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탈시설장애인당 공동대변인·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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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함석헌이 겪은 3·1운동 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이다. 솔직히 내가 3·1운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국사책과 참고서에서 보았던 정보 이상은 아니어서 아무리 늘려 잡아도 몇 쪽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시험대비용 연표 속에 넣어 외운 것들이라 납골당 유골처럼 가지런히 죽어 있다. 내게는 1894년의 청일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경술국치 하는 식으로 1919년의 3·1운동인 것이다. 인물들도 그렇다. 아이들이 단어장처럼 외워 부르는 ‘역사는 흐른다’의 노랫말처럼 “삼십삼인 손병희, 만세만세 류관순”일 뿐이다. 이런 내게 3·1운동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인상을 심어준 글이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읽은 함석헌의 글 ‘고난의 의미’다. 글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교회에서 행한 강연을 녹취해 정리한 것이다. “제가 지내봤던 삼일절 얘기나 조금 하겠습니다.” 글머리에서 깜짝 놀랐다. ‘제가 지내봤던’이라는 말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내가 겪은 3·1운동’을 들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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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이 말은 정확히 십년 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참혹한 사건의 이름표다. 용산참사. 이 네 글자를 보거나 들으면 내게는 자동으로 한 남자가 떠오른다. 그는 불타는 망루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펄쩍펄쩍 뛰었고 다시 난간을 손바닥으로 치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주저앉았다. 이제껏 나는 그렇게 슬픈 몸짓을 본 적이 없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을 본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시민도 아니고, 식당 주인도 아니고, 철거민도 아니고, 시위대도 아닌, 맨손, 맨얼굴 같은 ‘맨사람’ 말이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사람에게는 ‘사람’이라는 원초적 사실 하나만 남는다. 아무런 울타리나 보호막이 없을 때, 소위 인권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은 맨사람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망루에서 타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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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보이지 않게 일하다 사라져버린 사람 “시골 저택에 사는 부인에게 ‘함께 사는 분이 없어요?’라고 물어본다고 가정하세. 질문을 받은 부인은 ‘하인 한 명, 마부 세 명, 하녀 한 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지 않을 걸세. 비록 하녀가 방 안에 있고 하인이 바로 뒤에 있다 해도 말이야. 그 부인은 아마 이렇게 답하겠지. ‘네, 함께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도 없다’가 이 사건에서의 ‘아무도 없다’일세. 하지만 어떤 의사가 전염병을 조사하면서 ‘함께 지내는 분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 부인은 하녀와 하인,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을 기억해낼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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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열두 친구 이야기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공부하는 내게는 열두 친구가 있다. 1월의 명학은 며칠 전 노들에서 환갑잔치를 열었다. 학교에는 가 본 적 없지만 올해로 25년이 된 노들을 25년간 다녔다. 노들과 연을 맺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챙겨간 것은 한 조각의 시간이지만 그에게는 온전한 시간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노들의 깃발도 언제나 그의 품으로만 파고든다. 지금도 사람들은 거리에서 노들을 찾을 때마다 깃발의 둥지인 그를 찾는다. 노들에서 공부해서 좋고, 밥 먹어서 좋고, 투쟁해서 좋다는 이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김명학, 노들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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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미누, 부디 안녕히 “왜 아프고 그래요. 빨리 나으세요.” 통증과 피로를 느끼며 벽에 기대 쉬던 나를 일으켜 세운 목소리. 2009년에 헤어진 친구 미누였다. 20년 만에 병원 신세를 지고 있던 날이 하필이면 10년 만에 친구가 찾아온 날이라니. 반가움에 말들이 순서를 무시하고 튀어나갔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이젠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거예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그는 조금 들뜬 소리로 답해주었다. DMZ 영화제에 초대받아 짧게 들어왔다고. 이번에 들어왔으니 또 올 수 있을 거라고. 잘 지내고 있다고. 어서 빨리 나으라고. 곧 보자고. 그러고는 수화기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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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불법 체류자가 남긴 장기 이것은 어떤 불가능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그러나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원통하고 미안하고 서글픈 이야기. 주인공은 미얀마에서 온 청년 싼 소티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가족을 부양해왔고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을 앞둔 듬직한 청년이었다. 며칠 전 그가 죽었다. 그를 살해한 사람은 없었다. 병사나 자살도 아니었고, 우연한 사고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음에 어떤 미스터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현장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고 그 순간을 비디오로 찍은 사람도 있었다. 사실의 차원에서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명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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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24시간 활동지원, 늦출 여유 없다 8월이 끝나간다. 용광로 같은 낮과 한증막 같은 밤이 교차하던 날들이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온열질환자가 4000명이 넘었고 사망자도 48명에 이르렀으니 가히 재난이었다. 그런데 이 4000명과 48명 사이, 그 생사의 문턱에 우리 야학의 학생 한 분이 누워있었다. 최중증 뇌병변 장애인 김선심씨. 서울의 대낮 온도가 40도를 육박하던 날, 그녀는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으로 발견됐다. 아침에 그녀를 발견한 활동지원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야학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눈이 뒤집혀 있었다고. 체온이 39도였는데, 의사가 이대로 두면 죽는다고 했다고. 열사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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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생각 많은 둘째 언니’의 일깨움 내 안에 10년째 답변을 기다리는 물음이 있다. 울산의 한 고등학생이 던진 것인데 그 학생의 떨리는 음색까지 그대로 마음에 남아있다. 2008년 겨울밤이었다. 강연주제는 ‘현장과 인문학’이었고 청중은 대부분 교사들이었다. 그날 원고의 제목은 ‘앎은 삶을 구원하는가’였다. 당시 교도소에서의 인문학 강연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던 글이다. 강연장에는 선생님과 함께 온 학생들이 몇몇 있었는데 내게 질문을 던진 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때 나는 인문학과 가난한 사람들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실제로 인문학 공부의 현장에서 나는 여러 긍정적인 신호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나만이 아니었다. 울산 강연 전날 서울에서 현장인문학 워크숍이 열렸는데 흡사 인문학의 효험에 대한 간증대회 같았다. 워크숍에 참여한 여러 활동가들의 입에서 빵보다 장미, 돈보다 인문학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울산 강연에서도 나는 전도사처럼 현장인문학의 가능성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런데 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마저 마무리되던 시간에 한 학생이 머뭇머뭇하더니 손을 들었다. 말을 얼른 꺼내지는 못했다. 입에 고인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자 그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감정을 겨우 가라앉힌 후 그가 내게 물었다. “오빠가 지적장애인이에요. 선생님, 오빠에게도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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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그들을 포기하는 건 우리를 포기하는 것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핍박받는 이방인을 돕는 걸 자랑스러워했던 아테네인들도 오이디푸스가 변방의 마을 콜로노스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당장 이 나라를 떠나시오. 그대가 우리 도시에 큰 짐을 지우기 전에 말이오.” 오이디푸스에 대한 끔찍한 소문을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테네인들은 재앙에 대해 오이디푸스한테 직접 들은 후에는 그를 받아들였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에 다가가기를 주저하면서도 그를 보호할 용기를 낸 지도자 테세우스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자신 또한 한때 ‘이방인’이었으며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한낱 ‘인간’이라고 했다. 이방인을 환대한 주인은 어제 이방인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이며, 내일 다시 이방인일 수 있음을 인식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가 개인사처럼 고백한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중요한 통찰이다. 모든 주인은 한때 손님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정적으로 이방인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방인을 배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일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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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돈 되는 일자리와 의미있는 일자리 한국사회에서 요즘처럼 일자리를 갈구한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진실, 즉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의 생존이 노동력의 판매에 달려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4차 산업혁명’이 구원자가 될 것 같지도 않다. 인공지능은 천재 바둑기사의 재능조차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았던가. 집에서 보면 참으로 신기한데 직장에서 보면 너무나 두렵다. 어떻든 지금은 모두가 일자리를 외치는 중이다. ‘일중독’이라는 말조차 사치로 들릴 정도로 일자리가 절박하다. 정부와 산업은행은 파산에 직면했던 한국지엠에 8000억원을 투입하면서 이를 ‘남는 장사’라고 했다. 수익을 올려서가 아니라 일자리를 지켰다는 뜻에서다. 이제는 기업가가 ‘파산’이라는 말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협상의 무기로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업이 일자리를 보장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기업을 보장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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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카를 마르크스, 그 사상의 거처 카를 마르크스. 그가 세상에 온 지 200년이 되었다. 한 사상가가 세상에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이 오는 것이고, 그 눈으로 본 세상에 대한 부끄러움과 다짐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사상은 사상가와 더불어 오지만 사상가와 더불어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사상가는 한 인간과 더불어 태어나지만 그의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 눈이 있고, 부끄러움이 있고, 다짐이 있는 한에서 말이다. 그처럼 많은 적과 동지를 가진 사상가가 또 있을까.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이 땅에서도 그랬다. 지금은 납골당 같은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고 이따금씩 교양인을 위한 추천 도서로 얼굴을 내밀지만, 얼마 전까지 그의 책은 집에 모셔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될 수 있었다. 그를 읽는다는 게 지성과 열의만이 아니라 용기를 필요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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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어느 탈시설 장애인의 ‘해방의 경제학’ “바구니에/ 야채를 넣고/ 과일을 넣고/ 이만원/ 계산대에 가보니/ 오만원/ 과일 빼고/ 야채 빼고/ 참치는 놔두고/ 밥은 먹어야지/ 참치 고추장 참기름은/ 떨어지면 안 돼.” 민들레 장애인야학의 신경수씨가 쓴 시 ‘꼭 사야 할 것’이다. 그는 세 살 때 파출소에 맡겨진 뒤 서른이 다 돼서야 탈시설 자립생활을 시작한 중증장애인이다. 출간 예정인 탈시설 장애인들의 인터뷰집에서 그의 인터뷰와 시 몇 편을 읽었는데, 방금 인용한 시도 여기서 본 것이다.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그의 경제학이다. 계획된 예산을 넘자 그는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을 하나씩 빼놓는다. 그런데 과일과 야채를 빼내면서도 끝까지 사수하는 재료가 참치와 고추장, 참기름이다. 그는 밥에 참치, 고추장,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했다. 장애인 수급비가 소득의 전부인 그로서는 지출계획을 신중히 짜야 한다. 특히 식자재는 지출항목 중 비중이 큰 것이어서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런데 식자재 구입과 관련해서 그는 영양학보다는 존재론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식자재 구매가 내 영양상태보다는 존재 확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참치 고추장 비빔밥은 그가 찾아낸 ‘나의 음식’이다. 물론 수십년을 보낸 수용시설에도 ‘음식’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음식’이었지 ‘나의 음식’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