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직후, 한국의 재난을 취재하던 독일 기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기자에게 가장 이상한 것은 참사 유가족들이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성격이 급해서 그러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가족의 소식을 알기 위해 서울의 경찰서와 병원 응급실 여기저기를 헤매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세월호 참사는 진도 팽목항에 서서 우는 실종자 가족들로 기억되고, 대구지하철 참사는 화재가 난 중앙로역 앞에서 노숙을 하며 불에 타다 만 뼛조각이라도 발견되기를, 아니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달을 버틴 가족들로 기억된다.
재난뿐만 아니라 산재사망의 경우, 유가족이 되고서야 알게 되는 권리가 있다. 그리나 그 권리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유가족에게 보장된 적이 없다. 유가족에게 가족의 죽음에 대한 ‘알권리’는 권리가 부재한 현실로부터 시작된다. 그 불신과 절박함이 유가족을 거리에 서게 한다.
독일 기자는 나에게 한국은 때가 되면 알아서 가족의 사망 소식을 알려주고, 제도적으로 보장된 사망보상금과 장례절차가 담긴 안내서를 보내주는 국가가 아니냐고 물었다. 유가족에게 국가가 발송해야 할 공문서는 어떤 형식이어야 할까? 국민연금 수령안내문이나 세금고지서처럼 이름과 주민번호만 다를 뿐 일률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식으로 유가족의 알권리는 충족될 수 있을까?
그것은 진심과 성의를 담아내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선거공보물과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불충분한 공약이지만 최선을 다해 공약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건네는 선거공보물처럼, 유가족에게 당장 필요한 정보와 앞으로 원인조사를 포함한 사고 해결 과정을 설명하고 이 과정에 유가족의 참여를 보장하는 우편물이 먼저 도착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재난·산재와 같은 사회적 죽음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에게 국가가 수행해야 할 의례적 절차들이 필요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하고 사려 깊은 설명이다. 유가족에게 필요한 ‘알권리’는 죽음에 대한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인정을 포함한다. 이를 위해 너무 늦지 않게 공적인 제도와 절차를 통해 진상조사보고서가 도착해야 한다. 또한 시민의 영역에서 죽음의 사회적 인정을 위한 다양한 기록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공적 ‘우편물들’ 위에서 유가족은 유가족으로서 새로운 삶을 열 수 있다.
아직은 유가족들의 활동이 우리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유가족들이 끈질기게 싸우는 ‘알권리’가 유가족만을 위한 배타적인 권리가 아닌 점은 분명하다. 사회가 재난이나 산재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로 인한 죽음과 희생을 이전과는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끼친 해악 중 하나는 생존 자체가 불안정해지면서 죽음을 삶에서 몰아내는 데 온 사회가 공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살기 위한 정보에 타인의 죽음 따위는 없다. 그런 사회일수록 유가족의 오랜 싸움은 기괴해 보일 것이다. 각자 생존하는 사회에서 죽음을 알기 위한 싸움은 전투적이다. 우리 사회는 그 전투 덕분에 조금 더디게 망가져 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