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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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안보국가 함정과 피크 코리아론 국가 정책결정의 중심이 국가안보인가 경제협력(발전)인가는 이분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 이런 식의 이분법은 지구화 시대의 다원주의 체제에 적합하지 않은 개념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의 두 개 전쟁과 글로벌 사우스 문제를 대하는 각국 정부의 정책들에서 이런 이분법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우려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비대칭동맹 전략하에 경제 발전을 추구해, 경제와 안보의 두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한국모델의 신화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여론도 이런 우려를 부추기는 데 일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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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좀비 유니버스’와 힘에 의한 평화? 어쩌다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의 도시 전략 게임에 몰입할 일이 있었다. 게임에 진심인 아들의 유니버스에 다가가 볼까 하는 생각이 출발점이었지만 사실 내 안에 40년 동안 잠재해 있던 초등 시절의 욕망과 쾌감의 소환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놈의 세계가 그리 만만치 않다. 도시 레벨이 점점 올라감에 따라 집착과 애착이 증대되게 설계된 게임으로 그 안에서는 좀비 퇴치를 명분으로 한 네트워크 너머 인간들 간의 투쟁과 동맹의 장이 펼쳐져 있다. 이 게임 개발자들에게 가장 본원적인 동기는 물론 ‘현질’일 것이다. 돈을 쓰면 레벨이 쉽게 올라가고 여러 가지 건설 장비와 무기 장치를 갖추게 되니, 속성 성장에 익숙한 어린 유저들이 꽤 많은 현질을 하게 되었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따라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이 나이에 현금을 내질러 좀비 따위를 물리쳤다고 자위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그런 불평등한 외부 개입이 공정하지 않다는 나름 거룩한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게임의 세계관에서 보면 벼락부자 도시들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시스템 밖의 힘에서 구하는 것이 허락되고 그 유혹은 게임이 유지되는 현실적 동력이 된다. 오랜 문명의 존폐가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좌우된 수많은 사례에 비추어 보면 이런 종류의 설계가 인류 역사를 그리 왜곡하는 것 같지도 않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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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지도자의 품격 며칠 전 서울대는 ‘세계 한인 통일평화 최고지도자 과정’이란 이름 아래 세계 한인 리더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예상을 웃도는 지원자들로 프로그램은 성황을 이뤘다. 세계 각국에서 1년에 두 번 서울대에 들어와 각각 3박4일, 5박6일 오프라인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사이 3개월간은 온라인으로 수강해야 하는 이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에 대해 교내에선 기대치가 높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 열기가 남달라 모두가 놀랄 정도였다. 본 프로그램에는 하태경·이인영 두 현역 의원과 윤영관·정운찬·반기문 등 전직 관료와 정치 지도자들이 열강에 나섰다. 한국 사회의 중도좌우를 망라하는 최고 지도급 인사들이다. 이분들에 대한 참석자들의 관심과 질의, 토론의 수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강의에 대한 청중 평가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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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뽀개버리고 갈아버릴’ 리더십의 귀환 양당체제와 현 정치판을 비판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후보 시절 육성 전화음성이 보도됐다. 거대 양당체제에 신물이 난 제3지대 시민들의 개혁 열망과 무채색 관료주의에 호소하는 통화로 인식될 듯싶다. 때 묻지 않은 손으로 정치해야 한다는 ‘결벽주의’와 ‘반카르텔론’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하지만 다원주의 체제에서의 권력은 연대하는 세력들이 덧대고, 더하고, 공존하고, 때로는 공유하는 그런 것이다. 덕지덕지 기운 스님의 가사장삼처럼 덧댄 거버넌스, 그것이 바로 다원주의 민주주의다. 이런 다원주의 권력은 선과 악으로 갈라지지도 않고 흑백으로 나누어지는 경계도 없다. ‘뽀개버리고 갈아버릴’ 이분법이 설 자리가 없는 다원주의 리더십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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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통일 없는 광복절 통일논의 없는 광복절이 되고 있는 분위기다. 지난해 광복절 당시 우리 정부의 담대한 구상 제안이 북한당국에 의해 무시당한 탓에 정부가 대북 정책이나 통일 논의를 제안하기도 쉽지 않아졌다. 그러다보니 더더욱 우리 국민의 통일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광복절 좌표의 표류를 북한의 반대로만 돌리기엔 상황이 녹록지 않다. 광복절 의미에 맞는 미래전략을 제시하기에 쉽지 않은 글로벌 난제들이 산재해 있고, 동시에 무한 갈등에 빠진 우리 안의 이분법을 다스릴 외교 언술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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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적극 행정의 권력 현상 권력 현상은 다양하다. 때로는 권위와 존경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유·무형의 폭력 행위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권력 현상이 패턴화되거나 구조화되면 마치 권력 현상은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지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 권력자가 권력에 취해 자신이 휘두르는 권력이 권력 행사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 대상이 된 본인이 피해자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해진다. 당초에 권력 연구가 어려운 까닭이다. 권력 연구의 대표적인 논의는 권력을 3가지 차원으로 나누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권력 현상으로 불리는 1차원적 권력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느끼는 강제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1차원적 권력은 소위 의사에 반하는 형태로 강제성을 띠게 마련이고 대다수 유·무형의 폭력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강자의 힘’으로 간주되기 쉽다.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1차원적 권력이야말로 국가라는 메커니즘의 가장 기본 원리이다. 소위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위한 필요악으로 불가피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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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역사청산과 정치교육의 독일식 조합 독일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던지는 나라다. 독일 통일의 선행 경험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통일이 남긴 영광과 상흔은 오늘의 한반도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중 고민을 던진다. 한 조사에 따르면 옛 동독지역 주민 소득은 서독지역 소득의 80%대(2020년 기준 86%)에 머물고 있다. 남북 간 소득 격차가 28 대 1에 달하는 우리에게 독일의 격차는 배부른 소리로 비칠 수도 있지만, 통합사회를 표방한 체제가 그 격차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존중받을 일이다. 경제 격차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그것은 반드시 사회적 문제로 전환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독일의 많은 친구들은 “우리는 그 당시 이런 민주주의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라는 분노와 증오가 증대되고, 영광스럽던 공동체 경험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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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어느 네오콘의 반성문과 정상회담 격조 민주주의 확장과 국가 이익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시기에 외교 정책의 방향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자를 가치의 영역이라고 보면 후자는 대체로 지정학의 영역이고 두 전략 기둥이 한 방향을 가리키면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두 기둥이 동시에 요동치거나 엇갈리는 시기에 국가 전략을 설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시기는 대체로 30년 정도의 주기성을 띠어왔다. 미국 외교협회 ‘포린 어페어즈’지의 편집장을 지낸 기디온 로즈는 1910~1920년대와 1940~1950년대 그리고 1980~1990년대 세 개의 시기를 미국 외교의 3대 구축기라 보았고, 지금 2020년대에 다시 4번째 구축기(fourth founding)를 맞은 미국 리버럴 국제주의의 고민을 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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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외교와 결단, 그리고 민주적 통제 대통령실은 이번 대일 외교를 대통령의 결단에 따른 것이라고 홍보한다. 지지율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국익과 미래를 위해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고뇌와 인간적 면모를 강조하는 것도 좋지만 지도자의 결단이 사회적 합의를 초월할 수는 없다. 대일 외교처럼 민감한 사안은 국내적 합의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여야 한다. 특히 이번 사안은 ‘국가 간 협약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느냐’라는 인권 논의의 핵심 쟁점을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대법원이 인정한 청구권 당사자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한 대통령의 결단은 피해자의 ‘자유’를 배반하게 된다. 과거와 달리 결단은 민주적 외교의 범주가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라고 해서 비상적 통치행위가 없을 수 없지만, 강제동원 문제처럼 오랫동안 쟁점이 된 사안에 비상적 상황을 들이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포퓰리즘 정치나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지도자의 결단이 추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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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법무부 장관의 논리학 조건 명제를 다룰 때 범하기 쉬운 가장 간단한 논리적 오류는 전건 즉 앞 조건문을 부정하는 논법이다. 소위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거나 부정한답시고 앞 조건을 부정하는 조건문을 만들기 쉬운데, 그것은 대표적인 오류 논법인 ‘전건 부정의 오류’다. 요즘엔 형식논리학을 많이 다루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건 부정의 오류’는 논리학에서는 근본의 근본에 해당하는 문제다. 조건문 즉 <if “p clause” is true, only in that case “q clause” is true.> 라는 조건 문단이 성립될 때, 바로 그 전건(앞 조건문) 즉 ‘p 구절’이 참이 아닌 상황을 제기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후건, 즉 ‘q 구절’의 참 거짓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 이를 무리하게 연결시키는 경우 그것은 궤변이고 논리적 오류이다. 종종 논리학에 무지한 저질 논쟁에서나, 그것이 오류임을 아는 권력자가 무지한 비권력자를 겁박할 때 전건부정법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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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대북정책 3D의 순서와 외부효과 북한의 핵개발사는 국제사회의 비판과 오랜 제재에 따른 비용을 무릅쓰고 비핵화에 역행해왔다. 반면 우리의 북한 비핵화 정책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고 심지어 실패를 거듭해왔다. 모든 정책은 비용을 부담한다. 북한 비핵화 정책도 예외일 수는 없다. 북한은 이미 많은 비용을 부담했기 때문에 그들의 비핵화는 과거 비용에 대한 논란이 중심이다. 그래서 그들은 천문학적 비용에 대한 보상 심리로 똘똘 뭉쳐 있고 획기적 상황 변화가 없는 한 달려온 경로를 이탈하기 어렵다. 반면 우리에게 북한 비핵화는 미래 비용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다. 그러다보니 미래 비용의 규모나 산정 방식에 대한 이견은 상당하다. 여기에 미국이나 일본 등 국제 변수를 넣으면 더 복잡해진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라는 용어보다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비용 산정에서 우리에게 주는 함의가 다르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단어를 통해 한국에도 비용 부담의 의무가 있다는 점을 주지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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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자유담론 벌써 25년여 전으로 기억된다. 김대중 대통령의 자택 앞 당선 일성이 바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론이었다. 우리 정치학도들로서는 왠지 수업 시간에 다루던 이론을 현실에서 직면한 느낌이어서 감탄과 의아함이 교차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외환위기를 맞이한 한국은 민주주의를 희생해서라도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관성에 난감해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도 박정희 모델을 찬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당시에는 어떠했겠는지 생각해보면 그 분위기를 쉽게 짐작할 만하다. 일부 엘리트들은 잘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라는 사치품쯤은 후일 찾아도 된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고, 냉전기 정치학자들이 ‘근대화론’ 즉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전리품이라고 설명한 맥락도 모른 채 오로지 선경제론을 주장하는 아류 이론들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