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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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별일 없는 한국타이어 광장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뜨거웠던 겨울에서 봄, 노동자들의 일터는 별일 없이 돌아갔다. 지난겨울 내내, 노동자들의 사망사고로 공장에 갈 때마다 낯선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광장의 아우성에 무관심한 기계의 규칙적인 굉음이 차갑고도 무자비한 기업의 질서를 일깨워주었다. ‘대한국민’의 운명을 좌우한 광장 민주주의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팻말이 걸린 공장 문 앞에서 멈춘다는 것을 노동자도, 관리자도, 기업도 아는 듯했다. 노동자는 여전히 일하다 다치고 죽었다. 기업은 여전히 ‘중대재해처벌법’ 처벌을 피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고용노동부의 부실한 관리·감독은 어떠한 변화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몇해 전 건설노동자의 죽음에 “이건 비일비재한 추락사다”라고 유가족 앞에서 멀쩡하게 되뇌던 사법부는 헌법재판소의 ‘명문’ 이후에도 그저 그런 판결문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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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특별히, 연장근로에 반대한다 또다시 주 52시간 상한제를 무력화하는 큰 구멍이 뚫렸다. 반도체 연구·개발직 특별연장근로를 한 번에 최대 6개월까지 허용해주는 행정지침이 지난 14일부터 시행됐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입법의 경우 오래 걸리지만, 행정조치는 한 달도 안 걸릴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기자들에게 전한 것이 지난 11일이다. 바로 다음날 정부는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반도체 연구·개발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 보완방안’을 마련했고, 이어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를 확정·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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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그래도 민주당은 다르다는 말 “이제부터 국민의힘이나 더불어민주당이나 다 같다는 말 하지 마세요.” 12·3 계엄 이후 인문학 연구자들의 작은 공부모임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게. 그때는 윤석열이 계엄을 할 줄 몰랐지”라며 이어지던 말들 사이에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다수가 윤석열이 탄핵되면 민주당이 집권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가. 2017년 박근혜 탄핵 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 광장은, 시민들은 무엇을 기대했었나. 5·18 유가족 앞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대통령은 ‘페미니스트 대통령’ ‘비정규직 제로시대’ ‘저녁이 있는 삶’을 호기롭게 외치던 것과 달리 어떤 정책이든 빠르게 포기하거나 절충했다. ‘공약대로’ 추진하되, 여러 우회로를 만들어 제도를 내부로부터 허물어버렸다. 최저임금 1만원 시대를 열겠다더니, 최저임금을 올리는 대신 산입범위를 확대해 ‘올랐지만 오르지 않은’ 월급봉투를 들고 어리둥절해했던 노동자들은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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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무안공항으로 가는 길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죽음’과 관련된 피해자는 두 번의 피해를 경험한다. 개별의 ‘사건’은 저마다 다르다. 일하다 죽거나 재난·참사의 피해자가 되는 각각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첫 번째 ‘사건’ 이후, 진실에서 소외되는 체계적인 박탈의 경험을 공유한다. 이 과정에서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의 피해가 발생한다. 이들은 ‘피해자의 가족’에서 ‘피해자’가 되는 경험, 살아서 ‘유가족’이 되었지만, 그 ‘사건’의 피해를 ‘사건 이후’ 겪어낸다는 점에서 또 다른 당사자이자 주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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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현대제철의 이상한 책임정치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이후 경영책임자는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가? 대기업일수록 절차적, 형식적 안전제도는 강화하고 있는 모양새다. 작업의 절차와 방식을 정하고, 취해야 할 안전조치를 매뉴얼화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원청과 하청 상관없이 위험을 신고하는 ‘안전신문고’ 같은 제도도 중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절차와 형식이 노동자 사망사건에 대한 경영책임자의 책임 면피를 위한 ‘알리바이’용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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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위선의 정치 다음에 오는 것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 열겠다.”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후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한 약속이다. 당시 공사는 비정규직 비율이 88%였다. 대통령의 약속 이후에 벌어진 일은 이른바 ‘인국공 사태’였다. 그제서야 1996년 ‘노동법 개악 날치기 통과’ 이후 신자유주의가 행한 노동정책이 노동자의 집단적 심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가 명백해졌다.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누군가가 일터에서 나가야 했을 때, 그때 이미 노동 내부의 틈은 벌어졌다. 법과 제도, 행정명령이 동원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틈, ‘핵심노동’과 ‘비핵심노동’의 구별은 노동의 위계를 상징하는 기다란 사다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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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두 번째 핼러윈과 안전권 “재난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재난은 ‘남의 일’이에요.” 몇해 전 대구지하철참사 20주기를 앞두고 참사 유가족이 내린 재난의 정의다. 20년이 넘게 여전히 싸우는 유가족에게는 싸움이 치유의 과정이자 생존자를 괴롭히는 또 다른 고통이 각인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싸우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온전하게 살아가기 힘들었겠지만, 또 그렇게 싸워서 베인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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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작업중지권 없는 폭염 대책 올여름은 유독 조바심이 났다. 폭염일수가 지속될수록 지겹게 떠나지 않는 여름 끝자락이 징글징글했다. 올여름은 노동자들이 쓰러지고 죽을 만큼 더웠다. 더위를 못 견디고 노동자가 죽는 여름을 원망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미국의 공학자 윌리스 캐리어가 에어컨을 발명한 것이 1915년의 일이다. 에어컨이 처음 설치되던 곳은 가정집이 아니라 산업현장이었다. 100년이 훨씬 지나고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에어컨은 인권이다’를 외치며, 작업장에 에어컨 설치를 요구하는 시위와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2021년 즈음부터다.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들이 폭염 시기 달궈진 물류현장과 혹한기 냉동창고보다 더 추운 물류현장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여름이 되면 박스를 옮기다, 배송을 하다 소리 없이 사망하는 노동자들이 늘었다. 겨울이 되자 알량한 핫팩 두 개에 의지하다 새벽녘 핫팩의 온기가 식을 즈음 내가 흘린 땀이 순식간에 내 몸을 얼게 만들어 돌연사로 생을 마감하는 노동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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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한겨울 ‘폭염백서’를 기다리며 어제 회를 먹었다. 광어, 우럭 그리고 또 매번 듣지만 기억나지 않는 물고기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더 시원한 맥주에 차가운 회 한 점, 시원했다. 아침에 일어나 행정안전부 홈페이지 ‘안전관리일일상황’을 들여다본다. 올여름 폭염이 시작되고 생긴 습관이다. 다행히 어제는 폭염으로 누군가 사망하지 않았구나. 그러나 조피볼락 1만7871마리, 쥐치 2883마리, 도다리 4352마리가 죽었다. 어제 먹은 싱싱하다 못해 쫄깃함이 터지는 물고기는 폭염을 견뎌낸 것들이구나. 양식장 위로 둥둥 뜬 물고기들은 어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뜰채로 걷어냈을까. 같은 날 돼지와 닭, 오리도 1057마리가 죽었다. 맥없이 축 늘어진 동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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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재난의 치안화’ 시행령 정치 윤석열 정부가 재난을 대하는 태도는 증상적이다. 이태원 참사 때 유례없는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는가 하면, 모든 애도행위에 대해 참사를 정치화한다며 비난했다. 재난에 대한 ‘무한 책임’을 강조하던 윤 대통령은 당시 김진표 국회의장과의 독대에서 이태원 참사의 ‘조작 가능성’을 언급했다. 표면적으로는 갈지자 행보인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난에 대한 보수세력들의 거부감과 피해의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더 정확히는 재난으로 촉발된 대중적 불신과 불만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데서 나온 방어적이고 무능력한 반응이다. 이명박 정부의 소고기 광우병 사태,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참사는 그들의 정치적 DNA에 깊이 박혀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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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우리와 당신의 ‘주말이 있는 삶’ “개처럼 뛰고 있어요.” 지난 5월28일 쿠팡의 배송전문 자회사 쿠팡CLS에서 배송기사로 일하던 정슬기씨(41)가 사망하기 전 남긴 쿠팡 측과의 문자메시지다. 전국택배노조는 심근경색의증이라는 사인을 근거로 과로사를 주장하고 있다. 정씨는 사망 전 하루 10시간이 넘는 야간 고정노동을 수행했다. 그는 1t 트럭을 보유한 특수고용직 배송기사로, 건당 수수료를 받고 배송하는 쿠팡의 간접고용 노동자다. 대부분의 배송기사들은 특수고용직으로 ‘위장된 자영업자’의 삶을 살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자영업자는 남들 쉴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도 일하는 남다른 ‘결심’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 그래야 ‘월급쟁이’만큼 벌 수 있다. 특수고용직, 간접고용과 같이 뜻을 알기 어려운 단어들은 모두 노동자가 자영업자의 신분을 뒤집어쓰고 일하는 불안정한 노동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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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조선소 ‘위험의 이주화’ 멈춰야 2023년 BTS의 팬덤 ‘아미’는 10주년 페스타를 즐기기 위해 전 세계에서 한국을 방문했다. 40만명의 글로벌 고객을 맞이하기 위해 한덕수 국무총리는 각 부처에 안전관리를 긴급 지시했다. 많은 인파로 인한 안전사고와 더운 날의 온열질환 대비, 그리고 각국의 언어로 된 안전방송과 표지판 등을 주문했다. 다행히 축제는 즐거웠고 안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