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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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새로운 정당이 절실한 까닭 폭염에, 가뭄에 온 목숨들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있다. 바깥의 열이 너무 뜨거워 차라리 창문을 닫아버리는 게 나을 지경이다. 한여름에 문을 닫고 살기는 난생처음이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여름에 습도가 높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스페인과 프랑스, 미국의 산불은 어찌 된 것일까? 올여름이 엘니뇨 현상으로 최악의 여름이 될 것이라는 경고는 이미 있었다. 하지만 단기간에 마련할 수 있는 대비책으로 마땅한 게 있을 리 없다. 자연이 부리는 신비스러운 이상 기온이라면 우리가 다하는 최선이 허탈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후변화가 기후위기로, 기후위기가 기후재난으로 언어가 바뀌는 데에도 세계는 지금껏 살아온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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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위선자들의 민주주의 더불어민주당은 야당일 때 언제나 개혁적 중도 정당인 것처럼 포즈를 취한다. 그러다 집권 여당이 되면 숨겨져 있는 본색을 드러내듯 언제나 재벌과 대기업 중심의 경제 성장 정책을 밀어붙인다.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성장이란 곧 자본의 탐욕스러운 증식일 뿐이지만,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더라도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의존은 수구 정당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민주당이 집권하고 난 다음에 어김없이 수구 세력이 권력을 차지하는 반복적인 현상은 민주당이 추구하는 경제 성장이 결국 기득권 세력을 강화해주는 결과를 낳음과 동시에 최소한 중도 개혁이라도 바랐던 민심을 저버린 탓이 클 것이다. 자본주의 현실을 벗어나 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자본주의가 마냥 좋지는 않다는 숨겨진 민심을 헤아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를 찬양하거나 의식하고 사는 서민들은 많지 않다.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짙을지언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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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AI와 농어촌기본소득 그리고 기후위기 농어촌기본소득 시범 사업이 10개 군에서 17개 군으로 확대됐다. 기존 시범 사업 지역인 옥천군의 사례가 보도된 후 발표된 것이지만 예전에도 대통령이 이 사업을 확대하겠다고 언급한 적이 있으니 즉흥적인 결정은 아닌 것 같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은 농어촌특별세를 그 재원으로 사용해서 영구화하자는 제안까지 하고 있다. 돌아보면 지난날 ‘녹색평론’을 중심으로 농민기본소득 이야기가 나온 이래로 이만한 성과를 이룬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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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AI와 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조건이나 문화, 혹은 사회적 관계 등이 시 쓰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내내 믿어왔다. 사실 인간의 마음과 내면이라는 것은 선험적으로 또는 ‘혼자, 오롯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와 같은 것들과 한 몸인 채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 탓이기도 할 테고 그동안 만났던 사람이나 읽었던 책의 영향도 깊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이런 관념마저도 나의 것만이 아닌 것이다. 사실 관념이니 마음이니 내면이니 나누는 것도 우스운 일인데 몸과 마음은 본래 분리 불가능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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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AI가 은폐한 진실들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AI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이 아닐까 싶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일본에서도 AI 데이터센터 건설을 위한 경쟁이 한창이라는데, AI 산업에 대한 이 열망 혹은 맹목은 국가 단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며 여기서 도태되면 미래로 가는 문이 닫힐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경우, 비수도권 지역은 그만큼 위기감을 느끼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른바 ‘지방 소멸’이라는 ‘에비’가 사람들의 마음과 무의식을 짓누르고 있다는 뜻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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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러다이트가 뭐 어때서! 현대차 노동조합이 노사합의 없이는 로봇을 단 1대도 들일 수 없다고 하자, 기득권 언론들은 현대차 노동조합의 말을 침소봉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은 ‘21세기판 러다이트’니 ‘로봇 쇄국’이니 저급하게 반응했고 이재명 대통령은 “흘러오는 거대한 수레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차 노동조합은 단체협약에 명시된 대로 ‘노사합의’를 강조한 측면이 있지만 ‘단 1대도’에 감정이 실린 감도 없지 않다. 이 문제는 2025년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선보인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를 2028년까지 3만대 생산해 현장에 투입하겠다고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밝혀서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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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인간마저 ‘쓰레기’로 만들겠다는 AI 인공지능(AI)을 단적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데이터로 활용해 환영(할루시네이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AI의 부작용이 아니라 본질이라고 해야 맞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데이터인데 인터넷을 통해서 엄청나게 축적된 데이터가 없었다면 현재의 AI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2010년 제프리 힌턴이 드디어 기계에 학습을 성공시킨 것도 인터넷상의 데이터 때문이었음은 이제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물론 20세기 내내 누적된 기술적 진보나 근대자본주의 문명이 폭발시킨 미디어 환경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AI는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근대자본주의 문명이 ‘끝내’ 산출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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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편리’라는 감금 장치 딸네가 새로 이사한 집은 29층이다. 베란다가 없는 아파트여서 거실에서 창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 때문에 나도 모르게 물러서고 만다. 어쩌면 내가 유난스러운지도 모르겠다. 시골 읍내의 아파트에 사는 동생네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더 높이는 안 올라가 봤을까. 22층인 동생네 집에서 바깥을 보면 어릴 때부터 익숙한 들판인데 지금은 도로와 온갖 비닐하우스로 뒤덮여 있다. 그래서 그런지 노모를 모시고 사는 동생네 집에 가면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들판이 거의 대부분 논이었을 때의 이런저런 기억 때문에 들판을 배반하고 사는 삶은 도대체 무엇인 걸까,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들판에 아파트를 짓고 공장을 짓고 사는 게 정말 잘 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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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님’의 회복을 위하여 연말이 다가오자 조금은 생뚱맞게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가 생각난다. 물론 마음만 가지고 있다가 실행을 하지 못한 어떤 계획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기다리고 기다리다 끝내 무너지고 만 김소월의 ‘님’이라든가, 보내지는 않았지만 떠나버린 한용운의 ‘님’이 우리 근대시(영혼)의 원형 같은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 철학은, 범박하게 말하는 게 용서된다면,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예술을 자기의 ‘님’으로 삼았기에 그렇게 깊고 방대해졌는지 모른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서 자신의 역량만큼 물을 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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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대통령의 실용주의와 우리의 미래 이재명 대통령이 자신의 노선으로 실용주의를 내세웠을 때, 이념적 도그마에서 자유로운 실사구시의 길을 가길 바랐다. 보수든 진보든 혹은 좌든 우든 근대적 세계관에 갇혀 있다고 평소에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용주의라는 다소 위험한 언어가 이왕이면 자유롭고 활달한 실사구시적인 맥락을 갖길 바랐던 것이다. 유시민 같은 이는 이재명 대통령의 사고가 연역적이 아니라 경험에 근거한 귀납적이라고 말했지만 그런 논리학적 구분법도 사실 어떤 도그마에 의거한 말이다. 경험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개인의 꿈과 상상력, 역사와 공동체에 대한 비전이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만일 실용주의에 그러한 것이 없다면 그 실용주의는 가벼운 성과주의에 머물고 말며 대통령의 경우는 국가 공동체에 깊은 내상 혹은 질환을 심어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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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아름다운 나라’란 무엇인가! 백범 김구는 1947년에 ‘나의 소원’을 쓰면서, 이것은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을 위함이라고 말했는데, 백범이 꿈꾼 진정한 독립은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는 일이었다. ‘나의 소원’에는 요즘 너도나도 입에 올리는 “아름다운 나라”와 “높은 문화의 힘”이 언급된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장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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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학살 시대의 복판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바탕에는 ‘근대적 합리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나치 시절 근대적 합리성의 비근한 예로 관료제를 들었는데 사실 관료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미 시작됐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제임스 R 베니거는 19세기의 관료제는 정보의 프로세싱을 ‘줄이면서(preprocessing)’ 통치의 합리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근대적 합리화는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들을 통치의 효율을 위해 줄이고 덜어내는 것이라 해석해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