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영업비밀 ‘블랙리스트’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쿠팡이 지난 7년간 일용직, 계약직으로 일한 노동자들의 재취업 ‘걸러내기’용으로 작성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문건이 공개됐다. 쿠팡은 무려 1만6450명의 명단을 만들어 관리해왔으며, 여기엔 취재 제한을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70여명의 언론사 기자 명단도 포함돼 있다.

쿠팡은 정당한 인사평가 자료라고 주장하지만 퇴직자를 포함해 계약해지돼 더 이상 인사관리가 필요 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인사평가는 들어본 적 없다. 특히 쿠팡은 비공개 자료인 경찰청 출입기자 등의 명단을 어떻게 입수해 블랙리스트에 올렸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그동안 쿠팡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노동자들의 입을 통해 알려져왔다. 때로는 ‘소문’으로, 때로는 관리자의 입을 통해 확인된 사실로 존재했으나 명백한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노동자의 증언과 경험은 ‘허위사실’로 치부됐다. 그러다 2021년 마켓컬리 블랙리스트 사건이 터졌다. 마켓컬리도 블랙리스트 관리를 인정했고, 노동부 역시 마켓컬리를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검찰은 2023년 1월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

1984년 성남의 고려피혁과 인천의 세창물산에 이어 1987년 동일방직 사건 당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명단이 작성돼 무차별 배포된 것이 노조탄압용 ‘블랙리스트 사건’의 시작이었다. 동일방직 노동자 김용자는 ‘똥물투척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블랙’이 되어, 봉제공장 시다, 미싱사, 버스 안내양, 합판공장, 방직공장 등을 전전하며 7차례나 해고됐다. 모두 “불순근로자”로 낙인찍힌 모종의 서류가 당도한 직후였다.

블랙리스트는 노동조합 운동이 불꽃으로 일어나던 지역에는 어김없이 나돌았고,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 초반까지 횡행했다. 당시 블랙리스트 작성에는 경찰과 노동부 관료, 안기부 직원이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이에 비해 오늘날 마켓컬리와 쿠팡의 블랙리스트는 법과 행정적 절차에 따르되, 소극적 규제와 미온적 행정으로 난 틈으로 울려퍼지는 “기업 고유의 권한인 인사평가일 뿐”이라는 기업 측의 당당한 목소리가 뒷받침한다.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피해를 피해가 아닌 것으로, 폭력을 폭력이 아닌 것으로 뒤집는 언론플레이는 오늘날 법과 규범을 ‘과잉규제’로 뒤집는다.

마켓컬리와 쿠팡의 블랙리스트는 오늘날 계약직과 일용직을 극단적으로 활용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고, 나아가 유통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혁신기업의 영업비밀이다. 공격적인 투자와 물류혁신, 자동화와 AI 기술을 앞에 내걸었지만 불안정 노동자들의 불안을 공포로 전환시켜 순응하게 만드는 장치가 블랙리스트다. 블랙리스트 앞에서,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는 자발적인 불안의 향유란 없다. 이러한 향유마저 허용하지 않는 것이 블랙리스트 효과다. 자유롭게 노동하고 맘에 안 들면 목소리 내고 ‘때려치는’ 그런 쿨한 노동은 쿠팡 측의 홍보물에만 있는 것 같다.

1983년 블랙리스트 피해 노동자들은 ‘해고 노동자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해고’라는 이름도 어색해진 시대에 하루살이, 3개월짜리 비정규직 계약해지 노동자들에게 블랙리스트는 생존권의 문제다.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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