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와 결단, 그리고 민주적 통제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대통령실은 이번 대일 외교를 대통령의 결단에 따른 것이라고 홍보한다. 지지율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국익과 미래를 위해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고뇌와 인간적 면모를 강조하는 것도 좋지만 지도자의 결단이 사회적 합의를 초월할 수는 없다. 대일 외교처럼 민감한 사안은 국내적 합의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여야 한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특히 이번 사안은 ‘국가 간 협약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느냐’라는 인권 논의의 핵심 쟁점을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대법원이 인정한 청구권 당사자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한 대통령의 결단은 피해자의 ‘자유’를 배반하게 된다. 과거와 달리 결단은 민주적 외교의 범주가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라고 해서 비상적 통치행위가 없을 수 없지만, 강제동원 문제처럼 오랫동안 쟁점이 된 사안에 비상적 상황을 들이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포퓰리즘 정치나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지도자의 결단이 추앙된다.

결단의 외교는 민주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합리적’이지도 않다. 국내 여론을 이유로 외교정책 레벨에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게임의 논리는 외교가의 상식이다. 결단을 강조하게 되면 그런 국내 여론으로 상대를 압박할 명분이 사라진다. 정부가 주장하는 미래를 위해서도 합리적이지 않다. 한번 결단을 강조하게 되면 앞으로 모든 외교에서 대통령은 자신의 결단과 싸워야 한다. 중견국 한국의 외교는 운신의 폭이 더 좁아지게 되었다. 오늘의 긴장된 한·일관계를 만든 이명박 외교를 돌아보자. 2012년 친일 외교 비판이 거세지자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느닷없이 독도를 방문했다. 그는 조용한 외교와 실효적 지배론을 통해 영토권 문제를 지켜온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만들어 놓는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이다. 대통령의 지그재그식 독단에 대해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반론이 들끓었다. 그런 구태는 영웅주의 서사이긴 하나 백번 천번 양보해도 합리적 외교의 사례는 아니기 때문이다.

합리성의 견지에서 보면 찻잔 채우기론은 또 다른 논란의 대상이다. 우리가 물을 반 잔 채웠으니 일본이 반 잔 채울 거라는 상호주의는 한·일관계에 대한 일본의 시각이 훨씬 근본주의적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순진한 기대이다.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고 소재·부품·장비 사업에 대한 제재를 가한 것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다. 그 불신은 위안부 합의나 징용 배상과 같은 역사 문제도 아니고 골대 옮기기와 같은 협상의 기싸움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라는 데 본질적 난점이 있다.

2018년 12월 발생한 초계기 사건은 한국이 유엔 대북 제재를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 비법적 국가라는 일본의 의심과 한국의 대북 협력 정책이 충돌한 대표적 안보 갈등이었다. 북한 선박 구조를 둘러싼 광개토함과 일본 초계기 간의 저공비행론과 레이저 조준설 간의 갈등을 한국이 해프닝으로 간주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전쟁 가능한 한·일관계’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사건이라고 규정지었다. 그에 따른 보복 조치가 바로 2019년 7월의 소·부·장 제재였던 것이다. 일본은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나 동해 탈북 선원 북송사건 등으로 한국의 안보 수장들이 재판을 받고 있는 사건의 연장선에서 당시 초계기 사건의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추론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명백한 내정간섭이요 한국 군부에 대한 굴욕의 강요이다. 일본으로서는 전통적이고 정상적인(?) 한·일관계 복귀를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로서는 군부의 자존심과 국체가 걸려 있는 아찔한 비탈길 싸움이 된다.

일본이 외교적으로 완승했지만, 한국 친구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가 필요하다고 일본 친구들은 말한다. 우리 대통령께서는 미래를 향한 외교에서 이기고 지고의 논법을 갖다 댈 일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아직은 받지 못하고, 주고만 온 협상인 인상이 강해 국내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어음은 아니 입장권은 받았다. 4월 미국 국빈 방문, 5월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참석 등 굵직한 외교 일정이 확정되었다. 여기서 채워질 나머지 반 잔의 내용에 관심이 가는 것은 그래서이다. 하지만 일본이나 미국이나 경제 사정을 보면 제 코가 석자이다. 북한발 안보 위기에 일본이나 미국이나 역시 뾰족한 수는 없는 듯하다. 뭔 선물이 있을지 두고 볼 일이지만 자칫 사과는 더 큰 굴욕으로 이어진다는 강대국 외교의 본질을 확인한 3월로 기록될까 걱정이 앞선다. 외교·국방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사회적 합의라는 대의에 빈말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떠올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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