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은 질병이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외로운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내 ‘곁’에서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품’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느는 사회는 위험사회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초연결 시대를 살고 있지만, 오히려 할 일이 없고, 갈 곳이 없고, 말벗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고립의 시대>를 쓴 정치경제학자 노리나 허츠가 21세기를 ‘외로운 세기’라고 부른 것도 헛말은 아니다.

어느 콘퍼런스에서 만난 한 청년 활동가가 한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여러분이 살고 활동하는 지역의 위기나 위험 요인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30대 여성 청년은 “사회적으로 청년인구 유출과 지역소멸을 말해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동료의 부재입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이 말이야말로 외로움의 본질을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외로움의 습격’(김만권) 앞에서 온몸으로 외로움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초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신경쇠약은 20세기의 모두가 공유하는 병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제 외로움이야말로 21세기의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적 질병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외로움과 고독은 전혀 다르다. 고독은 고독력을 기를 수 있는 나를 위한 시간을 의미한다면, 외로움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감정으로 이 세계에서 버려졌다는 느낌을 말한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지고, 점점 무책임해지는 사회에서 외로운 사람들이 양산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정치철학자 김만권은 외로움이 타자의 상실, 자아의 상실, 세계의 상실을 연속적으로 동반하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가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전체주의는 외로워진 대중의 지지로 유지된다”고 경고한 해나 아렌트의 견해를 거듭 상기하는 것도 외로움이 위험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예방적 사회정책이 절실하다. 지난해 지역문화진흥원이 부산 영도문화도시센터, 강원 춘천문화도시센터를 비롯한 다섯 곳에서 외로움 예방을 위한 문화의 역할을 고민한 ‘연결사회 지역거점’ 프로젝트에 눈길이 간다. 부산 영도구에서는 사회적 고립감이 높은 주민들을 선정해 동네 예술가와 예술 활동으로 일상과 안부를 나누는 ‘똑똑똑 예술가’를 진행했다. 예술을 배달하고, 사람들을 초대해 자립 축하 파티를 열었다. 누군가가 “나와 당신을 ‘똑똑똑’ 깨우는 작업이었다”고 한 소감은 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춘천에서는 ‘기댈 수 있는 사람,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이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안녕지표’를 만들고, 너와 나의 안녕을 묻는 ‘도시 마음산책’을 진행했다. 도시 곳곳에 ‘마음의 안식처’를 만들고자 했다.

개인이라는 말은 영어로 ‘individual’이다. 라틴어 ‘individuum’에서 파생한 말로 ‘쪼갤 수 없는’ 또는 ‘분리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다. 한 개체로서 고유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2024년, 나라 걱정은 조금 덜 하고, 내 곁의 사람을 더 많이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한다. 어느 청년이 말한 ‘동료’란 하소연할 수 있는 사람 아닌가. 하지만 인기척 없는 동네에서 동료는 생기지 않는다. ‘서로걱정모임’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독하되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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