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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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천전리로 돌아가자 강운구의 ‘암각화 또는 사진’ 전시(한미사진미술관·2024년 3월17일까지)는 석기시대 사람들이 무지몽매하다는 기계시대 인간들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고 있다. 바위그림이 보여주는 인간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칼로 캔버스의 원형인 ‘파티나’(넓고 평평한 검은 바위)에 갈거나 찍어내거나 쪼거나 파내거나 새겨냈다. 각획(刻劃)의 탄생을 넘어 이미 이때 현대미술의 모든 기법이 지구상에서 실행되었다. 한국의 반구대와 천전리를 시작으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와 러시아, 몽골, 중국의 암각화 사이트에 펼쳐져 있는데, 큐비즘이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를 방불케 하는 선사인들의 ‘바위그림 또는 사진’이다. 배가 고프면 창이나 활로 바다와 산에서 고래나 사슴 떼를 사냥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각인(刻印)해냈다. 여기서는 피카소와 달리는 물론 추사까지 다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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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손잡고 더불어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지금 한국사회는 인간과 기계, 동과 서, 남과 북, 진보와 보수는 물론 세대, 남녀, 빈부에다 참과 거짓과 같은 세상 모든 벽들로 막혀 있다. 이런 갈등의 도가니는 광복 후 80여년간 내 편 네 편의 갈라치기와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져 가기만 한다. 정치로는 도저히 풀 수 없음이 자명해졌고, 3만5000달러에 걸맞은 3만5000달러 이타적인 문화 창출만이 답이다. 이런 막다른 골목에서 보수의 린치에다 진보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신영복(1941~2016)의 ‘쇠귀체’는 죽어서 더 큰 울림을 준다. ‘손잡고 더불어’를 보자. 내용과 조형의 일체다. 필획과 글자는 물론 ‘잡’과 ‘불’자는 아예 ‘ㅂ’을 공통분모로 한 글자로 연대해 있다. 더구나 전서 필획으로 한글을 쓰고 있다. 훈민정음의 ‘자방고전(字倣古篆)’ 원리 그대로 더 강한 한글글자꼴을 ‘쇠귀체’로 발명해냈다. 비첩(碑帖)혼융의 추사체와 같은 맥락이다. 미학에 가서는 동시대 궁체의 전형미와 반대의 역동적인 힘이 내장되어 있다.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 사색>에서 “궁체는 글의 내용에 상응하는 변화를 담기에는 훨씬 못 미친다”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쇠귀체에 대해 “어머님의 글씨에서 느껴지는 서민들의 체취와 정서는 궁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미학으로 이해되었다”고 했다. 이처럼 쇠귀체의 조형은 내용이 규정하면서 현대 서를 도약시키고 있다. 여기에다 남천강, 영남루, 영남알프스, 아리랑은 물론 김종직, 사명대사, 김원봉과 같은 밀양 산천의 물성과 인물의 절의(節義)가 다 녹아 있다. ‘처음처럼’ ‘더불어 한길’ ‘더불어 숲’ ‘만남’과 같은 무수한 시서화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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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박서보가 죽었다. 마지막까지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고 했다. ‘그릴 만큼 그렸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림이라는 욕망을 끝까지 드러낸 것이다. 호이징거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유희의 동물이라 했듯이 그림이라는 언어는 식욕, 성욕과 같이 인간의 본능에 해당한다. 그런데 문제는 평소 작가가 자기 그림을 늘 수행으로 일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점에서 서로 상충된다. 이런 관념은 조선시대 도학자들이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시서화를 억제한 데에서도 확인된다. 중세 1000여년간 신(神)의 이름으로 인간의 욕망을 억눌렀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미술은 욕망 해방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구미술과 수행은 아무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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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그림은 알고 있다 나·랏:말쌍미 ‘·中듕國·귁·에달아’는 조선이 중국과 화이부동(和而不同)함을 대놓고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이런 주체적 자각 속에서 세종은 한자의 역리(易理), 상형원리, 자방고전(字倣古篆) 원리로 훈민정음(1443)을 만들었다. 한자 밭에서 한자를 넘어선 한글이 태어난 것이다. 15세기 조선의 그림·글씨·도자·지도·활자 역시 ‘몽유도원도’·안평대군체·분청자기·‘혼일강리역대지도’(1402)·‘초주갑인자’(1434)와 같은 세계유산급 유물에서 보듯 중국과 같고도 다르다. 일본 후쿠오카시립미술관의 ‘방곽희추경산수도(倣郭熙秋景山水圖)’(도판) 전시가 화제다. 조선일보는 지난 9월22일 한국 회화사 전문가들의 발언을 빌려 “몽유도원도(1447)에 필적하는 15세기 조선의 산수화 발견”이라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전기 회화의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그림” “몽유도원도와 전혀 다른 양식의 15세기 조선 산수화가 일본에 있었다니 놀랍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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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예술은 예술로 재자 이중섭(1916~1956)의 국적은 다섯 개다. 나무위키에는 일본제국(1916~1945), 소련(1945~1946), 북조선인민위원회(1946~1948), 북한(1948~1950), 대한민국(1950~1956)으로 명시해놓고 있다. 임군홍(1912~1979)도 마찬가지다. 다만 6·25전쟁 와중에 월남을 하거나 월북을 한 것이 정반대의 행보다. ‘정전 70주년 기념 - 화가 임군홍’ 전시(예화랑, 2023년 7월27일~9월26일)는 거듭 색의 노래다. 둔탁하리만큼 깊고 두꺼운, 그러나 선명한 흑백과 컬러로 인물·산수·꽃을 그려낸다. 식민지와 전쟁의 암흑세계를 응시하면서도 그 이면의 빛을 관조해내고 있다. ‘자화상’이나 중국 한커우에서 그린 ‘상처받은 여인상’ ‘행려’가 어둠 속의 빛이라면 ‘동백꽃’ ‘해바라기’ ‘자금성각루풍경’ ‘석양’ ‘산과 하늘’이나 ‘아내의 초상’ ‘여인좌상’ ‘잠든 아들 모습’ ‘보살상’은 반대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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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마음그림 “내가 난초를 치는 것은 마음을 그리는 데 있지 붓털을 비벼(난초의 외형을 그려)내는 데 있지 않다(余之寫蘭 只寫胸臆 不寫毫抹).” 이것은 표암 강세황(1713~1791)의 <흉억란胸臆蘭>(도판)의 화제다. 하지만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다. 흉억(胸臆)이 표암은 물론 조선 문인예술의 궁극임을 서화일체로 선언한 결정이다. 즉 표암예술의 방점은 사물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데 있지 외물이나 기법과 같은 호말(毫抹)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초는 난초를 넘어 표암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요아힘 베케라르가 1569년에 그린 <4원소:물>(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명화전)에 등장하는 시장의 물고기를 보자. 흉억보다 호말에 방점이 찍힌다. 르네상스를 지나 바로크시대에 그려진 물고기가 너무나 생생하여 지금도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빛을 그려내고 사물을 환원시키면서 서구미술의 흐름을 뒤바꾼 인상파나 큐비즘의 시선도 크게 보면 내면보다 외물로 향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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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쓰기’는 아동학대가 아닌 인간해방 언어는 본능이다. 인간은 몸·말·그림 그리고 글씨와 같은 언어로 감정을 표출한다. 노자가 ‘도를 도라고 하면 항상 있는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항상 있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라고 언어 이전의 세계를 노래했지만 ‘도’도 ‘명’도 언어가 아니면 드러낼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머니이다(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라고 했듯 삼라만상은 언어로 이름하고 써낼 때 비로소 태어난다. 요컨대 언어는 실상을 드러내는 방편이자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그래서 선문(禪門)에서는 ‘문자반야(文字般若)’라고까지 한다. 문자가 없으면 실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이 한 획(劃)을 긋고, 문자를 ‘씀’으로써 실상이라는 존재는 그 모습을 비로소 드러낸다. 문자를 ‘쓰는’ 행위 자체가 인간의 무의식계를 탐사하고 그려내는 거룩한 일인 것이다. 문자경영이 인간경영이고, 문자정책이 복지의 궁극이자 토대가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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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예술관광의 활로 찾기 관광과 예술은 바늘과 실이다. 최근 정부는 수출 부진을 내수 진작으로 타개하고자 국내 관광 활성화 정책을 펴고 있다. 기획재정부에서 600억원의 재정 지원과 함께 6월을 ‘여행 가는 달’로 정해 숙박 쿠폰에다 KTX 할인 등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이것은 단기미봉책인 데다 효과도 별로다. 보도에 따르면 음식·숙박·여행 등 서비스업 생산이나 국내 소비가 오히려 줄었다. 올해 1분기 여행수지는 32억3500만달러 적자로 3년 반 만에 최대치다. 1분기 한국 방문 외국인은 170만명이지만,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500만명에 육박한다. 국내 관광 침체 이유는 말 그대로 ‘볼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해결책은 기존 명승지 관광에다 예술을 곱하는 것밖에 없다. 이제 지방과 중앙 정부의 협력 아래 ‘예술관광’으로 그 체질과 패러다임을 국가가 나서 확 바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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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매화와 무릎 꿇린 히틀러 익명의 조선도공과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만난 적이 없다. 백자와 그의 작품 또한 아무 관계가 없다. 시간적으로 조선과 현대인 데다 공간적으로도 동양과 서양이 너무 멀다. 생각의 뿌리도 다르다. 일원론을 바탕으로 물질보다 관념을 우선한 조선 사람과 그 반대인 이원론적 사고를 하는 현대 서양인이다. 작금 한국사회의 집단적인 심리구조까지 감안하면 두 전시는 한 지붕 두 가족이다. 국립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그렇다. 국립박물관에는 현대가 없고,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역사가 없다. 더구나 진보와 보수, 남과 북, 세대와 젠더, 친일과 항일, 정치와 예술, 서예와 미술, 한글과 한자…. 이 모든 영역이 칸막이 쳐진 갈등의 도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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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광주여, 생명이여 물과 불은 상극이자 상생이다. 며칠 전 강릉의 화마를 잡은 것도, 타들어가는 대지에 새 생의 봄을 일깨운 것도 밤새 내린 비다. 노자는 “천하에 물보다 유약한 것도 없지만, 견고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물을 능히 이기는 것은 없으니, 물이 견강한 것을 쉽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天下莫柔弱於水, 而功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라고 갈파하고 있다. 지금 광주에서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Soft and Weak like Water)’를 주제로 14번째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깜깜한 동굴로 들어가면서 열린다. 곧바로 문명의 시원을 마주하는데, 하늘과 땅을 내왕하는 무수한 밧줄은 세계수이자 생명의 나무로 다가온다. “이는 우리의 영혼과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며, 땅이 우리를 치유하는 힘을 선물로 내어 줬음을 깨닫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암스테르담과 케이프타운에 거점을 두고 문명의 원점을 노래하는 블레베즈웨 시와니가 당사자다. ‘옐라무야 옐라무야…’ ‘귀를 기울이면 우주가 열리는 소리로 가득하고, 붉은옷의 검은’ 여인이 먼 바다를 응시한다. 태초의 생명 기운이 전시장은 물론 광주 땅에 넘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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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35세 청년 예술의전당의 꿈과 현실 한국 예술 역사에서 예술의전당(Seoul Arts Center) 개관은 분수령이 된다. 이유는 예술에서 경영이라는 개념이 전당과 함께 본격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3만5000달러 경제에 걸맞은 문화 선진국의 견인차 역할이 주어져 있다. 전당은 1988년 2월15일 개관했으니 올해로 35세이다. 88올림픽과 때를 같이하지만 전당을 꿈꾸고 설계·건축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5·18민주화운동(1980), 6·29선언(1987)과 같은 정치격변 속에 전당이라는 예술의 신전이 태동했다. 정치만큼이나 예술지형도 요동쳤다. 전당은 1988년 2월15일 1차로 음악당·서예관을 개관하였고, 1990년 2차로 미술관·예술자료관, 1993년 3차로 오페라극장을 열었다. 퐁피두나 링컨센터, 로열오페라하우스와 같은 세계 굴지의 예술센터를 모델로 하였지만 전시와 공연의 양 날개로 난다는 점에서 전당만의 독자성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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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단색화의 진화 단색화는 단색이 아니다. 오히려 복잡계다. 시각과 청각을 자유자재로 내왕함은 물론 이성과 감정부터 무의식세계까지 종횡으로 다 관계한다. 적멸이자 현지우현(玄之又玄)의 세계다. 단색화를 눈이라는 감각세계로만 봐서는 미술전문가들의 말대로 ‘답이 없다’. 학고재갤러리의 ‘의금상경(衣錦尙絅·비단옷 위에 삼베옷을 걸치다)’ 전시에는 기존 단색화의 고정관념을 깨는 작품들이 많다. 김현식의 ‘Beyond’ 시리즈는 노랑(y), 파랑(b), 하양(w), 빨강(r), 검정(b) 오방색을 기조로 가물가물한 심연 모를 색의 깊이를 무한대의 아크릴 ‘기계 필획’의 반복으로 형상화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