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단색화는 단색이 아니다. 오히려 복잡계다. 시각과 청각을 자유자재로 내왕함은 물론 이성과 감정부터 무의식세계까지 종횡으로 다 관계한다. 적멸이자 현지우현(玄之又玄)의 세계다. 단색화를 눈이라는 감각세계로만 봐서는 미술전문가들의 말대로 ‘답이 없다’. 학고재갤러리의 ‘의금상경(衣錦尙絅·비단옷 위에 삼베옷을 걸치다)’ 전시에는 기존 단색화의 고정관념을 깨는 작품들이 많다. 김현식의 ‘Beyond’ 시리즈는 노랑(y), 파랑(b), 하양(w), 빨강(r), 검정(b) 오방색을 기조로 가물가물한 심연 모를 색의 깊이를 무한대의 아크릴 ‘기계 필획’의 반복으로 형상화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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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겹겹이 쌓인 에폭시 레진의 층위를 수직의 무수한 반복 칼질로 그어 내리는 획(劃)과 획 간의 긴장은 억겁의 에너지 원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요컨대 기계시대 플라스틱 사의(寫意) 내지는 여백(餘白)의 맛을 여기서 제대로 본다. 그냥 흰 공백이 아니라 획과 획 사이의 긴장, 즉 음파와 자장과 같은 에너지가 작가와 관객에게 공명된다. 조선시대 도학자들의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나무, 물, 산, 바위 등 천지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이 하나 되는 경지라면, 김현식은 현대인의 삶 속속들이 자연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플라스틱을 가지고 오늘날 인류세(Anthropocene)의 물질과 인간의 하나 됨을 에폭시 레진 ‘너머/Beyond’ 현현시키고 있다. ‘나비가 내가 되고, 내가 나비가 되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허물어진 장자의 ‘물화(物化)’의 기계시대 버전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덜어냄’ ‘비워냄’으로 읽히는 물아일체 방법론이다. 김현식은 플라스틱이 내 몸이 된 물질시대 인간의 희로애락을 무수한 레이저 칼질을 동어반복하면서 덜어내고 있다. 조선 선비들의 주일무적(主一無適)한 정신으로 냉철히 줄 세우고 있다. 여기서 ‘덜어냄’은 또한 인간의 인식 차원의 배움 내지는 분별지의 완전한 지워냄이다. 그래서 김현식의 ‘마음 비움’은 ‘空山無人 水流花開(빈산에 사람 없고, 물 흐르고 꽃이 핀다)’의 허정(虛靜)의 상태로도 독파된다. 여기서 산이 비었다는 것은 산이 된 내 마음이 비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꽃이 핀다는 것은 꽃이 된 나의 생명이 피어난 것이다. 그야말로 무위자연의 도를 행한다는 것은 알량한 앎과 욕망을 뺄셈과 나눗셈으로 날마다 반복 반복하면서 들어내는 수행을 말하는 ‘위도일손(爲道日損)’의 현대적인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단색화가 세계미술에서 한국의 간판 브랜드로 자리 잡은 지도 오래지만 그 뿌리나 지향점에 대한 탐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자성이 비등하다. 이런 맥락에서 학고재의 ‘의금상경’ 전시는 단색화로 단색화를 넘어서고 있다. 단색화 하면 구두선과 같은 맹목적인 수행이나 마음 비움의 구호의 실체를 작가별로 이 잡듯이 밝혀내고 있다. 그래서 전시장에는 모든 빛과 색, 조형은 물론 소리까지 다 녹아나 있다. 이 땅에서 천출로 타고난 전통을 빌려 현대를 열어젖힌 ‘차고개금(借古開今)’의 현장이다. 미니멀리즘이나 모노크롬,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서구미술에서 한국의 단색화가 촉발되었을지라도 결국 작가가 살고 있는 한반도라는 역사 전통과 당대 실존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망국, 전쟁과 분단은 물론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와 기계시대의 부조리를 필획(筆劃)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언어를 가지고 온몸으로 터트려낸 결정체가 단색화다. 무의식계의 역사 흐름을 본능적인 오토마티즘으로 필획하여 시추해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문 사회면과 같이 시대사회를 고발하는 민중미술의 이면으로서 대비적으로 읽힌다. 여기서 춘추전국시대 노자, 장자 같은 철학자와 단색화 작가가 오버랩되는데, 화가는 예술가 이전에 철학자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시인, 서가, 화가는 물론 미술작가 역시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존재의 근원을 시대사회에 따라 의문하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낸 것이 예술이다. 그래서 단색화는 유행의 산물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삶이 시작된 이래 계속되어온 도와 덕의 도약의 결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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