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대개의 이야기는 모험을 떠나며 시작되지만 <장송의 프리렌>은 독특하게도 모험이 끝난 직후에 시작되는 애니메이션이다. 십 년간 세상을 떠돌며 함께한 네 명의 일행. 그 어렵다는 마왕 퇴치까지 완수했으므로 이들은 뿔뿔이 흩어지기로 한다.
이별에 가장 동요하지 않는 자는 주인공인 프리렌이다. 그의 동요 없음은 긴 수명과 관련이 있다. 그는 엘프라서 천 년 넘게 산다. 십 년의 여행쯤은 무수한 찰나 중 하나일 뿐이다. 프리렌에게 ‘어떤 마을을 느긋하게 둘러본다’는 개념은 수십 년 단위의 시간을 의미한다. 백 년을 빈둥거린다 해도 큰 상관 없을 것이다. 인간 동료들이 애쓰며 매달리는 문제 역시 그의 눈엔 사사로운 일들이다.
그가 무심히 세월을 누리는 동안 인간 동료들은 빠르게 노화한다. 힘멜은 모험을 함께할 당시 싱그러운 젊은이였다. 다정하고 용맹하게 세상 구석구석을 챙기던 푸른 머리칼의 사내. 그런데 프리렌이 잠깐 딴짓을 하고 온 사이 그는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은 자그마한 노인이 되어 있다. “폭삭 늙었네.” 프리렌이 무신경하게 중얼거려도 힘멜은 노여워하지 않는다. 프리렌을 비껴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에 관해 이미 오랫동안 생각했으리라. 그저 생의 마지막 나들이를 함께해줘서 고맙다는 말만 전한다. 눈부시게 강한 프리렌을 아끼고 존경하기 때문에. 또한 늘 혼자 남게 될 프리렌을 걱정하기 때문에.
너라면 이렇게 살았을 테니까
힘멜의 짐작처럼 얼마 후 프리렌은 관 위로 뿌려지는 흙을 멍하니 보고 있다. 그것은 힘멜의 무덤가를 덮는 흙이다. 프리렌의 후회는 그제야 시작된다. “어째서 더 알려고 애쓰지 않았던 걸까?” 그는 인간과 자신의 시차에서 처음으로 고통을 느낀다. 힘멜이라는 각별한 타인이 사라지기 전엔 몰랐던 고통이다.
우리를 영영 헤어지게 하는 건 죽음만이 아니다. 그를 모르기로 한 선택들이 생전에도 둘을 한없이 멀게 만들었다. 반대로 말해볼 수도 있을까. 그를 계속해서 알아간다면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만나게 되는지. 그런 앎 또한 만남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바로 이 자리에서 프리렌은 새 모험을 떠난다. ‘힘멜의 죽음으로부터 몇년 후.’ 그게 이 만화가 시간을 세는 방식이다.
다시 떠난 길에서 프리렌은 옛 동료 아이젠을 만난다. 지난 모험을 회상하며 프리렌이 말한다. “너희들과 함께한 여행은 내 인생 전체에서 100분의 1도 안 돼.” 그러자 아이엔이 대답한다. “그 100분의 1이 널 바꿨어.” 분명 인생엔 유독 특별한 시절이 있다는 진실이 프리렌에게 흘러들어온다. 작은 경험으로 치부했던 십 년 속에 정금같이 귀한 장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째깍째깍 똑같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도 세월을 균일하게 겪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젠은 “인생이란 약하게 사는 시간이 의외로 더 긴 법”이라고 일러준다.
작고 약하고 짧은 생으로부터
잠깐 강하고 대부분 약한 인간의 생을 이해하는 동안 프리렌은 번거로워지고 풍요로워진다. 주위를 둘러보니 프리렌의 동료들은 진작부터 이런 수고를 하고 있었다. 왜 굳이 사람과 깊게 관계 맺느냐는 질문에, 아직 죽지 않은 동료들은 ‘힘멜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돌려준다. 작은 일들을 참 꼼꼼히도 챙기던 힘멜은 이제 죽고 없다. 그러나 힘멜이 할 법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세계의 얼굴은 조금씩 힘멜과 닮아간다.
우리의 수명은 천 년이 아니다. 프리렌처럼 천 년을 축적해서 쌓은 마력과 두려움 없이 적을 바라보는 눈동자 같은 건 영원히 갖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서 해내는 일들도 있다. 장수하는 프리렌의 무지와 오만을, 단명하는 인간들이 너그러이 감싸듯이 말이다. 힘멜은 왜 그토록 속이 깊었는가. 서둘러 헤아려서다. 인간이 너무 많은 걸 망쳐버린 인류세 시대에 <장송의 프리렌>을 보며 기억해 낸다. 우리가 시간의 한계 때문에 무진장 좋은 선택을 할 때가 있음을.
온갖 화려한 마법이 난무하는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건 오히려 작은 마법들이다. 생은 자질구레한 일들의 총합이라 사랑을 아는 자는 작은 것의 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미약한 인간들의 투쟁에 동참한 천 살의 엘프는 프리렌은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처럼 ‘작은 것들의 신’에 가까워진다. 그러는 사이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엎치락뒤치락 서로를 돌본다. 나는 이것이 허무맹랑한 판타지가 아님을 안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도 소중한 이를 잃은 이들은 이미 그렇게 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별을 이별 이상으로 만드는 삶이다. 상실이 숙명인 우리가 가장 아프게 배워야 할 마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