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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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미궁, 빵, 눈물 빵을 ‘굽는다’는 동사를 생각할 때면 카자흐 여인들이 떠오른다.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는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송당한 한인들 이야기가 쓰여 있다. 그들은 기차 화물칸에 한 달 넘게 실려가다가 낯선 역에 도착한다. 고향인 연해주에서 생전 와본 적 없는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떨궈진 것이다. 기차는 떠나버리고, 지낼 곳도 먹을 것도 없는 광활한 초원에서 그들은 깨달을 수밖에 없다. 세상에 버려졌음을. 죽으라고 여기에 방치됐음을. 아이들과 엄마들과 아빠들과 할머니들, 하루아침에 집도 밥도 미래도 잃은 그들이 낯선 황야에서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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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편집자가 눈에 선해지기까지 한창 책을 만드는 시기엔 꿈에 꼭 편집자가 등장한다. 꿈속에서 편집자는 휴양지로 도망친 나를 기어코 찾아내거나(도대체 어떻게 알고 오셨을까) 별 수확이 없을 게 뻔한 나의 텃밭을 둘러보며 해결책을 강구하고(마냥 송구스럽다) 혹은 별말 없이 내 책상 근처에 앉아 그저 커피를 홀짝이곤 한다(이 경우가 가장 신경 쓰인다). 무의식에서도 편집자가 보일 만큼 출간 과정 내내 그를 의식하며 지내는 것이다. 문학 편집자로 일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글을 읽고 돌려주는 피드백에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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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헤어진 뒤에 진짜 만남이 시작된다면 이별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대개의 이야기는 모험을 떠나며 시작되지만 <장송의 프리렌>은 독특하게도 모험이 끝난 직후에 시작되는 애니메이션이다. 십 년간 세상을 떠돌며 함께한 네 명의 일행. 그 어렵다는 마왕 퇴치까지 완수했으므로 이들은 뿔뿔이 흩어지기로 한다. 이별에 가장 동요하지 않는 자는 주인공인 프리렌이다. 그의 동요 없음은 긴 수명과 관련이 있다. 그는 엘프라서 천 년 넘게 산다. 십 년의 여행쯤은 무수한 찰나 중 하나일 뿐이다. 프리렌에게 ‘어떤 마을을 느긋하게 둘러본다’는 개념은 수십 년 단위의 시간을 의미한다. 백 년을 빈둥거린다 해도 큰 상관 없을 것이다. 인간 동료들이 애쓰며 매달리는 문제 역시 그의 눈엔 사사로운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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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심한 이야기를 위하여 드라마를 의미하는 한자는 ‘심할 극(劇)’이다. 글자의 구성을 쪼개면 호랑이와 멧돼지와 원숭이, 그리고 칼의 이미지가 보인다. 맹렬하게 싸우는 범과 시, 칼을 든 영장류가 만들어내는 속성은 긴장감일 것이다. 긴장은 갈등으로 이어지고 상처를 남기고 구경거리가 된다. 책이 아닌 드라마를 쓰면서 이러한 사실을 자주 곱씹고 있다. 드라마는 어떤 식으로든 심해야 한다는 것. 책에서라면 쓰지 않을 대사, 하지 않을 설정, 밀어붙이지 않을 싸움을 드라마에서는 한다. 극이란 그런 것이니까. 허구는 생존에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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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열두 명만 모여도 세계는 복잡해진다 요즘 즐겨보는 예능에는 열두 명의 출연자가 나온다. 거기엔 평생 친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을 때까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한마디만 듣고도 나는 그들이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알게 된다. ‘나 이 사람들 잘 모르네.’ 상종하기도 싫었던 이의 말에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미더웠던 자의 말이 실은 텅 비었음을 알아차리고, 딴 데서 만났으면 적이었을 자가 귀여워보여서 당황스러워진다. 화제의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하 ‘더 커뮤니티’)를 보는 동안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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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누군가는 종말 직전에도 회사에 간다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를 보기 시작했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시리즈가 쏟아지는 와중에 조용히 등장한 이 작품은 언뜻 재난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기엔 좀 시시하다. 대재앙의 스펙터클도 없고 인류에게 경종을 울리지도 않는다. 몇 사람의 하루일과를 담담히 응시할 뿐. 하지만 나는 이 시시함이 믿음직스럽다. 나를 잃는 고통, 나를 찾는 고통 여타의 픽션처럼 캐럴의 지구도 종말을 앞두고 있다. 지구를 절멸시킬 행성의 이름, 충돌까지 남은 시간이 전 세계에 알려진다. 모두에게 딱 반 년이 남았다. 그러자 유례없는 시대정신으로 세상이 물든다. 어떤 식으로든 행복할 것. 인류는 행복만이 유일한 윤리인 듯 생활을 바꾼다. 삶의 마지막 쾌락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가족과 이웃을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다. 그들은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하고, 못 가본 나라를 여행하고, 나체로 파티에 가고, 금기였던 사랑에 올인하고, 신호에 구애받지 않은 채로 차를 몬다. 그러나 인생을 즐긴다는 게 대체 뭘까? 우리의 주인공 캐럴은 도통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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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어떤 시인의 데뷔 방식 작가의 데뷔를 결정하는 사람은 누굴까? 데뷔 작가의 대부분은 출판사나 신문사 혹은 문학상의 심사위원들로부터 발탁된 바 있을 것이다. 입구가 바늘구멍처럼 작을수록 등용문은 멀어지고 높아지고, 그렇기에 더욱 권위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편집자나 심사위원에게서 온 전화를 받는 이들은 극소수다. 선택받지 못한 다수는 포기하거나 재도전하며 특수한 시험대를 통과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누군가의 승인 없이 스스로 데뷔하는 작가들도 있다. 그들은 새롭게 길을 낸다. 독자와 작가 사이 관문 건너뛰기 12월16일. 시인 계미현은 웹사이트 형태로 첫 시집을 발표했다. 디지털 영토 위에 지어진 이 시집엔 그의 글을 정확히 떠받치는 뼈대와 디테일이 넘치도록 훌륭하게 갖춰져 있다. 시집 제목은 범상치 않게도 <현 가의 몰락>이다. 계미현은 이 형식을 웹시집이라고 부른다. 그의 시집을 종이책으로 먼저 볼 수 없다는 게, 그와 서둘러 함께할 출판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게 처음엔 서운했다. 또한 이토록 높은 품질의 텍스트와 이미지가 무료란 점이 동료로서 분통이 터졌다. 내가 돈에 대한 궁리를 하는 동안 계미현은 독자들을 향해 개미처럼 굴을 팠다. 아래쪽에서 쓴 시를 모아 가상공간을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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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덜 사는 기쁨을 찾아서 엄마랑 구제 옷 쇼핑을 같이 다닌 건 열 살 때부터다. 헌 옷을 산 뒤 세탁해서 입는 일상이 우리 모녀에겐 익숙했다. 헌 옷은 크고 작은 하자가 있었지만 저렴했고 선택지도 많았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구제 시장의 풍요 속에서 멋을 부리며 살았다. 엄마와 나의 키가 똑같아진 고등학생 때부터는 서로 옷을 돌려가며 입기도 했다. 나는 엄마와 옷을 고르면서 하는 대화들을 좋아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보여지고 싶은 방식, 체형, 콤플렉스, 자랑스러운 부위, 피해야 하는 스타일, 선호하는 색과 패턴, 편안하면서도 고유한 그 모든 옷차림들…. 그러나 옷 자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세계에 대한 이해에 다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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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당신이 동시대인이라는 영광 ‘거대한 동시대인’이라는 말을 만지작거린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 <타오르는 질문들>에서 발견한 표현이다. 이 책에는 시몬 드 보부아르에 관한 글이 실려 있는데 애트우드가 거장일 때 쓴 원고인데도 보부아르를 향한 흥분감이 역력하다. 오래전 토론토에서 대학을 다니던 젊은 애트우드에게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카뮈와 베케트와 사르트르 같은 명사들 사이에서 여자는 딱 한 사람 뿐이었고 그게 보부아르였으니 그에 대한 애트우드의 선망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스무 살의 애트우드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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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투쟁 없이는 사랑도 없다 내가 자주 속아 넘어가는 표현이 몇 가지 있다. 아름다움, 너그러움, 산뜻함, 용기 같은 단어들. 아주 소중한 말이지만 갈등을 서둘러 봉합하기 쉬운 말이기도 하다. 여러 사정을 들어볼수록, 세상과 치열하게 접촉할수록 남발하기가 어려워지고 만다. 그런 표현 중 제일은 사랑일 것이다. 전에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 사랑스러운 단어를 동원했다. 지금은 다른 게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건 언뜻 보면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듯한 단어들이다. 정혜윤의 소설 <마음 편해지고 싶은 사람을 위한 워크숍>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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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인생을 멀리서 보는 일 가족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던지기 훨씬 전부터 나는 가족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매주 제출했던 수필 원고에도 가족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일단은 나랑 먼 이야기를 지어내는 법을 몰라서였다. 어째서 <나니아 연대기>나 <왕좌의 게임> 같은 서사는 내 안에 씨앗조차 없는지 한탄스러웠다. 하지만 나를 키운 어른들에겐 재미있는 면이 아주 많았다. 안 쓰기엔 너무 웃겼다. 웃긴 만큼 눈물겹기도 했다. 가까이 사는 이들이 마침 흥미로웠으므로 별수 없이 그들을 보며 받아적었다. 평이했던 문장(우리 엄마는 털털하다)에 시간이 흐르면서 유머와 거리감이 생겼고(퇴근한 복희는 자신이 하루 종일 신었던 양말 냄새를 꼭 맡아본다) 내가 자란 부품 상가 골목의 대가족을 조망하는 첫 문장(태어나보니 주변엔 온통 상인들뿐이었습니다)도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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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두 엄마 밑에서 자랄 아이에게 혹시 혁명이라는 게 일어나고 있다면 나는 겨우 뒷줄에서 까치발을 든 사람일 것 같다. ‘이상하고 뛰어난 친구들아, 이번엔 또 뭘 해낸 거니?’ 선구자가 쳐놓은 사고와 이뤄놓은 업적을 종종대며 따라가는 동안 혁명의 끄트머리에서 내 삶도 변해간다. 오랜 동지 규진의 임신 소식을 듣던 밤 나는 문득 더 강하고 웃긴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규진이 이미 그런 엄마이긴 하지만 양육이 엄마들만의 책임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엄마 친구로서의 나, 시민으로서의 나, 출산과 육아가 남일이 아니게 된 작가로서의 나를 상상하면 저항과 사랑을 위한 체력뿐 아니라 고도의 유머 감각까지 필요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