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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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정침 이야기 1371년(공민왕 20) 봄, 나주호장 정침은 제주로 향하는 배를 타고 있었다. 호장은 고려시대 지방의 행정을 맡아 보던 향리 중 가장 높은 직급이다. 제주로 가던 그 바닷길, 하필 왜구를 만나고 말았다. 중과부적이라며 다들 항복할 궁리만 하던 때, 정침은 극렬히 저항했다. 마침내 화살이 다 떨어져 버리자, 정침은 관복을 갖춰 입고 정좌했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몇년 후 이곳에 정도전이 유배를 왔다. 우왕을 즉위시킨 권신 이인임이 북원과 외교를 재개하는 것을 반대하다 쫓겨난 길이었다. 공민왕의 시해, 명 사신의 살해 등으로 이어진 껄끄러운 외교 난맥을 이인임은 북원과 통교하는 것으로 돌파하려 했다. 위험천만한 선택이었기에 많은 관료들이 거세게 반대했다. 이들 모두 파직되거나 유배됐으며, 변변찮은 집안 출신인 정도전만 근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떠돌았다. 그것도 30·40대 한창나이에. 이런 연유로 머물게 된 나주에서 정침의 이야기를 들은 정도전은 <정침전>이라는 글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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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척결의 불가능성 1361년(공민왕 10) 겨울, 홍건적이 쳐들어왔다. 수도 개경까지 함락될 처지가 되자, 공민왕과 관료들은 다급히 피란했다. 임금이 성의 동문을 나설 때, 개경 사람들도 앞다투어 빠져나갔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 챙기지 않았다.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바닥에 엎어지고 자빠지며 깔리고 짓밟혔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가득한 아수라장 속에서 국왕은 물론이고 비빈들까지 말을 타고 허덕대며 소백산맥을 넘어 안동까지 피란했다. 이듬해 정월 수복될 때까지, 개경에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홍건적은 사람을 잡아먹고 임산부의 젖을 잘라 구워 먹었다. 정월의 전투는 또 얼마나 치열했던지. 눈비가 몰아치는 속에 동틀 녘부터 해 질 녘까지 전투를 하고서야 성을 수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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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9조 학부 1학년, 학문의 세계란 것이 새롭고 신기해 보이기만 하던 때, 교수님이 학술대회가 무엇인지, 어떤 분위기인지 설명하면서 재밌는 일화 몇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한번은 어떤 연구자가 이방원 일파에게 정몽주가 맞아 죽은 장소가 개성의 선죽교가 아니라고 했다가 청중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단다. 선죽교에는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뭔가 그 충절을 의심하는 듯이 들린 걸까. 또 어떤 연구자는 유명한 조선시대 학자를 존칭을 붙이지 않은 채 호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다가 청중의 격한 항의를 했다고 한다. 말로만 항의한 것이 아니라 물건을 투척했다는 소문도 있었단다. 모두 그 역사적 인물에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조금의 비판이나 다른 이야기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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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고독(蠱毒)이라는 저주 외롭다는 뜻의 ‘고독’이 아니다. 배 속 벌레 고 자와 독약이라고 할 때의 독 자를 합쳐 ‘고독’이라고 불리는 저주다. 글자 생김으로 뜻을 따져보면 고(蠱) 자는 그릇(皿)에 담긴 벌레를 의미하니, 고독은 이를 이용한 저주를 뜻한다. 저주의 방법은 이러하다. 항아리 안에 여러 종류의 독충이나 파충류를 한데 모아 봉한 다음 그 안에서 서로를 잡아먹게 한다. 다음 해에 개봉을 했을 때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한 마리를 태워 가루로 만든다. 이 가루를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음식이나 술에 넣으면, 그 사람이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혹은 이 항아리에서 혼자 살아남은 생물을 ‘고’라 하는데, 신을 섬기듯이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 음식에 독을 방출한다고도 한다. 고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동물은 매우 다양했다. 뱀을 써서 만들면 사고, 고양이를 쓰면 묘고, 개를 쓰면 견고라고 했다. 중국 고대부터 전해진 이 고독은 조선시대에는 사면령 대상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잔혹한 저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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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길치와 ‘시간치’ 나는 길치다. 하필 길눈 밝은 배우자를 만나는 바람에 사사건건 구박받는다. 하루는 길눈 밝은 배우자에 비해 내게 부족한 능력이 무엇인가 곰곰이 고찰해보았다. 일단 나는 방향감각과 거리감각이 부족하다. 한번은 ‘A건물 앞에 B건물이 있다’고 길을 설명해주었는데, 갔다 온 배우자가 투덜거렸다. 거기는 A건물 앞이 아니라 한 구역 떨어진 곳이고, 그 정도 거리는 ‘앞’이라고 설명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다음으로는 표지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건물이나 도로 같은 지형지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여러 차례 간 곳도 내게는 매번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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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0조 2023년 초, 가족여행으로 일본을 갔다. 코로나19도 웬만큼 지났다 싶어 간만에 마음먹었는데, 이것저것 준비하기도 귀찮고, 돈도 생각해야 해 가장 가까운 동네로 간 것이었다. 늘 그렇듯 일본은 쓴 돈만큼의 서비스와 질을 보장하고, 그럭저럭 익숙하면서도 또 적당히 이국적이라 즐거운 여행지다. 그렇게 3박4일의 일정을 잘 보내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을 때 사건이 발생했다. 그전까지 만나본 일본 택시 기사와는 사뭇 다르게, 이 초로의 기사는 영어로 말을 걸고 공항까지 가는 길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여행지에서 현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 사람의 이야기는 곧 이상한 쪽으로 빠졌다. 한국의 정치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더니, 한국에서 일본에 요구하는 과거사 사죄가 너무 과도하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자신은 전쟁 후에야 태어났는데 도대체 자신 같은 세대가 무슨 책임이 있다고 사과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하고 생각을 가다듬는 와중에, 자신은 한국에 가면 맞기라도 할까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얘기까지 했다. 이 얘기에 그전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까지 나서서 온 식구가 동시에 “노~!!”라고 외쳤다. 항상 그렇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본 적 없는 동네에 대해 가장 강한 편견을 지니고 있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이 가본 적도 없는 호남에 대해 가장 센 악평을 늘어놓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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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8조 조선 명종 2년(1547) 경연 자리에서 특진관 최연은 열셋 어린 나이의 임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도참설(예언)은 모두 근거가 없는 말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여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방해가 됩니다. 우리나라도 건국 초기엔 이런 도참설로 노래를 짓기도 했으나 태종께서 ‘어디 이런 요사스러운 도참설을 숭상하겠느냐’며 없애게 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사람들이 송악산 등지에서 무당들을 데리고 제사를 지냈는데, 태종께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 지내는 제사는 신이 흠향하지 않는다며 혁파했습니다. 또 세종께서는 연말에 산천에서 지내는 치성도 혁파했으며, 성종은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재를, 중종은 불교식으로 지내는 기신재를 혁파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 왕조의 가법이며 옛일이니 오늘날 모두 본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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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17년 전 이맘때 얼마 전 경기도 안성의 봉업사지에 갔다. 한데 그날 그곳이 사적으로 지정된다는 뉴스가 나와서, 사적 지정 기념 답사가 됐다고 일행과 키득대며 절터를 둘러보았다. 봉업사지에는 10세기 고려 광종대 만들어진 태조 진전, 즉 태조의 초상화나 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드리던 곳이 있었다. 1362~1363년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까지 피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참배하기도 했다. 그후 언젠가부터 버려져 잊혔으나 우연히 발견된 유적을 계기로 발굴조사가 행해지며 사적으로 지정됐다. 고려 광종 때 건설된 태조 진전이라 하면, 개성의 봉은사가 대표적이다. 태조상이 바로 이곳에 있던 것이다. 조선 건국 후 태조릉인 현릉에 묻혔는데, 1990년대 현릉 정비 과정에서 발견됐다. 태조상과 진전 생각을 하다 보니, 개성 만월대, 즉 고려궁성의 경령전 유적에 생각이 미쳤다. 경령전은 궁성 안에 있던 진전이다. 고려 왕실에서 꾸준히 의례를 행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2007~2018년 남북 공동 발굴조사를 통해 정확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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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프레드릭과 샤미센 프레드릭은 게으른, 아니 게을러 보이는 들쥐다. 다른 들쥐 가족들이 겨울을 대비해서 식량을 모으느라 바쁘게 일할 때 프레드릭은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햇볕을 쬐거나 초록 들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꾸벅꾸벅 졸기나 한다. 왜 일을 하지 않냐는 식구들의 타박에 겨울을 위해서 햇볕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은다고 답하는 프레드릭.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을 텐데 싶다. 그러나 한겨울 동굴에서 갇혀 지내며 저축한 식량을 다 축내고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모두가 지치고 우울해졌을 때, 프레드릭의 진가가 드디어 발휘된다. 프레드릭은 봄에서 가을까지 모은 햇볕을 나눠주고 색깔을 보여주며 이야기와 시를 들려주어 다른 들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밝혀준다. 칼데콧 아너상을 받은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은 바로 시인을 자임하는 이 들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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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7조 인터넷에서 ‘서울 사람이 생각하는 시골’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지도가 있다. 한반도는 절반 남짓 그렸는데, 서울은 빨간색으로 크게 그렸다. 휴전선 이북 조금은 북한이고, 남쪽에서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시골이라고 퉁쳐버리며 모두 파랗게 색칠을 했다. 그래도 제주도는 귤이요,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표시했는데, 이 엉성한 와중에도 독도 옆에는 울릉도도 표현되어 있는, 제 딴에는 섬세한(?) 지도다. 보통 지도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정확성 따위는 무시한 이런 지도도 분석의 가치가 있다. 이런 것을 심상지도(Mental map)라고 하는데, 그린 이의 심상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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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왕건의 유언과 ‘공심’ 태조 왕건은 고려의 다른 국왕과는 위상이 완전히 다르다. 시조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고려 400여년 동안 반신반인 정도로 숭배를 받던 존재라 그렇다. 예를 들어 고려의 양대 축제라는 연등회와 팔관회는 태조 왕건에게 고하는 것으로 의례를 시작한다. 수도인 개경만이 아니라 지방 곳곳에 그 초상을 모신 진전이 있었고, 전쟁이나 지방의 반란 진압 같은 큰일이 있을 때면 이러한 진전에서 일이 잘되기를 기원하곤 했다. 왕건으로 이어지는 왕실 조상의 혈통도 신비화되었다. 건국 설화에는 당대 유행한 온갖 요소를 다 집어넣었다. 그래서 태조의 조상 중에는 산신도 있고, 명궁수도 있으며, 오줌 꿈을 꾼 할머니, 심지어 당나라 황제와 용왕의 딸도 있다. 또 도선만이 아니라 팔원이라는 풍수사까지 그 집과 그 고을의 풍수를 봐주며 왕업의 개창을 예언했다. 궁예처럼 미륵이라고 하지만 않았을 뿐 나머지 유행하던 요소는 다 넣었고, 고려 왕실은 용손을 자처했다. 왕권이 위태로울 때면 이런 혈통적 신비함에 기대는 이들이 더욱 극성했다. ‘태조가 시작했다’든가 ‘태조가 예언했다’는 등의 딱지가 붙은 일들이 늘어나고, 목전의 일들은 회피한 채 신비한 효과를 노리는 일들만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땅의 덕을 보완한다는 궁궐이 늘어나고, 새롭게 연 절, 거창한 행사가 많아졌다. 권력의 꼭대기에서 그런 사업을 좋아하니, 그런 종류를 찾아내서 건의하며 출세하는 사람들도 무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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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6조 대학원 시절에 금석문 강독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고대사 전공은 아니지만 대학원에서는 학부 때와는 달리 무엇을 새로 배우게 될지 궁금했다. 과연 학부 때와는 수준이 달랐다. 판독문을 준비해서 강독하는 것까지는 그렇게 다르진 않았지만, 교수님이 소장하고 계신 탁본을 직접 보면서 재판독을 해보거나 새로운 추정을 해보는 점이 색달랐다. 논란 많던 광개토왕릉비 역시 여러 탁본을 비교하고, 한 소장 기관에 가서 그 거대한 탁본을 펼쳐놓고 문제 구절을 판독해보기도 했다. 탁본 같은 예스러운 자료를 직접 만지고 보면서 공부를 하면, 잊어버린 감각이 자극을 받는다. 역사를 전공하면서는 도리어 무뎌진 소싯적의 호고적 취향과 덕후적 기질 같은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