일도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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