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네오콘의 반성문과 정상회담 격조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민주주의 확장과 국가 이익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시기에 외교 정책의 방향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자를 가치의 영역이라고 보면 후자는 대체로 지정학의 영역이고 두 전략 기둥이 한 방향을 가리키면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두 기둥이 동시에 요동치거나 엇갈리는 시기에 국가 전략을 설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시기는 대체로 30년 정도의 주기성을 띠어왔다. 미국 외교협회 ‘포린 어페어즈’지의 편집장을 지낸 기디온 로즈는 1910~1920년대와 1940~1950년대 그리고 1980~1990년대 세 개의 시기를 미국 외교의 3대 구축기라 보았고, 지금 2020년대에 다시 4번째 구축기(fourth founding)를 맞은 미국 리버럴 국제주의의 고민을 논하고 있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국 외교 역시 이 3번의 구축기에 크게 국운이 요동쳤다. 첫 시기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허우적거리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면, 두 번째 시기에는 독립과 분단 그리고 전쟁이라는 조합을 강요받았다. 세 번째 구축기에 한국경제는 눈부시게 도약했지만 독일과 달리 분단체제에 잔류하게 되었다. 납작 엎드린 중국과 다른 전략을 펴 배제의 대상이 된 북한의 탓이기도 하지만, 한·중수교를 기점으로 북방정책에서 세계화 전략으로 갈아탄 김영삼 정부의 ‘배제와 흡수’ 전략에 기인한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로부터 30년, 보수 정부의 ‘배제와 흡수’는 진보 정부의 ‘시혜’와 동전의 양면으로 한국의 대북 우위 테제를 꿋꿋이 지탱하며 대북정책 프레임을 유지하고 있다.

당면해서 미국 외교의 4번째 구축기가 한국 외교에 던지는 질문과 숙제는 만만치 않다. 먼저, 인·태 프레임이 가치동맹화하는 시기에 한반도의 지정학과 그 지위에 변화가 없는가라는 질문이다. 아베파는 노골적으로 대답한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기, 북방은 없다. 대만 유사(有事·사변)는 일본 유사이지만 한반도는 하위 변수이다.” 일본이 이처럼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다면, 한국은 우리를 밀쳐내는 미·일동맹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져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한반도는 플랫폼이요라고 선언하며 몸값을 높이는 전략을 고민할 텐가?

다음은 ‘노(No)’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국격과 그 실현 방법론에 대한 문제이다. 문재인 정부가 일본에 대해서 No라고 할 수 있는 외교를 폈다면, 현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를 No의 대상으로 삼기로 작정한 듯하다. ‘사드 3불’이 치욕이며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결기는 높이 사야 한다. 그러나 기업과 국민의 이익, 즉 먹고사는 문제와 지도자의 결기가 엇갈려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가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해 ‘소·부·장 자립’으로 대응해 성공했던 경험에 비견할 만한, 대중, 대러 비방전의 기초 체력 마련이 기대된다. 혹시라도 후폭풍에 대한 대책 없이 그 부담을 국민과 기업에 전가한다면, 느닷없는 독도 방문으로 한·일관계를 파탄 낸 이명박식 지지율 먹튀 외교의 재판이다.

마지막 질문은 역시 대북 승리테제다. 북한 군사 전략의 진화 속도는 예측을 확연히 넘어서고 있다. 우리 군의 탐지 능력을 벗어나는 북한의 군사 기술 능력이 속속 공개되고, 카트리지화된(?) 핵무기가 전시될 정도로 상황은 녹록지 않다. 승리테제에 근거한 ‘배제와 흡수’ 전략을 유지하면서 북한의 군사변환에 대응하자니 한·미 동맹은 바쁘다. 항모에 전략폭격기에 각종의 확장 억지력을 과시하지만, 대북 억지력은 눈높이에 맞지 않다. 전통적인 ‘배제와 흡수’를 뒷받침하는 더 강력한 동맹 변환 요구에 대한 미국의 비용 청구 역시 엄격하다. 배터리, 반도체, 자동차 등 경제 이슈에 더해, 대만 문제를 한·미 동맹이 논의하자는 태도다. 대통령은 글로벌 중추국가인 한국이 대만에서도, 우크라이나에서도 역할을 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반문한다. 하지만 한·미 동맹이 대북 억지 동맹에서 글로벌 가치 동맹으로 전환하는 순간 안보문제는 경제를 집어삼킨다. 글로벌 중추국가가 안보국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는가? 북한 때문에 안보국가의 길을 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포린 어페어즈’에 재밌는 논쟁이 게재되었다. 20년 전 네오콘의 전사로 민주주의 확산과 군사변환 전략을 추구했던 젊음과 이상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갑론을박, 4번째 구축기를 맞이한 미국의 고심은 깊어가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은 미국의 이런 변환과정에 대한 한국의 대응을 보여줄 터인데, 외교 마찰이 발생한 뒤끝이라 한국 외교의 격조와 성숙도를 모두가 주시하고 있다. 대통령의 성찰과 실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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