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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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편리’라는 감금 장치 딸네가 새로 이사한 집은 29층이다. 베란다가 없는 아파트여서 거실에서 창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 때문에 나도 모르게 물러서고 만다. 어쩌면 내가 유난스러운지도 모르겠다. 시골 읍내의 아파트에 사는 동생네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더 높이는 안 올라가 봤을까. 22층인 동생네 집에서 바깥을 보면 어릴 때부터 익숙한 들판인데 지금은 도로와 온갖 비닐하우스로 뒤덮여 있다. 그래서 그런지 노모를 모시고 사는 동생네 집에 가면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들판이 거의 대부분 논이었을 때의 이런저런 기억 때문에 들판을 배반하고 사는 삶은 도대체 무엇인 걸까,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들판에 아파트를 짓고 공장을 짓고 사는 게 정말 잘 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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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님’의 회복을 위하여 연말이 다가오자 조금은 생뚱맞게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가 생각난다. 물론 마음만 가지고 있다가 실행을 하지 못한 어떤 계획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기다리고 기다리다 끝내 무너지고 만 김소월의 ‘님’이라든가, 보내지는 않았지만 떠나버린 한용운의 ‘님’이 우리 근대시(영혼)의 원형 같은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 철학은, 범박하게 말하는 게 용서된다면,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예술을 자기의 ‘님’으로 삼았기에 그렇게 깊고 방대해졌는지 모른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서 자신의 역량만큼 물을 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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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대통령의 실용주의와 우리의 미래 이재명 대통령이 자신의 노선으로 실용주의를 내세웠을 때, 이념적 도그마에서 자유로운 실사구시의 길을 가길 바랐다. 보수든 진보든 혹은 좌든 우든 근대적 세계관에 갇혀 있다고 평소에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용주의라는 다소 위험한 언어가 이왕이면 자유롭고 활달한 실사구시적인 맥락을 갖길 바랐던 것이다. 유시민 같은 이는 이재명 대통령의 사고가 연역적이 아니라 경험에 근거한 귀납적이라고 말했지만 그런 논리학적 구분법도 사실 어떤 도그마에 의거한 말이다. 경험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개인의 꿈과 상상력, 역사와 공동체에 대한 비전이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만일 실용주의에 그러한 것이 없다면 그 실용주의는 가벼운 성과주의에 머물고 말며 대통령의 경우는 국가 공동체에 깊은 내상 혹은 질환을 심어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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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아름다운 나라’란 무엇인가! 백범 김구는 1947년에 ‘나의 소원’을 쓰면서, 이것은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을 위함이라고 말했는데, 백범이 꿈꾼 진정한 독립은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는 일이었다. ‘나의 소원’에는 요즘 너도나도 입에 올리는 “아름다운 나라”와 “높은 문화의 힘”이 언급된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장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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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학살 시대의 복판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바탕에는 ‘근대적 합리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나치 시절 근대적 합리성의 비근한 예로 관료제를 들었는데 사실 관료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미 시작됐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제임스 R 베니거는 19세기의 관료제는 정보의 프로세싱을 ‘줄이면서(preprocessing)’ 통치의 합리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근대적 합리화는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들을 통치의 효율을 위해 줄이고 덜어내는 것이라 해석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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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전주시와 완주군의 통합이라는 퇴행 전주시와 완주군의 통합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삼례 그림책미술관에 강의를 다니던 작년이었다. 농촌의 읍 단위에서는 드물게 시를 읽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신선한’ 제안을 받아들여 지난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드나들게 된 것이다. 처음에 통합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도대체 이 식상하고 진부한 상상력은 언제쯤 사라지나 답답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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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기후재난이 ‘뉴노멀’이라고? 이번 여름도 상당히 길 것이라 예상을 했다. 무슨 정보와 자료 때문이 아니라 기후의 변화 폭이 매년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봄 더위·가뭄과 이어 벌어진 무자비한 산불을 보면서 여름에는 해수면 온도가 올라 폭염과 폭우가 반복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다. 예측하기 힘든 기후가 됐다고는 하지만 다르게 보면 예측이 더 쉬워진 측면도 있다. 아마 예측하기 힘든 것은 재난의 장소와 현상이다. 폭우가 어디에 얼마만큼 내릴지 기상청이나 기상 전문가들이 예측하지 못하게 된 상황은 그만큼 대비를 힘들게 한다. 그렇다고 일상의 생활을 재난 대비에 다 쏟아붓는 것도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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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이준석 제명이 의미하는 것들 이준석의 의원직 제명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지난 27일 현재 59만명에 달한 것으로 보도됐다. 22대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한 진보당 손솔 의원은 “국회가 국민의 요청에 답해야 한다”며 “국회 윤리특별위원회가 하루빨리 구성돼 징계안이 논의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이준석이 지난 대선 때 보여준 충격적인 발언은 물리적 상해나 경제적 피해를 끼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욱 심각한 정신적, 정서적 학대에 가깝다. 따라서 이준석 ‘의원’을 일벌백계로 징계해야 온라인상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언어의 타락에 경종을 울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준석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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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이익균점권을 생각하다 지난달 27일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이준석 후보에 의해 저질러진 압도적으로 해로운 성폭력 발언으로 나라가 들썩거렸는데, 이날 소중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권영국 후보가 이재명 후보에게 이익균점권에 관해 묻자 이재명 후보가 그 필요성만은 인정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떻게, 그리고 과연 현실화할 수 있는지는 좀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다. 이준석 후보의 해로운 발언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속에서도 몇몇 언론은 이익균점권을 언급했는데 우리는 한국전쟁과 더불어 잊혔다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정권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익균점권을 ‘지금’ 다시 호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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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4월은 갈아엎는 달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2025년 4월4일 오전 11시22분, 안국역 인근 도로에 모인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고, 부둥켜안고,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난해 12월3일에 일어난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122일 만에 헌법이 윤석열의 대통령직을 파면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전 국민이 목격자가 된 현행범은 자신의 범죄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나라를 극도의 내분 상태로 처박기까지 했다. 심지어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들먹이며 자신의 쿠데타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파렴치도 보여줬다. 박정희도 자신의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불렀으니 그렇게 새로울 것은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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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덕과 우애로서의 민주주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의 첫 문장을 “모든 국가는 분명 일종의 공동체이며, 모든 공동체는 좋음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된다”라고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적 사례를 들며 귀족정,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에 대해 말하는데, 오늘날의 관점으로 읽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차지하고 있는 서양 정신사의 후광에 기대 무슨 실용을 기대한다면 별 재미를 못 볼 가능성이 크다. 특히 현재의 ‘민주주의’가 모욕당하고 오염되고 있다고 해서 그에게 철학적 응원을 바란다면 더 그럴 것이다. 단언하자면, 이 책은 근대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철학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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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쿠데타 12·3 쿠데타 사태의 종국은 최소한 윤석열의 파면과 구속, 그리고 쿠데타 가담자들의 법적 처리 등일 것이다. ‘최소한’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상황에 국한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김건희와 그를 믿고 호가호위하던 세력들도 곧 그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윤석열의 등장 자체가 엽기적인 사태여서 그의 집권이 ‘정상적으로’ 종료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오다가, 예상보다 더 폭정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서는, 마지막이 어떤 모습이든 임기를 제대로 채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리라는 판단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고 아직까지 총체적인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경악스러운 정권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