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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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진실이 떨어질 때 까마귀야 날지 말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에 대해 위험성 문제를 지적하자 또다시 ‘음모론’이라는 비판이 등장했다. 정권에 대한 ‘발목잡기’가 아니냐는 비난도 뒤따르고 있다. 진실을 향한 열의와 사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가짜뉴스와 혐오 발언 앞에서 버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 공정한 공론장 위에서 진위를 다툴 때 거짓 선동과 혐오 발언은 쉽게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런데 그 공론장이 스마트폰 안에서 디지털 정보로 대체된 오늘 상황은 많이 바뀐 듯하다. 나는 부모님의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단체 대화방 알림음 소리가 어떤 동영상을 공유한 것인지 이제는 듣지 않고도 알 수 있다. 그 소리가 잦아들면서부터 나 또한 부모님에게 음모론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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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5월, 모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공교롭게도 5월1일 노동절에 건설노조 간부에 대한 영장실질심사가 진행되었다. 자칫 구속이라도 되었다면, ‘불법’ ‘폭력’ 노동조합이라는 기사 제목이 달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현실에선 이것보다 훨씬 더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다. 심사 대상자였던 양모 간부(민주노총 전국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소속)가 심사 직전 분신을 시도하였고, 다음날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유서에는 “자랑스러운” 노조 활동이 업무방해 및 공갈로 폄하되는 등 자존심이 처참히 짓밟힌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난 2월21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 자리에서 건설 노조의 불법행위를 뿌리 뽑겠다며 ‘건폭’이라는 표현(건설 현장 폭력의 줄임말)을 사용했다. 이 표현 하나로 건설노조는 금품요구, 채용강요, 공사방해를 일삼는 폭력단체로 ‘정의’되어 버렸다. 마치 영화 속 용역깡패가 되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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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챗GPT는 필수노동자인가 주변 학자들 사이에 온통 챗GPT 논란뿐이다. 엄혹한 4월의 기억들(제주 4·3, 4·16 세월호 참사, 4·19 혁명)이 묻힐 만큼 인공지능의 상상초월 ‘학습’ 능력을 앞다퉈 ‘학습’하기 바빠 보였다. 물론 학계에 있는 내 주변의 일에 국한된 현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내 청소노동자의 파업이 어떻게 마무리되어가는지보다 중간고사에 챗GPT가 줄 영향에 대한 관심이 더욱 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팬데믹 시기 그들을 필수노동자라 강조했던 정부와 언론의 관심도 어느덧 인공지능이 초래할 미래의 변화에만 쏠려 있다. 그렇지만 매일 쌓여가는 쓰레기는 누가 치울 것인가? 갑자기 질문이 떠올랐다. “챗GPT는 필수노동자인가? 혹은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가?” 분명 옆 동료는 챗GPT에게 직접 물어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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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일할 ‘때’를 정해주는 이중빈곤의 사회 “지금 네가 이러고 있을 때야?”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입니까?” 주제와 상황은 다를지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봄 직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가장 많이 들은 연령대는 아마도 성인이 되기 직전의 청소년과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청년이다. 그들에게 현재는 더 좋은 대학을 준비할 ‘때’, 더 좋은 직장을 준비할 ‘때’, 즉, 불평하지 말고 미래를 위해 인내할 ‘때’이다. 하지만 대학에 가고, 졸업 후 취업한다고 해서 과연 기다리던 ‘때’가 쉽사리 나타나지는 않는다. 경제적 여건과 배경에 따라 ‘때’의 결과는 다르게 실현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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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다음 소희, 마스크 못 벗는 진짜 이유 지난 2월8일 전북 특성화고 여학생의 자살 사건을 다룬 영화 <다음 소희>(정주리 감독)가 개봉해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소희(이시은 역)는 현장실습으로 나간 콜센터에서 5개월간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배두나는 영화 속 경찰로 등장해 소희의 죽음을 파헤치며 어른들이 어떻게 한 학생을 죽음으로 내몰고, 또 외면했는지 보여준다. “내 얼굴 봐서 참아”라는 학교 선생님, “오히려 우리가 피해자”라며 따지는 기업체, “적당히 합시다. 그다음은요?”라며 훈계하는 교육청, “개인의 성격 탓”으로 수사를 종결하려는 경찰. 영화는 제목처럼 주인공 소희가 끝이 아님을, 그 어디엔가 소희의 ‘다음’이 될 누군가에 주목해주길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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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새해가 ‘새’ 해라는 상징의 힘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는 오래된 질문이 있다. 보통 인간은 ‘이성’의 동물로 추앙받아 왔다. 인류학자 로이 라파포트(1926∼1997)는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그 ‘이성’을 해석한다. 인간의 가장 큰 진화적 특징은 언어이며, 그 언어의 핵심은 ‘상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언어의 상징이 지닌 가장 첫 번째 악으로 ‘거짓말’을 꼽았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아니 동물보다 훨씬 뛰어난 차별적 능력이 바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능력이라 본 것이다. 이제 새해가 밝은 지도 열흘이 되었다. 새해 첫날 동해안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기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떻게 어제 뜬 해가 오늘 뜬 해와 다른 ‘새’ 해일 수 있겠는가? 어제까지는 평범해 보이던 자연의 태양이 어떻게 다시 떠오를 때 희망의 기운을 가져다주는 기원의 상징물이 될 수 있을까. 어린아이의 눈에는 온통 거짓말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리고 어른의 눈으로 보아도 어제까지 해결되지 않던 다툼의 현장들이 해가 바뀐다고 없던 것으로 삭제 버튼이 눌러지는 것도 아닐 테다. 어제도 차가웠던 갑의 얼굴도, 그리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의 냉기도 1월1일이 밝았다고 거짓말처럼 바뀔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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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파업에 혐오 덧씌우는 ‘이중 가정’ 1888년 영국 동부의 브라이언트 앤드 메이 성냥공장에 근무하는 여성 및 소녀 노동자 1000여명은 최초의 대규모 여성 노동자 파업을 단행했다. 하루 14시간 이상의 노동과 저임금 및 벌금제도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계기는 성냥제조에 사용된 백린의 치명적 부작용 때문이었다. 백린은 턱이 괴사되는 인중독성 괴사(phossy jaw) 등 인체에 축적되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유해 물질이었다. 최근 개봉된 <에놀라 홈즈2> 영화가 바로 이 파업의 발단이 된 백린의 비밀을 파헤치는 내용이다. 영화에서는 질병에 걸린 여성은 장티푸스에 걸렸다고 비난하며 내쫓았고, 백린의 문제를 제기한 여성노동자는 신변의 위협까지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장의 노동자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일을 중단’하고 거리로 나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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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혐오라는 괴물에 등을 보이지 말자 요즘 기사를 보기 힘들어 아예 눈과 귀를 막는다는 분들이 주변에 많다. 10·29 참사에 관한 기사들마다 감정을 쉽게 주체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나부터도 그러하고 주변의 학생들 또한 다르지 않다. 특히, 참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자들의 발언을 들을 때마다 더욱 심해지는 듯하다.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답답한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기사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게 되는 것 같았다. 물론 정부에 맞서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민추모 촛불 제안’을 기획하는 시민들의 기자회견도 지난주에 있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시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다. 내 질문은 그 슬픔과 충격이 얼마나 진지하게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다. 혹시 혐오가 덧씌워진 대책들 앞에 더 큰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 등을 돌린 채 일상으로 회귀한 사람들이 대다수는 아닐까 우려스럽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덮어둔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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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청소, 시간당 400원짜리 공유재 자본주의의 기원설화는 어떠할까. 영국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은 조금은 거칠게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태생이 ‘식민주의적’이라고 말이다. 가치를 뽑아내고 그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지 않으니 식민주의적인 셈이다. 히켈은 그 대표적 예로 ‘인클로저’를 든다. 농촌 공동체가 공동 관리하며 함께 사용했던 숲, 목초지, 강에 지배층이 울타리를 치고 사유화해버린 사건 말이다. 자본주의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보통 초기 자본 축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것이 인클로저처럼 순수한 저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약탈과도 같은 야만적 축적 행위에 의한 것이라 지적했다. 그와 같은 약탈은 자본 축적 이외에 평민에게 ‘굶주림’을 선사하고, 그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값싼 임금노동의 굴레에 빠져들게 만든다. 더 나아가 히켈은 자본가가 남성에게는 값싼 노동력을 약탈한 반면, 여성에게는 무임금으로 재생산 노동력(소위, 가사 및 돌봄노동)을 빼앗았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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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지불되지 않은 동료애 택배 물량이 폭증하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유독 눈길이 가는 책이 있었다. 갓 출간된 <마지막 일터, 쿠팡을 해지합니다>(민중의소리)라는 제목의 책이다. 책은 2020년 10월12일 새벽 6시 자택 욕실에서 안타깝게 사망한 장덕준씨의 어머니 이야기로 시작된다. 27세의 건강한 남성이 쿠팡 칠곡물류센터에서 1년반을 근무한 끝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무리한 근육 사용으로 횡문근융해증까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지난해 2월9일 근로복지공단은 장덕준씨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에 의한 사망으로 판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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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오늘은 바쁘니 내일 죽으렴 이번 여름은 휴가철이 무색하게 폭우가 수없이 많은 이들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 피해현장의 생생한 모습들이 제보영상을 통해 확인될 때마다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런데 영상 속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폭우를 뚫고 출퇴근을 감행해야만 하는 직장인들이었다. 헤엄치듯 출근을 감행하는 직장인의 모습 속에서 과연 한국인에게 성실한 직장인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저들을 비와 땀에 젖게 만들며 직장으로 이끄는 그 보이지 않는 끈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노동과 건강 문제를 연구하다보면 가장 큰 의문은 과로죽음의 현실이다. 즉, 과로사와 과로자살 말이다. 과로사(過勞死)의 영어 번역어가 일본어 발음 그대로인 Karoshi를 사용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1973년 오일쇼크 이후 구조조정 등이 이루어지며 중년남성의 심장마비, 뇌졸중, 자살 등에 의한 죽음이 이어지기 시작하면서 과로사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의 현재는 어떨까. 최근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 동안 국내 과로사 사망자가 2503명으로 보고됐다(용혜인 기본소득당 국회의원). 1년에 500명씩인 셈이다. 이마저도 산재보험에 가입되지 못한 1인 자영업자, 택배기사 등은 빠져 있는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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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코로나 시대? 코호트 시대! 인류는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2년 반 동안 ‘공통의’ 경험을 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는 절대 ‘공통’의 경험이 될 수 없어 보인다. 최근 발간된 책 <가장 외로운 선택>(김현수·이현정 외, 북하우스)은 2020년 상반기에 발생한 20대 한국 여성의 ‘외로운 선택’-자살-의 결과를 보여준다. 당시 20대 여성 중 자살 시도자는 3005명, 자살사망자는 296명으로 전년 대비 각각 32.1%, 43% 증가했다. 필자들은 팬데믹 자체가 주요한 촉발요인임이 분명하지만, 2011년부터 전체 인구의 자살률이 점차 감소하는 상황에서 지난 10년 동안 가장 낮게 유지되던 20~24세 청년 여성의 자살률이 2017년 이후 급격히 증가한 사실에 주목한다. 실제로 1997년생 청년 여성은 1951년생(부모 세대)이 청년일 때보다 자살사망률이 7배나 높았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똑같은 ‘코로나’ 시대를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코호트’(cohort) 속에서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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