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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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11조 2009년부터 4년 동안 방영된 <화이트 채플>이라는 영국 드라마가 있다. 런던의 동네 지명인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드라마의 첫 시즌은 ‘잭 더 리퍼’ 사건의 모방범 이야기로 시작한다. 담당 경찰서의 수사반장 조셉 챈들러와 그의 조언자 에드가 중심인물이다. 에드는 경찰이 아니라 재야의 잭 더 리퍼 사건 마니아로서, 그가 평생 축적한 잭 더 리퍼 사건 관련 세부 지식은 조셉이 범인을 좁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잭 더 리퍼 사건 외에도 다양한 과거 범죄에 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어서, 두 번째 시즌의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이런 유용함을 고려한 조셉은, 세 번째 시즌에서 에드를 정식으로 경찰서의 기록관리원으로 채용하며, 과거의 범죄 기록을 정리하고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마침 이 시즌에서 과거와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 애매한 연쇄 살인 사건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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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없어져야 할 변명 조선시대사 강의에서 해마다 진행하는 토론이 있다. 대선에 빗대어 ‘왕선(王選)’이라 가정하고, 광해군과 인조로 편을 나누어 왕선 토론회를 벌이는 것이다. 각 조별로 자기 왕의 치적을 자랑하고 상대편의 실정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정치·외교, 사회·경제, 후보 검증 등 세 분야로 나누어 토론을 진행한다. 청중석의 학생들을 대상으로는 누구 편을 들 것인지 미리 작성해오게 하기도 하고, 토론 후 생각이 바뀌었는지 등을 묻는 설문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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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저질 선비 1973년, 경상북도 어느 지역의 새마을지도자가 새마을연수원장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자기 지역의 모 지도자가 거짓 실적으로 포상을 받았다고 고발하는 편지였다. 사실관계보다도 나는 그 편지의 한 문장이 흥미로웠다. 원장에게 이 문제를 청와대에 보고해 달라며 “선생님의 애국은 바로 각하에게 직언하는 것이라고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는 신하의 충(忠)을 임금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바른길로 이끄는 간쟁이라고 보던 그 인식의 연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 문득 500여년 전 정창손과 세종의 대화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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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10조 1930년 조선총독부는 ‘조선국세조사보고’라는 통계자료를 낸다. 조선의 형편을 조사한 보고서란 뜻이다. 이는 전국의 문맹률 조사치가 담긴 제대로 된 첫 조사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 시기 문맹률은 얼마나 됐을까?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어든 한글이든 아무것도 읽고 쓸 수 없는 문맹자가 78%(남자 64%, 여자 92%)에 달했다고 한다. 즉 인구의 80%가 문자를 전혀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역별·계층별 편차를 고려하면 더욱 심각해진다. 지주층의 취학률이 70%일 때 자작·소작농의 취학률은 1.5%밖에 안 되던 시대니 시골일수록, 못살수록 문맹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편차를 참작해본다면, 도시의 특정 계층을 제외한 여성의 문맹률은 95% 이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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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똥개천’이 남긴 것 1984년 9월 한밤중, 아버지가 곤히 잠든 나와 형제들을 흔들어 깨웠다. 홍수가 났다며 얼른 옷 입고 대비하라고 하셨다. 며칠 동안 퍼부은 비에 동네 개천이 넘치면서 난리가 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이때 서울에는 298.4㎜의 비가 퍼부었다. 하루 최대 강우량으로는 1904년 기상대 창설 이후 최고 기록이었다. 한강 본류는 물론 지류까지 넘치면서 서울의 피해가 극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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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고려 왕실의 마지막 숨통 1389년 겨울. 이성계, 정몽주 등 아홉 명의 대신이 공양왕을 세우기로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이 좀 미덥진 않아도 크게 거슬리는 짓은 안 할 것이라고. 그는 우유부단하고 재물 불리는 데나 관심이 있다는 것이 중평이라 임금감이 아니라는 반대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래서 더 적임자였을 수도 있다. 왕실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라는 명분에, 이성계의 사돈 집안이라는 숨은 배경까지 더했으니 이 정도면 안심할 만했다. 자신들의 개혁안을 지지해주면 더할 나위 없고, 아니더라도 허수아비 노릇만 해줘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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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정침 이야기 1371년(공민왕 20) 봄, 나주호장 정침은 제주로 향하는 배를 타고 있었다. 호장은 고려시대 지방의 행정을 맡아 보던 향리 중 가장 높은 직급이다. 제주로 가던 그 바닷길, 하필 왜구를 만나고 말았다. 중과부적이라며 다들 항복할 궁리만 하던 때, 정침은 극렬히 저항했다. 마침내 화살이 다 떨어져 버리자, 정침은 관복을 갖춰 입고 정좌했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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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척결의 불가능성 1361년(공민왕 10) 겨울, 홍건적이 쳐들어왔다. 수도 개경까지 함락될 처지가 되자, 공민왕과 관료들은 다급히 피란했다. 임금이 성의 동문을 나설 때, 개경 사람들도 앞다투어 빠져나갔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 챙기지 않았다.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바닥에 엎어지고 자빠지며 깔리고 짓밟혔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가득한 아수라장 속에서 국왕은 물론이고 비빈들까지 말을 타고 허덕대며 소백산맥을 넘어 안동까지 피란했다. 이듬해 정월 수복될 때까지, 개경에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홍건적은 사람을 잡아먹고 임산부의 젖을 잘라 구워 먹었다. 정월의 전투는 또 얼마나 치열했던지. 눈비가 몰아치는 속에 동틀 녘부터 해 질 녘까지 전투를 하고서야 성을 수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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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9조 학부 1학년, 학문의 세계란 것이 새롭고 신기해 보이기만 하던 때, 교수님이 학술대회가 무엇인지, 어떤 분위기인지 설명하면서 재밌는 일화 몇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한번은 어떤 연구자가 이방원 일파에게 정몽주가 맞아 죽은 장소가 개성의 선죽교가 아니라고 했다가 청중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단다. 선죽교에는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뭔가 그 충절을 의심하는 듯이 들린 걸까. 또 어떤 연구자는 유명한 조선시대 학자를 존칭을 붙이지 않은 채 호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다가 청중의 격한 항의를 했다고 한다. 말로만 항의한 것이 아니라 물건을 투척했다는 소문도 있었단다. 모두 그 역사적 인물에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조금의 비판이나 다른 이야기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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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고독(蠱毒)이라는 저주 외롭다는 뜻의 ‘고독’이 아니다. 배 속 벌레 고 자와 독약이라고 할 때의 독 자를 합쳐 ‘고독’이라고 불리는 저주다. 글자 생김으로 뜻을 따져보면 고(蠱) 자는 그릇(皿)에 담긴 벌레를 의미하니, 고독은 이를 이용한 저주를 뜻한다. 저주의 방법은 이러하다. 항아리 안에 여러 종류의 독충이나 파충류를 한데 모아 봉한 다음 그 안에서 서로를 잡아먹게 한다. 다음 해에 개봉을 했을 때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한 마리를 태워 가루로 만든다. 이 가루를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음식이나 술에 넣으면, 그 사람이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혹은 이 항아리에서 혼자 살아남은 생물을 ‘고’라 하는데, 신을 섬기듯이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 음식에 독을 방출한다고도 한다. 고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동물은 매우 다양했다. 뱀을 써서 만들면 사고, 고양이를 쓰면 묘고, 개를 쓰면 견고라고 했다. 중국 고대부터 전해진 이 고독은 조선시대에는 사면령 대상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잔혹한 저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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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길치와 ‘시간치’ 나는 길치다. 하필 길눈 밝은 배우자를 만나는 바람에 사사건건 구박받는다. 하루는 길눈 밝은 배우자에 비해 내게 부족한 능력이 무엇인가 곰곰이 고찰해보았다. 일단 나는 방향감각과 거리감각이 부족하다. 한번은 ‘A건물 앞에 B건물이 있다’고 길을 설명해주었는데, 갔다 온 배우자가 투덜거렸다. 거기는 A건물 앞이 아니라 한 구역 떨어진 곳이고, 그 정도 거리는 ‘앞’이라고 설명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다음으로는 표지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건물이나 도로 같은 지형지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여러 차례 간 곳도 내게는 매번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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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0조 2023년 초, 가족여행으로 일본을 갔다. 코로나19도 웬만큼 지났다 싶어 간만에 마음먹었는데, 이것저것 준비하기도 귀찮고, 돈도 생각해야 해 가장 가까운 동네로 간 것이었다. 늘 그렇듯 일본은 쓴 돈만큼의 서비스와 질을 보장하고, 그럭저럭 익숙하면서도 또 적당히 이국적이라 즐거운 여행지다. 그렇게 3박4일의 일정을 잘 보내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을 때 사건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