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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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청각 정보와 함께하는 글 ‘일간 이슬아’ 연재를 하며 구독자로부터 아주 많은 e메일을 받는다. 체력의 한계 때문에 모든 피드백과 요청에 응답할 수는 없으나, 수백 통의 메일 목록에서도 특히 중요한 이야기는 놓치지 않고 알아볼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시각장애인 구독자인 김 선생님의 이야기다. 2018년 겨울. 김 선생님과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시각장애인 독자가 내 글을 듣는 속도에 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김 선생님은 일반적인 컴퓨터에 ‘센스리더’라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쓰신다. 화면을 음성 언어로 변환하는 프로그램이다. 변환된 나의 글을 샘플로 보내주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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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기후위기와 탈육식 지구물리학자 호프 자런의 신간 제목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국내 출간을 앞두고 사전 연재 중인 책이다. 자원이 한정된 지구에서 지난 50년간 인간이 누린 풍요가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다룬다. 땅과 바다와 하늘을 망쳐놓은 인류의 식생활과 소비생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구는 앞으로 더 빠르게 달라질 테고 우리는 결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풍요로울 수 없을 것이다. 호우가 계속되고 있다. 기후위기 전북비상행동은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라고 말하며 온라인 피케팅 운동을 시작했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대륙의 북극곰 이야기가 아니다. 코앞에 닥친 미래를 바꿔놓을, 이미 시작된 재난 이야기다.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점점 심각해질 기후재난의 속도와 강도를 최대한 늦추고 약화시킬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2050년을 목표로 장기 저탄소 발전 전략을 지향하는 것은 전 세계적 추세다. 한국 정부도 이에 맞춰 그린 뉴딜 정책을 발표했으나 여전히 석탄발전소 건설을 계획한다는 점, 탄소 배출 제로 목표가 포함되지 않은 점,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미미하다는 점 등에서 지극히 산업중심적이고 성장중심적 정책이라는 여론이 있다. 강한 의지와 섬세한 시선으로 기후 환경 정책을 이끄는 정치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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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남의 고달픔을 쓰는 연습 나를 키우는 사람들의 노동에 대해 써보자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엄마나 아빠가 집 밖에서 그리고 집 안에서 하는 일들을 새삼 곱씹기 위한 글감이다. 한 아이가 노동이 뭐냐고 묻는다. 나는 노동이 무엇인지 대답한다. 모든 노동에는 고달픈 점이 있다고도 덧붙인다. 그러자 또 다른 아이가 고달픈 게 뭐냐고 묻는다. 이번에 나는 아이들 전체에게 되묻는다. “그러게. 고달프다는 건 뭘까?” 아이들은 질문한 아이에게 자신이 아는 고달픔의 속성에 관해 앞다투어 말해준다. “힘들다는 얘기야.” “뭔가 막 피곤하고 서러운 거야.” “한마디로 지친다는 거야.” 소규모 집단지성으로 서로의 호기심이 해결된다. 오늘은 나를 위해 기꺼이 고달픈 사람들을 떠올리며 글을 써보기로 한다. 매일 봐서 다 안다고 생각했던 부모의 모습을 눈 씻고 다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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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재능과 반복 열아홉 살 때는 재능에 관해 자주 생각했다. 글쓰기 수업에서 친구의 글과 내 글을 비교하다가 질투에 사로잡히는 시절이었다. 내가 더 잘 쓴 것 같다며 우쭐해지는 날도 있었지만 다음 주에 친구가 써온 새로운 글을 읽다보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낭패감이 들기 일쑤였다. 수업에서 우리는 정서적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매주 한 편의 글을 썼다. 나는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 궁금했다. 재능은 누군가를 훨씬 앞선 곳에서 혹은 훨씬 높은 곳에서 출발하게 만드는 듯했다. 재능이 있다면 더 열심히 쓸 참이었다. 만약 없다면 글쓰기 말고 다른 일을 열심히 해볼까 싶었다. 어떤 어른은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어른은 나에게 재능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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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입체적인 타인들 어느 날 초등부 글쓰기 수업을 마치며 나는 칠판에 숙제를 적었다. 숙제의 글감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어떤 면모를 좋거나 나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지 질문하는 글감이었다. 일주일 뒤 아이들은 숙제를 제출했다. 아홉 살의 이안이는 자신의 친구 제하를 좋은 놈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썼다. “제하는 필요한 게 있으면 빌려주고 칭찬을 잘 해준다.” 반면 나쁜 놈으로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악당 볼드모트를 골랐다. “그는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고통을 준다.” 이상한 놈으로는 에릭이라는 인물을 골랐다. 이안이가 좋아하는 책 <조지의 우주를 여는 비밀 열쇠>에 등장하는 천재 과학자다. 이안이가 쓰길 “내가 생각하는 이상한 놈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물었다. “보통 사람이란 무엇일까? 다르다는 게 꼭 이상한 것일까?” 이안이가 대답했다. “엄청 심하게 다르면 이상해요. 예를 들어 우주에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을 만큼 다른 사람 있잖아요.” 그는 다시 책에 눈을 돌리고 에릭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안이에게 에릭은 달라서 싫은 사람이 아니고 달라서 매혹적인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그 다름에 ‘이상한’보다 더 좋은 형용사를 붙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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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코로나 시대의 글쓰기 교사 ‘원격’ 글쓰기 수업에 관해 쓰는 날이 오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온라인개학’이라는 말을 아직도 SF 소설 용어처럼 느끼는 내가 그 개학을 책임지는 인력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4월20일부로 전국의 초·중·고등학생 540만명이 원격수업을 듣게 되었다. 내가 교사로 일하는 곳은 도시형 대안학교다. 이 학교 또한 유연하게 고민하며 코로나19 시대에 적응 중이다. 몸 쓰는 감각과 현장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대안학교의 특성상 온라인수업에서 제대로 구현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에 맞게 커리큘럼을 수정하자 글쓰기 과목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코로나19 시대의 과도적 첫 학기가 열렸고 나는 이제 겨우 한 번의 온라인수업을 마친 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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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몸의 일기 거울을 잘 보지 않던 아이가 문득 몹시 골똘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서는 날이 있다. 10대들의 교실에서 글쓰기 교사로 일하다 보면 그런 순간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보이든 별 관심 없던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이는 이제 자의식의 축복과 저주 속에서 한층 더 복잡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 눈에 비친 내 모습과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신경 쓰며, 내가 바라는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괴리를 수없이 느끼며 자라날 것이다. 누구도 그 변화를 늦추거나 멈출 수 없다. 글쓰기 교사인 나는 아이가 자기 몸을 최대한 덜 미워하기를 혹은 아무래도 좋다고 느끼기를 소망하며 수업을 진행한다. 거울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자주 건네는 건 몸의 느낌에 관한 질문이다. 지난주의 키와 이번 주의 키가 다른 그들은 최근의 자기 모습과 감각을 기억하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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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그날 입은 옷 어느 날 나는 ‘그날 입은 옷’이라는 글감을 칠판에 적었다. 내가 혹은 누군가가 어느 날 입고 있던 옷을 기억하며 글을 써보자는 제안이었다. 이따금씩 우리는 무엇을 입었는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을 겪는다. 그 하루는 왜 선명하게 남는가. 누구와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날의 옷차림까지 외우고 있는가. 이 주제로 모은 수십 편의 글 중에서 너무 서투른 옷차림이라 유독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스물다섯 살의 도혜가 쓴 글이다. 아직 한 번도 알바를 해본 적 없는 아이가 있었다. 열아홉 살의 도혜였다. 도혜는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처럼 부모님께 용돈을 받으며 학교와 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그의 친구 윤이는 달랐다. 고등학생 신분으로도 이미 여러 알바를 해본 아이였다. 그들의 동네가 관광지로 뜨기 시작하여 곳곳에 알바 자리가 생겨나던 2014년 무렵이었다. 방과 후에 윤이는 다양한 식당에서 서빙 일을 했다. 자신의 용돈을 직접 벌고 전기료와 난방비도 직접 내야 하는 사정이 윤이에겐 있었다. 도혜의 반에서 그런 친구는 윤이뿐이었다. 쉬는 날이면 윤이는 자신의 가난한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소박한 파티를 하곤 했다. 도혜는 자신이 모르는 슬픔과 낭만을 아는 듯한 윤이의 모습을 남몰래 동경했다. 당시 윤이는 갈빗집 알바와 중국집 알바를 병행했는데 하루는 갈빗집 알바가 길어지는 바람에 중국집 알바 대타가 필요해졌다. 급하게 대타를 찾느라 난처해진 윤이에게 도혜는 용기를 내어 자신이 대신 출근하겠다고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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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문장 속 자기 표정 ‘글투’ 하루는 글쓰기 수업에서 과제를 걷은 뒤 제목 옆에 적힌 아이들의 이름을 가려보았다. 그리고 과제를 마구 섞어버렸다. 그러자 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워졌다. 이름 없는 여러 편의 글들을 칠판에 붙이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각각 누가 쓴 것인지 맞혀보자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단번에 글의 주인을 찾아냈다. 같은 종이에 동일한 폰트와 형식으로 적혀있지만 모든 글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다. 글쓰기 수업에 같이 다닌 몇 달 사이 서로가 쓰는 문장의 습관을 알아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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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먼저 울거나 웃지 않고 말하기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장편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한국판 띠지에는 김애란 작가의 다음과 같은 짧은 추천사가 적혀 있다. “울지 않고 울음에 대해 말하는 법.” 이 한 문장 때문에 펼쳐보지도 않고 책을 샀다. 나 역시 울지 않고 슬픔에 대해 잘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펼쳐들자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잃은 데니즈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이 소설은 데니즈의 상사이자 다정한 친구인 헨리의 목소리로 이렇게 서술한다. ‘봄이 왔다. 낮이 길어지고 남은 눈이 녹아 도로가 질척했다. 개나리가 활짝 피어 쌀쌀한 공기에 노란 구름을 보태고, 진달래가 세상에 진홍빛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는 모든 것을 데니즈의 눈을 통해 그려보았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이 폭력이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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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접속사 없이 말하는 사랑 글을 다 쓰고 나면 처음부터 훑어보며 접속사를 지우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그래서’ ‘그리고’ ‘따라서’와 같은 말들을 최대한 덜어낸다. 접속사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뉘앙스를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두 문장의 관계를 섣불리 확정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나는 그 사이의 접속사를 뺀다. 두 문장들의 상호작용을 촘촘하게 설계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지만 어떤 행간은 비워둘수록 더욱 정확해진다. 특히 ‘그러나’와 ‘하지만’처럼 앞에 오는 내용을 역접(逆接)하는 접속사를 남발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서 이런 문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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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글쓰기만큼이나 재밌고도 난감한 일이다. 좋은 글이 왜 좋은지, 별로인 글이 왜 별로인지 명쾌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모두가 그 설명을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쓰기 교사라면 잘해야만 한다. 교사의 말이 학생들이 다음주에 써올 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은 채로 얼떨결에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전공했다면 더 좋았을 부분이 분명 있겠지만 그건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라 알 수가 없다. 이번 생에서는 부지런한 독서와 정기적인 글쓰기 모임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글을 어떻게 읽고 쓸지 훈련하는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계속될 즐거운 훈련이다. 죽었거나 살아있는 작가들이 책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친밀하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친구들과 합평을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