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이야기를 위하여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드라마를 의미하는 한자는 ‘심할 극(劇)’이다. 글자의 구성을 쪼개면 호랑이와 멧돼지와 원숭이, 그리고 칼의 이미지가 보인다. 맹렬하게 싸우는 범과 시, 칼을 든 영장류가 만들어내는 속성은 긴장감일 것이다. 긴장은 갈등으로 이어지고 상처를 남기고 구경거리가 된다. 책이 아닌 드라마를 쓰면서 이러한 사실을 자주 곱씹고 있다. 드라마는 어떤 식으로든 심해야 한다는 것. 책에서라면 쓰지 않을 대사, 하지 않을 설정, 밀어붙이지 않을 싸움을 드라마에서는 한다. 극이란 그런 것이니까.

허구는 생존에 유리했다

십수 권의 종이책을 왕성하게도 써왔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내 작업은 이야기꾼보다는 문장에 관한 기술자 혹은 스타일리스트에 더 가깝지 않았나 싶다. 양쪽을 무 자르듯 나눌 수는 없겠으나, 각본 집필 때문에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을 처음부터 훈련하는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드라마는 분명 다른 역량을 필요로 한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인류가 박진감 넘치는 허구를 창조해온 역사를 탐구하는 책이다. 아주 먼 과거, 날마다 생존 투쟁에 임했던 선사 시대 부족에 허구는 딱히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조심해. 저기 호랑이가 있어!”라는 말이 거짓말이라면 이유 없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나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혹한기를 지나며 인류는 어느 순간 그곳에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고, 종국엔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이야기’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자 언젠가 맞닥뜨릴지도 모를 호랑이를 대비하는 심신의 무장이 가능해졌다. 책은 이를 ‘과격한 정신의 도약’이라고 표현한다. 이 도약은 언어에 시제라는 개념이 편입된 덕분이고, 선조가 어떤 경험을 과장하고 축소하고 편집하기로 결정한 덕분이다. 조상들 사이에서 토끼보다 매머드가 많이 논의된 건 매머드가 마치 저 산만큼 커다랗다고 과장되어 묘사된 사실과 유관하다. 손에 땀을 쥐는 이야기 쪽으로 사람들의 귀는 열린다. 그런 식으로 생존을 돕는 허구가 발전했다.

오래된 신화 속 세헤라자드도 생존을 위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살인을 일삼던 왕도 세헤라자드만은 죽이지 못한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이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에 이야기를 끊는 것은 세헤라자드의 필승 전략이었다. 그리고 모든 드라마 작가는 세헤라자드처럼 일한다.

이야기는 변화를 향해 간다

세헤라자드에게 왕이 있었다면 내게는 가상의 시청자가 있다. 그들은 미래에 산다. 미래로 가는 동안 나는 스스로와 엄청나게 다툰다. 내게는 드라마 작가로서 치명적인 단점들이 있다. 우선 적이 누군지 모른다. 이야기에서는 물론이고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을 열세 권이나 썼는데 그중 이렇다 할 안타고니스트가 한 명도 없다는 게 새삼 이상하다.

또한 갈등을 너무 빨리 봉합한다. 드라마 집필의 최대 방해꾼은 낙천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나다. 나는 인물들을 즉각 화해시키고 쉽게 용서한다. 사고를 예방하고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며 갈등을 최소화한다. 내 문장은 좋아하는 대상을 아름답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특화되어왔다. 인물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에는 영 젬병인 작가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친구인 양다솔 작가가 말했다.

“네 안에 사는 나를 좀 꺼내봐. 나는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고 사고를 치잖아.”

과연 양다솔의 인생은 바람 잘 날 없었다. 내겐 없는 심한 구석이 그의 삶엔 가득했다. 그날 이후로 드라마가 막힐 때마다 친구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꼬거나 망쳤을까 상상한다. 그럼 정신이 갑자기 과격하게 도약한다. 겪지 않은 갈등이 풍성하게 생겨나고 식은땀 나는 대사들이 쓰인다. 나는 친구의 힘을 빌려 내 글이 드라마틱해지는 그 순간을 아주 좋아한다.

거의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변화를 향해 제 발로 걸어들어간다.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건 바로 이 능동성이다. 나는 용기를 내어 주인공들이 폭풍의 눈으로 향하도록 이끈다. 한자 속 호랑이와 돼지와 칼을 보며, 세헤라자드와 내 가슴속 사고뭉치 친구들을 떠올리며 드라마를 쓴다. 소설로 써서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던 인물들을 더 속속들이 이해하게 된다. 각본으로 옮겨진 인물들의 눈동자는 책에서보다 더 심하게 요동친다. 갈등하는 눈동자란 어떤 식으로든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시 만든 이야기를 들고 내가 향하려는 곳은 저잣거리다. 시장에서, 할머니의 수영장 탈의실에서, 할아버지의 등산로에서, 친구들의 카톡창 속에서 내가 만든 심한 이야기가 오르내리기를 꿈꾼다. 쉽고 낮고 속된 말로 마구 해석되면 좋겠다. 그렇게 유통되는 몹시 상스러운 드라마 안에, 몹시 성스러운 진실을 숨겨두고 싶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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