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직
문학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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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지역에서 연결될 권리 수년 전부터 ‘동네지식인’을 자처했지만, 요즘 정작 동네를 비우는 경우가 잦다. 동네 술벗들로부터 “동네를 너무 자주 비우는 것 아니냐”며 힐난을 받곤 한다. 그럴 때마다 15년 전쯤 자발적 백수가 된 이래 직장인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잘 지켜온 것에 만족해하는 편이다. 올해 유독 자주 찾은 지역은 전남이었다. 전남문화재단 자율기획형 사업 책임심의위원을 맡아 해남, 담양, 곡성, 고흥 등지를 찾았다. 시인보다는 ‘전사’이고자 했던 김남주 시인(1945~1994) 30주기를 맞아 김남주기념사업회가 극단 토박이와 손잡고 상연한 시극 <은박지에 새긴 사랑> 관극차 해남을 처음 방문했다. 곡성 한국실험예술정신이라는 단체가 옥과면 신흥마을에서 국내외 예술가들과 함께 옛 신흥상회를 꾸며 마을 갤러리를 만든 멋진 프로젝트를 만날 수 있었다. 따뜻한 10월의 가을 한낮에 이루어진 오프닝 행사는 조촐한 마을 잔치가 되었다. 하지만 아츠뷰라는 단체가 신안군 매화도 옛 매화분교에서 추진한 프로젝트 ‘잊혀지는 섬, 사라지지 않는 기억’에는 태풍 때문에 방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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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문학은 국익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문학 애호가들이 넘치는 세상이 된 것일까.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크고 작은 모임에서 노벨상 수상작을 비롯해 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어느 자활 참여자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사서 탐독한다고 했다. 또 어느 모임에서 만난 청년은 취직하느라 작파한 ‘신춘문예’에 다시 도전해볼까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의견을 구했다. 당연히 문학 행사에서도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소회가 단골 메뉴처럼 언급되곤 한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그렇게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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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가만한 가을 아침 거짓말처럼 온 세상에 가을이 성큼 왔다. 가을이면 양희은의 노래 ‘가을 아침’(1991)을 가만히 들으며 가을에 대한 예의를 갖춘다. 20대 시절 가을이면 자주 들어서인지 양희은의 원곡이 더 친숙하다. 그리고 가을이면 연례행사처럼 시집들을 들추며 읽는다. 요즘 권선희, 박경희, 박승민, 안현미 시집을 읽었다. 우리나라 시의 ‘진경’이 여기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시인들은 저마다 음색도, 음역도, 언어도 다 다르지만, 시집 행간에는 무용(無用)하고 무력(無力)한 언어야말로 효율성보다는 ‘충분성’을 지향하는 삶이고 사회라는 생태경제학적 믿음이 깔려 있었다. 발전, 성장, 효용 같은 무력(武力)이 지배하는 언어와 세상에 맞서 시인들은 무력(無力)한 언어의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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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다정한 공동체의 성분 “언니, 내 이름은 청자예요. 푸를 청을 써요.” 하명희의 단편 <청자의 노래>에 등장하는 대사다. 작중 ‘청자’는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다. 그는 밤무대 가수, 노래방 도우미를 전전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낙천적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청자의 아이가 새로 전학한 학교의 학부모들은 그런 청자를 따돌리며 말조차 섞지 않으려 한다. 가난한 청자와 ‘선’을 긋고 싶어한다. 한집에 사는 작중화자는 그런 청자를 집에 초대해 커피를 내어주며 다정한 말을 건넨다. 그리고 자신 또한 본명이 무엇인지 선언을 한다. “내 이름은, 내 이름도 춘자야. 봄 춘 자를 써. 나도 내 이름이 싫었어. 숨기고 싶더라고.” 그러자 청자가 화답한다. “춘자래. 청자랑 춘자. 우리 둘을 합치면 청춘이네”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애로운 공동체, ‘청춘’의 연대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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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아우슈비츠의 ‘월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잔혹한 낙원이었다. 어쩌면 나와 우리의 삶이란 약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시스템 위에서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영화였다. 극장을 나오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생환한 작가 장 아메리가 “가끔 히틀러가 사후에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Zone of Interest)>(2023)는 스위트 홈을 추구하며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를 용인하려는 우리 안의 무의식을 통렬하게 꼬집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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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우리는 부흐링족이다 이번엔 딱 한 권만 샀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책을 딱 한 권 구입했다. 평소 ‘밥은 굶어도 책은 산다’는 신조를 나름대로 지켜온 나로서는 5년 만에 찾은 도서전에서 책을 딱 한 권만 샀다는 건 작은 사건이었다. 평소였다면 지름신이 강림해 에코백 가득 책을 담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귀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산 책들을 모두 읽었느냐고 묻지 마시라. 책을 사서 서가에 꽂아놓는 행위만으로도 출판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나는 흰소리를 해왔다. 작고한 소설가 김성동은 저자 사인을 할 때 당신의 책을 서가에 꽂아만 주십사 하는 뜻에서 ‘삽가(揷架)’라고 쓰곤 했다. 책을 사서 서가에 책을 꽂아 두는 행위가 출판문화 발전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지역 서점의 경우 대형 서점과 참고서를 취급하는 일부 서점을 제외하고는 곧 간판이 떼일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10년 전쯤 인천을 대표하는 서점인 대한서림 1층에 빵집이 입점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이 나온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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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동학하는 삶 ‘동학열’이라고 해야 할까. 19세기 말 일어난 동학(東學) 사상과 운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음을 실감한다. 수년 전부터 계속된 동학열은 최근에도 주목할 만한 성취를 잇따라 내고 있다. 도올 김용옥이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4~1864)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깊이 있게 해설한 책을 펴낸 데 이어, 원로학자 백낙청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좌담한 내용을 정리한 책 <개벽사상과 종교공부>를 출간했다. 이뿐만 아니다. 평전과 문학 작품을 비롯해 전시와 공연 작품 또한 꾸준히 나온다. ‘걸어 다니는 동학’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의 삶과 사상을 다룬 한상봉의 <장일순 평전>(2024)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 1970~1980년대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이자 피난처 노릇을 한 ‘원주캠프’의 우애로운 풍경이 잘 그려져 있다. 무위당 장일순을 비롯해 지학순 주교, 김지하 시인, 생협운동가 박재일, 판화가 이철수, 이현주 목사 등의 삶과 사상 그리고 활동들이 잘 갈무리되어 있다. 팔순 신예작가 김민환과 안삼환은 소설 <등대>(2024)와 <바이마르에서 무슨 일이>(2024)를 출간했고, <봉준이, 온다>(2012)를 펴낸 소설가 이광재는 <나라 없는 나라>(2015)에 이어 <이양선>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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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은미(隱微)한 당신 “난 평이 니가 시를 쓰고 읽어줄 때가 너무 좋아. 그럴 때면 너한테서 막 빛이 난다. 반딧불 천 마리가 모인 것처럼. 네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나고 마음이 맑아지고 힘이 나. 난 알아. 넌… 강한 아이야. 평아, 넌 꼬옥 훌륭한 시인이 될 거야.” 1980년대 ‘얼굴 없는 시인’으로 잘 알려진 시인 박노해의 첫 산문집 <눈물꽃 소년>(2024)에 수록된 수필 ‘연필 깎는 소녀’의 한 대목을 읽다 울컥하는 마음이 일었다. 근래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윤기 나는 물기가 있고, 뭉클한 감동이 있는 책이었다. 만약 당신이 어린 ‘평이’라면 마음이 어땠을까. 내 곁에서 나를 편들어주고 기꺼이 품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온통 설렜으리라. 소년은 그렇게 한 사람의 어른이 된다. ‘내 어린 날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33편의 수필을 묶은 산문집은 어린 평이를 키운 팔 할이 시인을 편들어준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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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4·3 제주는 살아 있다 제주도는 울고 있었다. 제주 4·3 제76주기 전야제가 열리는 제주도엔 낮부터 제법 쌀쌀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제주도는 외치고 있었다. 그날의 상처와 슬픔을 넘어 ‘제주도는 살아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제주아트센터에서 열린 4·3 전야제 <디아스포라, 사삼을 말하다>는 4·3을 대표하는 미적 형식의 가능성을 예감하게 하는 무대였다. 상징이 없는 기억투쟁이란 오래 가지 못한다. <기억·서사>(2000)의 저자 오카 마리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사건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그런 의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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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향노의 자화상 “ㄱ ㄴ ㄷ/ ㅏ ㅑ ㅓ ㅕ/ 처음 보는 글자/ 가 갸 거 겨/ 가지/ 고구마/ 글자 겨우 아니/ 하하 호호/ 로 료 브 비/ 글자가 비료지.” 19세에 충북 괴산 산골에 시집와서 평생 농사일을 해온 78세의 안대순 할머니가 쓴 글이다. 추영자 할머니는 괴산에 시집오던 날의 감회를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산만 보여/ 도망도 못 가네”라고 적었다. 진달래반 정희 할머니는 “엄마 산소에 있는 열매를 먹으면/ 젖맛이 났다”고 회상한다. 한때 빛나는 이팔청춘이었던 할머니들은 이제 괴산두레학교에서 벗들과 함께 한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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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삶은 찰나의 것 문화적 보릿고개를 맞아 몇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민환기 감독의 다큐영화 <길 위에 김대중>(2024)을 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를 향한 꺾이지 않는 저항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80년 5·18 이후 옥중의 김대중에게 당시 안기부가 미국행을 회유하는 희귀 영상자료 등이 퍽 인상적이었다. 영국 켄 로치 감독의 <나의 올드 오크>(2024)를 보며 누군가에게 ‘곁’을 내준다는 일이 생각 외로 힘이 세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대, 저항, 용기’를 강조하는 80대 켄 로치 감독의 앵글에서 짙은 허무의 감정 같은 게 느껴지는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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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외로움은 질병이다 외로운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내 ‘곁’에서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품’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느는 사회는 위험사회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초연결 시대를 살고 있지만, 오히려 할 일이 없고, 갈 곳이 없고, 말벗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고립의 시대>를 쓴 정치경제학자 노리나 허츠가 21세기를 ‘외로운 세기’라고 부른 것도 헛말은 아니다. 어느 콘퍼런스에서 만난 한 청년 활동가가 한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여러분이 살고 활동하는 지역의 위기나 위험 요인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30대 여성 청년은 “사회적으로 청년인구 유출과 지역소멸을 말해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동료의 부재입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이 말이야말로 외로움의 본질을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외로움의 습격’(김만권) 앞에서 온몸으로 외로움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초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신경쇠약은 20세기의 모두가 공유하는 병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제 외로움이야말로 21세기의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적 질병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