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탈시설장애인당 공동대변인·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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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죄 없는 시민은 죄가 없는가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50일 넘게 장애인들의 출근길 시위가 있었다. 휠체어 장애인들 여럿이 승강장 한 곳에서 줄지어 타기를 반복했다. 이로 인해 지하철의 운행이 역마다 몇 분씩, 전체로는 몇십 분씩 늦어졌다.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서도 언급되었지만 SNS상에서는 시위 시작 때부터 난리가 났고 장애인 단체에는 항의와 협박 전화가 빗발쳤다. 사정은 이렇다. 지난 1월 국회에서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버스를 대차하거나 폐차할 때 저상버스 도입을 의무화하고 국가가 운영비를 지원할 수 있게 했다. 2001년 ‘버스를 타자’며 장애인들이 뛰쳐나온 지 21년 만에 통과된 법이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은 그렇게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문구와 실행 사이에 그놈의 문턱이 또 있었던 것이다. “지원할 수 있다”는 규정은 “지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규정임을 기획재정부가 일깨워주었다. 예산을 아끼려는 마음이 차별에 대한 무지와 결합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기본권에 대한 심각한 박탈인 이동권 문제를 예산에 여유가 있을 때 제공하는 서비스 같은 걸로 생각한 것이다. 지난 50일의 출근길 시위는 21년을 이어온 이동권 투쟁이 무력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투쟁은 50일의 투쟁이 아니라, ‘21년 하고도 50일’이 된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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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화성의 관타나모 영화 <모리타니안>의 마지막 장면. “오, 나의 변호사님들!” 모하메두는 낸시와 테리를 크게 껴안는다. 그는 2001년 ‘9·11 테러’ 용의자로 체포되어 이듬해 관타나모에 수감된 이후 줄곧 거기 있었다. 한 차례의 재판도 없었다. 수년 동안의 고문만이 있었을 뿐이다.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그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마침내 2010년 석방 판결을 받았다. 모하메두가 얼마나 기뻤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들뜬 의뢰인과 달리 변호사들의 표정은 어둡다. 낸시가 이야기를 꺼냈다. “정부의 항소에 대응해야 해요.” “뭘 항소한다는 거죠? 우리가 이겼잖아요.” “그들은 법정에서 문제를 질질 끌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모하메두는 낸시의 말을 끊고 묻는다. “잠깐만요, 이게 얼마나 걸리죠?” 테리가 답한다. “확실하지 않아요.” 모하메두는 무너져내린다. “도대체 얼마나 더 있어야 집에 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도 몰라요. 하지만 얼마가 걸리든 우리는 여기 있을 겁니다.” 영화는 모든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놓고 이렇게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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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우리는 미쳤다” 미친 사람. 돌이켜 보면 나는 그를 자주 만났다. 가까운 친척도 있었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도 있었고, 우러러보던 선배도 있었고, 내 수업을 듣던 학생도 있었다. 그는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믿을 사람이 당신밖에 없다며 제발 도와달라고 했다. 의사와 가족들이 서로 짜고 자신을 병원에 집어넣으려 한다고. 또 다른 그는 길거리에 서서 국가기관이 자신을 감시한다며 모순과 비약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외치고 있었다. 미친 사람. 그런데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친척이 도움을 청했을 때는, 말은 듣지 않고 좋은 의사를 구해준다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발병한 동료가 복도를 뛰어다녔을 때는 빨리 119를 부르라며 소리쳤다. 거리에서 모든 국가기관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소리치던 선배를 보고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군 채 지나쳤다. 내 수업을 듣던 학생에게는 제발 그만 말하라며 손을 잡고 주저앉혔다. 나는 그가 말하기 전에도, 말하는 동안에도, 말한 후에도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에 있었지만 보지 않았고 수화기를 댔지만 듣지 않았고, 손을 잡았지만 주저앉혔다. 무슨 위험이라도 닥친 듯 도망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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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죽은 사람의 죽지 않은 말 말한 사람이 떠난 세상에 남아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드는 저 말의 정체는 무엇인가. 새로 나온 책들을 일별하다가 어느 책의 표지에 박힌 말을 보고는 아는 사람을 확인하듯 눈이 커졌다. “나의 주위에 계신은 동료 여러분에게 부탁이 있읍니다. 네 이루어지지 안는 것들을 꼭 이어주십시요. 나의 시신은 화장해서 두망강에 뿌려주세요. 준호야 사랑한다. 꼭 너하고 사려고 해는데, 준호야 준호야 네가 보고 싶군나.” 익숙한 글씨, 맞춤법을 어긴 채 포복하듯 비뚤배뚤 나아가는 글자들. 어떻게 당신을 몰라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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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고문의 이면 지난 9월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폭로가 있었다. 그로부터 40여일이 지난 오늘까지 고문피해자는 고문장소에 갇혀 있다. 얼마 전 법무부는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화성외국인보호소 보호외국인 가혹행위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 “인권침해행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새우꺾기’라고 하는 보호방식도, 박스테이프나 케이블타이 등의 보호장비 사용도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보호외국인에 대한 보호의 남용이 있었음을 공식 확인한 것이다. 발표문의 표현들이 이상한 것은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쓴 탓이다. 외국인 강제구금시설에서 고문이 자행되었다고 해야 하는데 외국인보호소에서 보호외국인에 대한 보호의 남용이 있었다고 말하는 식이다. 새우꺾기에 동원된 엄연한 고문도구들에 대해 보호장비 운운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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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고문의 추억 그의 몸은 뒤로 꺾여 있었다. 수갑을 채운 손목을 등으로 돌려 발목과 함께 묶었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공포 영화에서나 볼 법한 기이한 장구가 뒤집어씌워져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몸을 꼼지락거리거나 흔들의자처럼 몇 차례 흔들어보는 것뿐이었다. 어떤 날은 20분이었지만 어떤 날은 세 시간이었고 어떤 날은 네 시간을 넘기기도 했다. 시설물이라고는 변기 하나가 고작인 독방에서 한 인간이 그렇게 고문을 당했다. 올해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사진과 짧은 영상을 보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혀서가 아니라 애초에 이런 걸 정당화할 수 있는 말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고문을 정당화한답시고 관리자들이 내놓은 말들은 고문만큼이나 끔찍했다. 이들에 따르면 이것은 고문이 아니라 보호였다. 이곳은 외국인보호소이고, 그는 보호외국인이며, 머리에 뒤집어씌운 것은 보호장구이고, 그에게 특별한 보호조치가 취해진 것은 난동을 부리며 자해행동을 했기 때문이란다. 말하자면 폭력으로부터, 무엇보다 스스로를 해치는 폭력으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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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탈시설지원법을 제정하라 이것은 연쇄살인 사건이다. 매년 동일 수법으로 지역을 넘나들며 사람들을 죽이는데도 범인이 잡히지 않고 있다. 이번 피해자는 50대 여성 A씨. 범행은 서울의 한 대학교 주차장. 피살 현장에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딸이 있었다. 범인은 딸을 노렸는데 어머니가 딸을 혼자서 지켜내려다 결국 희생당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발달장애인 자녀를 곁에 두고 자살한 어머니의 이야기다. 발달장애인 자녀를 두었다는 말만으로도 어머니의 신변 비관, 우울증, 심지어는 자살조차 납득이 된다. 그래서 이 사회에 화가 나고 또 절망한다. 무슨 대역죄라도 진 건가. 딸을 혼자 돌본 저 어머니도 어느 순간 선택지를 받았을 것이다. 혼자 죽거나 함께 죽거나 시설에 보내거나. 즉 생명을 끊거나 관계를 끊어야 한다. 그러나 관계를 끊는 것도 생명의 길은 아니다. 숨만 쉬는 것이지 죽어가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돌봄을 포기한 부모들은 뿌리가 썩은 식물처럼 화창한 날에도 시들어가고,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은 웃음 터지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동물원의 동물처럼 눈빛이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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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자 이 지면에 칼럼을 게재한 지 꼭 4년이 되었다. 2017년 1월, 대통령 탄핵으로 주말마다 수백만의 인파가 광화문에 집결하던 때였다. 다른 때였으면 원고 청탁을 거절했을 것이다. 때에 맞게, 좋은 글을, 규칙적으로 쓴다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날 청탁을 수락했던 것은 목소리를 보태기 위해서였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던 함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함성 때문에 더욱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있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자 기준, 그리고 장애인수용시설의 폐지를 요구하며 5년째 광화문 지하를 지키던 사람들.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서 결심했다. 이 지하 농성장의 볼륨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면 싸구려 앰프라도 되어야겠다고. 그해 가을, 농성은 마무리되었다. 정부가 이들의 요구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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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사람 살려! 2008년 처음으로 교도소에 들어가 보았다. 교도관 뒤를 졸졸 따라가는데, 얼마나 긴장했던지, 예닐곱 개의 철문을 지나치는데 가슴이 예닐곱 번 철렁댔다. 볕이 드는 1층 복도를 따라 걷는데도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수인이 아니라 강사였는데도 그랬다. 나는 인권연대가 주관한 재소자 인문학 프로그램(평화인문학)의 강사였다. 이 프로그램을 따라 안양, 수원, 여주, 영등포, 남부 등 여러 구치소와 교도소를 다녔다. 강의를 거듭할수록 처음의 긴장과 두려움은 사라졌다. 하지만 철문들이 닫히는 소리에는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전자장비가 부착되어 예전보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닫히는데도 그랬다. 그것은 사람을 가두는 문들이 닫히는 소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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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이 겨울의 방어태세 이 겨울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이렇게 말이 없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라가 조용하다는 건 아니다. 사실은 아주 소란스럽다. 상대 정파의 지지율을 1%라도 낮추기 위해 혹은 자기 콘텐츠의 구독자 수를 한 명이라도 늘리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글을 써대고 영상을 제작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두가 ‘좋아요’와 ‘싫어요’를 원하는 한가한 말들뿐이다. 내가 행방을 찾고 있는 것은 생존 위기에 처한 ‘우리들’의 말이다. 도대체 이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지. 아니, 그 전에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한탄이라도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말을 나눌 사람도, 기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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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상원의원과 전역하사 2012년 미국 아메리칸 대학의 한 학생이 학생회장 임기를 마치며 신문에 ‘진짜 나(The Real Me)’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비밀을 고백했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기 안의 여성을 억누른 채 남성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사소한 일이든 짜릿한 일이든 나는 내가 해낸 일을 여성인 내가 행하는 모습으로 다시 상상함으로써만 즐길 수 있었습니다. 내 삶은 그런 식으로 내 곁을 지나쳐 갔고,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로서 삶을 허비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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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두 번째 사람 홍은전 세상에는 두 번째 사람이 있다. 심보선 시인은 바로 시인이 그렇다고 했다. 시란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면서 쓰는” 거라고. 첫 번째 자리는 슬픔의 자리이지 글의 자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슬픔에 관한 첫 번째 글은 두 번째 자리에서 나온다. 그런데 어찌 시인만이겠는가. 세상에는 시인 말고도 두 번째 사람들이 있다. 내가 세 번째, 네 번째 자리에서 지켜본 사람 홍은전 작가도 두 번째 사람이다. 그가 선 자리는 세상에서 제일 많이 비어 있는 자리다. 첫 번째 자리에도 사람이 가득하고, 세 번째, 네 번째 자리에도 사람이 가득한데 두 번째 자리는 그렇지 않다. 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슬퍼했다거나 분노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의 통곡 소리를 듣고 시뻘게진 눈알을 본다. 무엇보다 두 번째 사람이 선 자리는 첫 번째 사람이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 때 소매가 잡히는 자리다. 그걸 알기에 나는 세 번째에 서고, 겁이 날 때는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 도망친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이 많기에 세상의 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서 운다. 덩그러니 혼자 남아 흐느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