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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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나는 노들의 학생이다 노들에 철학 전하러 온 사람이지만이제는 노들로부터철학을 겨누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 학교의 교사였지만이 학교에서 배운 학생이다 지난 금요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노들장애인야학(노들)에 다니는 학생들의 무상급식을 위한 후원 행사가 열렸다. 우리는 이 행사를 ‘평등한 밥상’이라고 부른다. 정부가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해주면 좋겠지만 노들은 정규학교가 아니어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노들은 정규학교가 장애인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학교다. 정규학교에서 배제해놓고, 정규학교가 아닌 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로 급식에서 배제하는 셈이다. ‘평등한 밥상’은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기울어진 밥상을 적어도 이 학교에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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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지은이 이규식 지은이 이규식은 자체가 물음이자저자란 신화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했던 삶타인에 의존해 만든 눈부신 삶그 얘기에 붙인 고유명사일 따름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후마니타스). 지난봄에 출간된 이 책은 하나의 사건이자 문제제기이다. 무엇보다 ‘지은이 이규식’이 그렇다. 서울지하철 혜화역 2번 출구 앞에는 그의 이름을 새긴 동판이 있다. “장애인 이동권 요구 현장. 1999. 6. 28. 혜화역 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휠체어 추락사고 이후, 여기서 이동권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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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거짓새들의 둥지 삶에는 몇 개의 변곡점이 있다. 내게는 2006년이 그런 변곡점들 중 하나이다. 연구자들의 공동체에서 그런대로 행복하게 지내던 삶이 그때 틀어졌다. 그해 우리의 식탁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평택 미군기지 건설, 새만금방조제 공사에 관한 이야기로 뒤덮였다.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농부들을 내쫓고 집들을 부수는 모습, 새만금방조제 완성을 위해 갯벌 생명체의 마지막 숨구멍에 콘크리트를 쏟아붓는 모습은 그대로 지켜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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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장애해방 전선의 전사들 <전사들의 노래>(오월의 봄). 최근 출간된 홍은전 작가의 책이다. 지금도 장애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는 ‘전사들’인 박길연, 박김영희, 박명애, 이규식, 박경석, 노금호의 이야기를 담았다. 전사라니,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지 모르겠다. 지하조직의 세계는 모르겠지만 30년 전 대학가에서 이 말이 짧게 유행한 적 있다. 운동하던 학생들이 입던 셔츠들 중에 ‘전사’나 ‘전선’ 같은 문구를 새긴 것들이 꽤 있었다. 당시는 운동이 몰락하던 때였다. 현실의 운동은 몰락하는데 운동가요들에는 “피비린 전사의 길” “복수의 총탄”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 같은 문구들이 넘쳐났다. 액면가는 엄청난데도 작은 물건 하나 살 수 없는 지폐 같은 말들. ‘전사’도 그런 말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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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봉쇄된 건물의 창문 앞에서 내게는 이제 하나의 믿음이 생겨읽기는 노래만큼 춤일 수 있고노래와 춤이 있는 한,우리 언어와 공부, 그리고 투쟁은어떻게든 봉쇄를 뚫을 것이다 1977년 미국의 장애인들이 정부를 향해 재활법 504조에 서명할 것을 촉구하며 보건교육복지부를 점거한 적이 있다. 재활법 504조는 연방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기관이나 프로그램에서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다.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예산지원을 받는 대학 등 수많은 기관과 프로그램들이 적용대상이었다. 의회에서 재활법이 통과될 때만 해도 이 조항을 눈여겨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저 공적인 영역에서 누구도 차별받으면 안 된다는, 아름답지만 식상한 문구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장애인들이 이 문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정부가 발을 빼기 시작했다. 지금 이 나라의 정부처럼 당시 미국 정부도 장애인들에게는 문구만 주고 예산은 다른 데 쓰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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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호소 발달장애인 남매가안전한 지원체계에 있는 모습 보고엄마가 눈을 감을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정부와 지자체 향해 목소리 내달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대체로 중요한 목소리가 작게 들린다. 이것이 내가 칼럼을 쓰는 이유이다. 적어도 이 지면을 쓰는 이유는 그렇다. 내 안에는 세상에 대고 떠들어 댈 만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 혼자 간직해도 그만인 이야기들, 소수의 사람들만 알아도 그만인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내 글쓰기 전압을 확 끌어올린다. 너무나 중요한 목소리가 너무나 작게 들려올 때 정신의 진공관이 뜨겁게 달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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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약자에서 탈락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전장연을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전장연을 강자로 승격시킨 게 아니라 약자에서 탈락시킨 것이다. 오 시장은 ‘약자와의 동행’을 시정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다. 쓰고 다니는 마스크에도 새겨놓았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에게 ‘넌 약자가 아니야’라고 말했다면 그건 ‘넌 동행 자격이 없어’라는 뜻이다. 놀랍게도 오 시장은 지하철을 타게 해달라고 수십 년을 외쳐온 장애인들을 탈락시키는 대신 이번 시위로 지하철 이용에 불편을 겪은 ‘시민들’을 약자로 규정했다. 그러다보니 ‘약자와의 동행’이 그다지 약해 보이지 않는 자들과의 동행, 사실상 ‘시민과의 동행’이 되고 말았다. 그와 더불어 ‘넌 약자가 아니야’도 ‘넌 시민이 아니야’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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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너희가 사람이냐” 여권도 서울시도 교통공사도장애인들을 톡톡 건드린다 ‘권리 향한 투쟁 포기 않겠다’장애인들 시위는 그 답변이다사람이길 시민이길 포기 못하기에 1월2일 아침의 서울 삼각지역.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박경석 대표는 기자들 앞에서 출근길 선전전을 재개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장애인도 시민이지만 장애인에게는 기본적인 시민권, 즉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고 지역에서 살아가는 권리조차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국회예산 상황을 지켜보자며 휴전을 제안해서 출근길 탑승 시위를 중단했으나 결국 전장연의 예산 요구는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난달 법원이 내놓은 강제조정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사실상 열차 연착 시위를 불허한 조정안이지만 이를 받아들여 앞으로는 연착을 유발하지 않는 시위 방식을 택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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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141일의 삭발식 장애인들의 출근길 지하철 투쟁이 1년이 되었다. 장애인에게도 교육받고, 노동하고, 시설이 아닌 동네에서 살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말을 당연한 말로 만드는 것이 참 힘들었다. 20년 전부터 선로에 뛰어들고 도로를 기어가는 일을 숱하게 반복하고 나서야 이동편의증진법, 특수교육법, 장애인차별금지법, 발달장애인권리보장법 등이 제정되었다. 그런데도 장애인들의 권리는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미흡한 법률도 문제였지만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은 탓이 컸다. 정부는 매년 예산이 아니라 말을 책정해왔다. ‘노력하겠다’, 이것은 말이지 돈이 아니다. 그리고 말로써는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장애인권리예산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담은 투쟁이 이토록 계속된 것은 정부가 자꾸 돈 대신 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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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주택의 아래와 위에서 살다 이태원 참사로부터 10여일이 지났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참사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심리적 기제가 내 안에 있나 싶을 정도다. 처음 이삼일은 기사를 열심히 검색하면서도 제목만 보았을 뿐 본문까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족이나 생존자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 열흘간 제정신이었던 것은 정부관료들과 보수언론뿐이었던 것 같다. 법적 책임을 모면하고 정치적 위기를 차단하는 데 그야말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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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포획의 계절 단속과정서 인권 보호하겠다는말은 참 허망하기 그지없다 불법에 대한 이런 단속이 내게는인간이 인간에, 생명이 생명에게저지르는 거대 범죄의 일부 같다 또 계절이 온 모양이다. 지난 5일 법무부는 두 달 동안 불법체류자 집중단속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법무부, 경찰청, 고용노동부, 국토교통부, 해양경찰청 등이 모두 나서 범정부 차원에서 합동단속을 벌인다고 한다. 몇 줄 안 되는 보도자료라서 그런지 더욱 결기가 느껴진다. 흡사 범죄와의 전쟁 선언 같다. 하지만 단속 대상은 흉악범들이 아니라 비자기간을 넘긴 외국인들이다. 불법이라고는 했지만 사법적 처벌이 아니라 행정조치의 대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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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공부하는 심정 장애연구자 다수는 장애인 가족사회에 대한 흥미가 아닌 염려와돌봄 주체이자 해방의 일원으로자료를 모으고 문장을 쓰는 마음그들의 마음을 꼭 껴안고 싶다 당신 공부의 동력은 무엇인가. 오래전 어느 선생이 내게 물었다. 그때 호기심이라고 답했다. 처음에는 연구 대상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하지만, 내가 어디까지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지켜보고 싶다고. 이런 호기심이 내 공부를 이끄는 것 같다고. 거짓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낯 뜨거운 답변이었다. 너무 겉멋을 부렸다. 다른 새의 깃털을 제 몸에 꼽았던 이솝우화의 까마귀처럼, 남의 문구를 빌려서 내 공부의 동기를 장식했다. 사실 그것은 미셸 푸코의 말이었다. <성의 역사> 제2권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