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작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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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그리움을 더해 주는 디테일 우리는 그리움을 동력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때때로 글쓰기는 사랑하는 것들을 불멸화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글은 필연적으로 구체적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대부분 대체 불가능하다. 쉽게 대체 가능하다면 그리움에 마음 아플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그 대상의 세부정보를 낱낱이 알게 된다. 다른 존재와는 어떤 점이 다른지, 언뜻 흔해 보여도 왜 그 존재가 이 세상에 하나뿐인지를 배워간다. 그 존재는 이제 결코 흔해질 수 없다. 구체적으로 고유해졌으니까. 이 구체적인 고유함을 기억하며 쓰는 글에는 수많은 디테일이 담긴다. 나의 글쓰기 수업을 들으러 온 열아홉 살의 파도라는 아이가 쓴 글도 그랬다. 그가 10년 전의 어느 오후를 회상하며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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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반복되는 살처분, 더 나은 ‘반응’을 하자 책임감이란 무엇인가. 나로 인해 무언가가 변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비건 지향 생활을 지속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아끼게 되었다. 지구가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일들이 아직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국내에서도 발생했다. 치사율 100%로, 돼지에게만 발생하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이다. 감염된 돼지는 고열로 온몸의 혈관이 파열돼 고통스럽게 죽는다. 백신이 개발되지 않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살처분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파주와 연천 일대의 돼지들에게서 감염이 확인되었다. 22일 기준으로 돼지 1만5333마리가 살처분돼 땅속에 매몰되었다. 감염된 돼지들뿐 아니라 감염되지 않은 돼지들도 모조리 함께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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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쓰레기의 시간 쓰레기가 쓰레기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 손에서는 그랬다. 나는 쓰레기를 잠깐씩만 만져왔으므로. 더구나 쓰레기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직 쓰레기가 아니었으므로. 쓰레기란 내가 원하는 물질을 깨끗하게 감싸던 것. 손과 물건 사이의 얇고 가벼운 한 겹. 버리고 돌아서면 사라지는 기억. 그래서 아주 잠깐이었던 무엇. 그다음 단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같은 사람들이 잊은 쓰레기를 손으로 만지는 이들이다. 쓰레기와 관련된 어떤 노동자들은 밤에만 일해야 한다. 누군가는 쓰레기를 수거하는 과정을 보는 것조차 불쾌해할지도 몰라서. 자기 손을 떠난 쓰레기를 곧바로 혐오스러운 남의 일로 여기곤 해서. 나는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지만 내가 떠난 자리에 그들이 다녀갈 것을 안다. 쓰레기가 쓰레기인 시간이 그들에겐 짧지 않을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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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소년의 마음으로 쓰는 소년의 글 박민규 작가가 말하길, 좋은 글은 두 가지로 나뉜댔다. 노인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 혹은 소년의 마음으로 쓴 노인의 글. 이건 투명한 밤하늘만큼이나 명료한 기준이며 그 나머지에겐 모두 아차상을 주겠노라고 그는 썼다. 나의 학생들이 소년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에서 벗어나려는 순간을 종종 본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아챌 수 있다. 어떤 얘기를 하려다 말 때. 말 못할 이유로 당장의 솔직함을 포기할 때. 남 탓만 할 수 없을 때. 가장 원망스러운 건 자기 자신일 때. 아이들은 복잡한 마음으로 문장을 썼다가 지우고 고친다. 그렇게 쓴 것들은 아주 조금 노인의 문장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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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문제 해결의 경험치 나의 학생들은 문제를 마주했던 순간에 대해 글로써 증언하곤 한다. 열 살 김지온은 이렇게 썼다. “5년 전 일이다. 침대 위에 앉아서 휴대폰에 딸린 조그마한 장식용 하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야광 하트가 좋아서 조금씩 입 쪽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야광 하트는 내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가고 말았다. 순간 좀비 영화에서 다른 사람은 모두 도망치는데 나 혼자 좀비 떼에 물려 뜯기는 기분이 들었다.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들이 왜 ‘아무거나 입에 넣지 마’라고 하는지 알게 되었다. 엄마한테 소리쳤다. ‘물 줘!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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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주어가 남이 될 때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을 아이들은 자주 쓴다. 일단은 자신이 주어인 문장으로 글쓰기를 배워나간다. 재작년에 열다섯 살이었던 김서현이라는 아이는 원고지에 이렇게 적어서 들고 왔다. ‘나는 모든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다. 또 나는 친구와 먼 산으로 가는 수다를 떠는 걸 좋아한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고 사이가 더 돈독해지는 느낌이 든다.’ 고작 세 문장이지만 나는 이 글의 화자가 조금 좋아지고 말았다. 누군가와 한참을 말하고 듣다가 해 지는 줄도 몰라봤던 사람만이 ‘먼 산으로 가는 수다’ 같은 표현을 쓸 수 있다. 만약 친구가 된다면 그로부터 경쾌한 여유를 나눠 받을 게 분명했다. 위의 글은 또 이렇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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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쉬운 감동, 어려운 흔들림 비건 지향 생활을 해보니 이 시대의 영상들을 새롭게 감각하게 된다. 비건은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것뿐 아니라 나와 타자가 맺는 관계를 돌아보고 다시 설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무엇을 볼지에 대해서도 여러 고민이 생긴다. 유튜브 시대를 나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실감하는데, 많은 아이들이 유튜브에서 본 영상에 대한 글을 써오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뮤직비디오나 먹방이나 게임 채널이나 ASMR을 소개하고 감상을 적는다. 그중에서도 나의 학생들이 가장 잦은 빈도로 시청하는 것은 동물 영상이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영상들 속 동물들이 얼마나 귀엽고 웃기고 놀라운지를, 혹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슬픈지를 증언하는 글을 쓴다. 그걸 읽으며 나는 학생들의 여가 시간을 상상하고, 가끔 웃고, 또 가끔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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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잡담과 간식 글쓰기 수업은 글쓰기 외에도 여러 요소로 구성된다. 글을 쓰는 시간이 주를 이루기는 하나 그 앞뒤로, 혹은 사이사이로 끼어드는 딴짓이 있다. 나는 그런 딴짓의 시간이 수업을 지속시킨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글쓰기란 안 하는 게 더 편한 일이다. 귀찮음을 극복해야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이 아이들의 귀찮음을 무릅쓰게 만드는가. 나의 오랜 탐구 주제였다. 수업을 시작하면 입을 쭉 내밀고 토라진 얼굴로 앉아있는 아이가 보인다. 집에서 가만히 쉬고 싶어서 꾀병을 부려 보았지만 부모님께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각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올리브영 같은 화장품 가게에서 샘플을 발라보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모두 다른 컨디션과 다른 사연을 가지고 모인다. 그들과 가장 먼저 하는 건 근황 토크이다. 지난 한 주간 어땠는지, 전하고 싶은 소식이 있는지 내가 묻는다. 성의 없이 물으면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오기 때문에 우선 내 근황을 솔직하게 전해야 한다. 굿 뉴스로는 2년 만에 드디어 교정기를 뺀 사실을, 베드 뉴스로는 어떤 잡지에 연재를 하다가 잘렸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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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탄생과 거짓말 우리는 이야기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이 한 이야기 때문에 달라지기도 한다. 때때로 글쓰기는 본인에 관한 농담과 거짓말을 지어내는 일이다. 과장하고 축소하고 생략하고 점프하고 덧붙이며 스스로를 위한 진실을 세공한다. 2015년의 어느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아는 탄생 설화 중 몇 가지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한라산에 걸터앉아 제주도를 창조한 설문대 할망과, 알껍데기를 깨고 태어난 주몽과, 갈라진 제우스의 머리에서 황금 무장을 한 채 등장한 아테나의 이야기 따위를 손발 휘저으며 설명했다.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심드렁하게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 나는 칠판에 ‘나의 탄생 설화’라고 적었다. 내가 그들에게 묻고 싶었던 건 각자의 기원(起源)에 관한 해석이었다, 자기 몸과 영혼이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어떻게 믿고 싶은지 궁금했다. 낳아달라고 한 적 없는데 이 세상에 왜 태어난 것이며, 혹시 그 의미를 찾았는지도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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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믿어지는 문장들 특별한 준비 없이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아이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내 수업에 와서는 엄청나게 재밌는 글을 완성하고 집에 돌아갔다. 그들이 쓴 게 왜 재밌는지, 어떻게 좋은지 정확하게 칭찬해주고 싶어서 나는 책을 많이 읽었다. 좋은 문장의 근거를 생각할 때 자주 다시 읽은 책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다. 이 소설에는 작문 연습을 하는 어린 쌍둥이가 등장한다. 전쟁과 가난 때문에 그들에겐 선생님이 따로 없다. 둘은 부엌 식탁에 앉아 서로에게 글감을 내준다. 그 주제로 두 시간 동안 종이 두 장에다 각자의 글을 쓴다. 다 쓰면 글을 바꿔서 읽어본다. 상대방의 글쓰기 교사가 되어주는 것이다. 사전을 찾아가며 철자법 틀린 것을 고치고 문장을 수정한다. 문장을 고칠 때에는 쌍둥이들만의 규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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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나의 어린 스승들에 관하여 아파트 단지에 전단을 붙이며 돌아다니던 날이 있다. 어린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고 적어놓은 전단이었다. 교사를 소개하는 난에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와 경력을 적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잡지사에서 근무했고 작은 문학상에서 작은 상을 탄 사실을 적었으나 미더운 글쓰기 교사로 보이기엔 충분치 않았다. 사실 이제 막 스물세 살이 된 참이었고 카페 알바만으로는 월세를 감당하기가 벅찰 뿐이었다. 가르치는 일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이야기를 듣거나 글을 읽는 것이 좋았다. 뭐라고 어필해야 할지 몰라 글쓰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아이도 글쓰기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적었다. 내가 썼지만 믿을 수 없는 문장이었다. 나야말로 글쓰기가 싫고 두려울 때가 잦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