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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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정치적 비겁함, 그 병리적 현상 2024년 12월3일 친위쿠데타 이후 내란은 아직 진행 중이다. 내란죄를 저질렀다고 질타받는 이들은 오히려 남을 향해 ‘내란을 선동’한다고 공개적으로 대응한다. 가해자가 갑작스레 피해자인 양 목소리를 높인다. 떠오르는 단어는 비겁함뿐이다. 비겁함은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병적인 현상이며 우리 사회의 공적 시스템을 좀먹는 만성적 질환이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재생산되며 마치 사회적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정치인, 행정가들이 보여주는 비겁함은 단순한 나약함이나 도덕적 결핍이 아니라 일종의 병적인 상태이다. 이러한 비겁함이 도를 넘어선 현상을 마주할 때 시민들은 극심한 도덕적 충격과 좌절을 경험하며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감내해야 할 고통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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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그의 상식이 모두의 상식일 수 없다 2025년 1월30일, 워싱턴 인근 공항에서 아메리칸항공 여객기와 미 육군 헬리콥터가 충돌해 67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이 충격적인 사고 소식이 전해지기 무섭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두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들었다. 그는 사고 직후 열린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이전 바이든 정부에서 시행한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이 항공 안전을 저해했다고 비판했다. 다양성을 우선시해 부적격한 인력이 채용되었을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자 곧장 정확한 사고 원인 조사도 끝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발언한 근거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의 답변은 “Because I have common sense(나는 상식을 지녔기 때문이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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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거센 불길 속 지향해야 할 수평선 새해, 어떤 불길이 진짜이고, 어떤 불길이 가상인지 혼란스럽다. 1월6일부터 새빨간 불길로 뒤덮인 캘리포니아의 처참한 모습은 마치 한편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닌지 의심마저 들게 만든다. 한편에선, 트럼프 당선인의 2번째 취임식을 앞두고 성대한 불꽃놀이 행사가 그의 버지니아주 골프클럽에서 진행됐다. 하늘을 수놓은 불꽃들을 바라보는 트럼프 부부의 모습은 4년 전인 2021년 1월7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을 난입하며 폭력시위를 자행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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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추위 속 반짝이는 웃음의 정치 기발한 문구의 깃발들, 다채로운 응원봉들, 그리고 흥겨운 노래들. 지난 12월3일 계엄령 선포 이전까지 전혀 상상치 못한 조합들이었다. 12월14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을 때 이 유쾌·통쾌·발랄한 조합은 최고조에 달했고, 축제의 파도는 여의도를 넘어 전국을 휩쓸었다. 나아가 12월21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들이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과 밤샘 대치를 할 때 생기발랄한 연대의 불빛들이 함께할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강아지발냄새연구회’ ‘전국 집에누워있기 연합’ ‘전국고양이노동조합’ ‘전국 뒤로 미루기 연합’ ‘전국 얼죽아 연합’ 등 탄핵과는 전혀 상관없을 법한 이 문구들이 여의도 광장에서 펄럭일 때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것은 끔찍한 계엄령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은 시민들의 통쾌한 풍자였다. 또한 이것은 단순히 언어유희를 넘어, 약자의 언어를 넘어, 소위 ‘웃음의 정치’(Gelopolitics)라 할 수 있다. 그 유쾌한 풍자의 어우러짐 속에 새로운 세상을 위한 열망이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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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한국 의료는 민주주의의 열망이었다 벌써 잊었는가. 한국의 의료는 민주주의의 열망이었다. 지금 당연한 듯 누리는 전국민의료보험은 오랜 기간 시민들이 싸워서 얻어낸 역사적 산물이다. 사회보험 방식의 의료보험은 1977년에 500인 이상 사업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최초로 시행되었다. 이후 1979년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으로, 1988년 군지역의 농어민으로, 이어서 1989년에 전국민의료보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이것은 수백개로 나누어진 의료보험 ‘조합’ 간의 경쟁을 토대로 했었다. 있는 사람끼리 더 많이 누리고, 없는 사람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후 민주화의 열망과 함께 수많은 진보적 시민, 노동단체, 전문가, 정치가들이 싸운 결과 2000년에 드디어 연대를 근거로 한 ‘통합’ 방식으로 온전한 전환을 맞이했다. 이 모든 것은 1997년 외환위기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흐름 및 사회보장제도의 후퇴 속에서 일궈낸 값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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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너무 정치적인 건강, 대통령발 트라우마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11월5일로 다가왔다. 남의 나라 대통령이 누가 된들 무슨 상관이랴 하겠지만 도널드 트럼프(45대 대통령)가 재선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정치학자가 아닌 의사·인류학자 입장에선 제일 먼저 시민의 건강이 우려된다. 건강은 지극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의료 및 사회복지제도의 변화에 의한 영향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며칠 전 국제학술대회에서 정신질환을 연구하는 미국 인류학자를 만났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됐을 때 학생들이 받을 정신적 트라우마를 대비하기 위한 학교 차원의 대책 회의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미국인이 2021년 1월 이후 잊고 있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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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돌봄이 절실한 지금, 달라붙는 감정들 연이은 폭염에 온열질환으로 인한 안타까운 사망 소식이 끊이질 않는다. 수일 전 경기 부천의 한 아파트에선 폭염주의보에 에어컨 없이 지내던 91세 남성이 42도까지 체온이 오른 채 사망에 이르렀다. 병원에선 열사병과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했다. 그의 죽음에는 세 가지 요인(폭염, 코로나19, 고령)이 중첩되어 있었다. 모두 다 사회가 돌봐야 할 커다란 주제들이며, 단 하나의 요인으로도 치명적이다. 혹시 고령이었기 때문에 폭염도, 코로나19 감염도 피할 수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위기가 시작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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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의료, 의로움의 충돌과 덫의 현장 2024년 2월6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방안을 발표했다. 이후 약 5개월이 지나고 보건복지부는 7월18일에 전공의 7648명(전체 1만3531명 중 56.5%)이 최종 사직처리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두 번의 발표 사이에 시민들이 목격한 것은 서로 다른 얼굴의 의로움의 충돌이었다. 정부 관계자의 단호한 목소리, 대한의사협회의 비장한 목소리, 의대교수의 절규하는 목소리, 전공의의 힘겨운 목소리 등 내용은 달랐지만 모두 의로운 일이라는 확신이 내비쳐졌다. 물론, 시민들이 그 나름의 절실함을 의로움의 충분조건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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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잔인한 밥값, 따뜻한 밥 한 그릇 사고가 반복되면 그건 사고가 아닌 사건이다. 사고는 언제든 발생할 수도 있지만, 항상 같은 얼굴은 아니다. 만일 같은 얼굴의 사고가 반복된다면, 그건 시스템이 망가진 결과이며, 누군가에게 그 죄를 물어야 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2024년 6월24일 경기 화성시 리튬 배터리 제조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는 사고가 아닌 사건이다. 그 사건으로 23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다. 사망자는 중국동포 17명, 라오스인 1명, 한국인 5명이었다. 또 이주노동자가 피해의 중심에 있었고, 사망자 중 20명은 사내 하청노동자였다고 한다. 가장 위험한 현장에 또 하청업체 소속 이주노동자의 죽음이 반복되었다. 제대로 된 안전교육 및 대책이 마련되어 ‘있었더라면’이라는 해묵은 가정도 위선처럼 들린다. 모두가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저 그 익명의 대상이 누가 될지 모를 뿐 반드시 산업재해 사망자의 수치는 어김없이 채워질 운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제 더 이상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한국이 왜 3D가 아닌 4D(Death가 추가)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지 설명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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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대립의 시대, 새로운 은유가 필요하다 은유란 인류의 역사에서 생존의 필살기다.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와 언어철학자인 마크 존슨은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인간의 사고 과정이 은유적 개념들로 가득 차 있음을 일찍이 강조했다. 레이코프는 미국의 전쟁서사에 “은유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라는 섬뜩한 현실을 폭로한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은 약자를 구원하는 영웅으로, 이슬람 국가는 악마화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역사와 정치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도 은유적 표현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시간은 금이고, 타고난 부는 금수저로, 반대는 흙수저로, 모든 입시와 취업은 소위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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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영국 총리님, 얼마나 아파야 쉴 수 있죠 얼마나 아프면 일을 하지 않고 유급휴가, 병가를 받을 수 있을까. 모든 직장인들의 고민일 게다. 관련해서 지난 4월19일 영국 총리 리시 수낵은 ‘시크 노트 컬처’(sick note culture)를 문제시하며 개혁을 선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여기서 시크 노트란 의사가 발행하는 일종의 병가진단서를 의미한다. 수낵 총리는 영국에서 ‘일상적인 어려움과 걱정거리’가 지나치게 의료화되고 있고, 병가진단서가 일반의사에 의해 남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정신적 질환으로 보기 어려운 평범한 증상을 지나치게 질병으로 인정해줘서 기업의 생산성이 저하되고, 정부의 보건의료 지출이 증가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 대안으로 시크 노트를 일반의사가 아닌 보다 제한된 특수한 전문가에 의해 발급될 수 있도록 개혁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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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진실의 ‘약’을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가 먹는 약의 효과에 있어 ‘진실’은 무엇일까. 흔히 약물이 가지고 있는 화학적 성분이 몸 안에서 어떤 반응을 유발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진실의 영역일 것이다. 하지만 인류학의 영역에서 바라본 약의 ‘총 효과’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영국의 의료인류학자 세실 헬만은 약이 약물 자체의 효과를 포함한 미시적 차원을 넘어 그 약물에 대한 도덕적, 문화적 가치들과 사회경제적 분위기, 그리고 그 약을 사용하는 사회집단과 생산 및 판매하는 경제주체들까지 포함한 거시적 차원까지 포함해 그 효능이 발휘된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