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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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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대통령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나의 대통령 퇴진 구호는 ‘김영삼’에서 시작됐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정리해고 반대 투쟁 폭력 진압, 이라크전쟁 파병과 비정규악법 통과,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와 백남기 농민 사망… 이유도 방향도 분명했다. 대통령을 바꾸자는 구호이기보다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였으므로 그것은 급진적 민주주의의 요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익숙했던 퇴진 구호에 이물감이 들기 시작했다. 대통령 퇴진이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요구는 아니다. ‘문재인 퇴진’에 앞장선 이들이 최저임금 인상이나 난민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것처럼, 방향은 제각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탄핵소추를 당했으나 그것을 민주주의의 역사로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박근혜 퇴진 촛불의 경험은 대통령 파면을 민주주의의 증거로 기억하게 한다. 그러나 국민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서야 하는 상황은 민주주의가 실패한 증거이기도 하다.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정치 시스템의 붕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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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우리, 팔레스타인 “미국이 원자폭탄 터뜨려서 해방시켜줬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은 해방됐을지 몰라도 우리 원폭 피해자는 해방이 됐습니까.” 몇달 전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 말이 잊히지 않았다. 내게 해방은 1945년에 있었던, 지나간 사건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아직 닿지 못한 역사였다. 해방을 너무 쉽게 말해왔음을 반성했다. 가자지구 집단학살 1년을 앞두고 열린 집회 제목은 ‘우리는 팔레스타인 해방의 연대자’였다.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을 모르고 해방의 연대자가 될 수 있을까? 일본이 조선을 점령해 조선인을 착취했다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해 팔레스타인인을 추방했다. 점령당하지 않으려면 절멸당해야 했다. 1948년 시작된 일이다. 그러니까, 부모 잃은 아이들이, 피란 끝에 닿은 땅에 다시 집을 짓고, 자신의 운명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었으나, 다시 마을과 함께 불에 타고 부서져, 유언도 듣지 못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평생소원으로 물려받고, 다시, 물려줄 것은 똑같은 소원밖에 없는 부모가 되어, 눈앞에서 쓰러지는 아이를 보아야 하는 시간이, 역사라 이름 붙여도 된다면, 팔레스타인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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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딥페이크, 깊은 속임수 찍히는 사람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작고 성능이 좋은 캠코더나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이미지로 사람을 속이는 프로그램이 개발된 사실은 대체로 여성의 권리가 침해되는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법은 기술의 ‘악용’을 막으려 했지만 늘 한발 늦었다. 이제 누구나 손쉽게 성착취물을 만들 수 있게 된 현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이 기술을 훌쩍 넘어선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동의했든 하지 않았든 스스로 찍었든 남이 찍었든, 여성의 이미지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수단이 되는, 사회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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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에어컨으로 시험에 든 기분이라면 에어컨으로 시험에 드는 기분, 나만 느끼는 건 아닐 듯하다. 틀어놓으면 죄짓는 기분, 틀지 않으면 자학하는 기분. 기후위기로 여름은 더 무더워지고 냉방은 더욱 필수적인 것이 되는데 그렇게 전기를 쓸수록 기후위기는 더 심각해진다니 고약한 시험이다. 그런데 이건 시험의 일부일 뿐이다. 지난주, 에어컨 설치 아르바이트를 하던 20대 노동자가 온열질환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가 작업한 공간은 중학교 급식실이었다. 누군가에게 밥을 먹이려 일하던 누군가는 더위를 견디며 밥을 짓고, 누군가를 시원하게 해주려고 일하던 누군가는 더위에 쓰러졌다. 그날, 13일은 전력수요가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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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참사는 리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불은 리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참사는 리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위험물을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대피할 통로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작업장이 있었고,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라는 듯 사람을 ‘쓰면서’ 정작 위험할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은 기업이 있었다. 리튬에는 책임이 없다. 그런데 아리셀 참사 이후 정부의 재발방지대책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듯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새로운 소방기술 개발”을 주문했다. 어느 때나 할 수 있는 ‘아무말’에 가깝다. 리튬전지 화재 진화가 어렵다는 사실은 정부도 아리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리튬은 대통령령으로 정한 위험물로, 지정된 수량만 정해진 기준에 따라 저장하거나 취급해야 한다. 아리셀은 주의를 기울이기는커녕 과도하게 많은 전지를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간에 쌓아두고 있었다. 국가의 안전 규제가 실패한 결과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오히려 “규제와 처벌만으로 산업안전을 지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소방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노동자들더러 위험을 감수하라는 말이다. 이처럼 원인을 왜곡하는 재발방지대책은 참사를 지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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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판단하지 않는 자들이 만드는 재난 작년 7월은 비가 무섭고도 질기게 쏟아졌다. 월 강수량은 기상청 관측 이래 두 번째로 많았다. 7월15일은, 충북 오송 지하차도가 물에 잠겨 14명, 경북 예천 산사태로 12명이 사망하는 등 희생자가 30명이 넘었다. 이런 기억은 기후위기 시대에 재난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느끼게 한다. 하지만 재해가 늘어난다고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이 따라 늘지는 않는다. 올해 4월 대만을 강타한 지진의 결과에서 볼 수 있듯 재난에 대비하고 대응하는 국가의 역량이 재난의 양상을 결정한다. 올해 5월 행정안전부는 ‘2024년 여름철 자연재난(풍수해 폭염) 종합대책’을, 충청북도는 ‘재난안전관리 강화전략’을 발표했다. 대책이 기대하는 그림은 이렇다. 홍수 위험이 생기면 인공지능 예측을 활용해 예보하고 인근 운전자의 내비게이션으로 안내되게 한다. 지하차도마다 진입차단시설을 설치하고 4인 담당자를 지정해 둔다. 국민에겐 동영상 홍보를 반복해 행동요령을 익히게 한다. 분명 정부와 지자체는 뭔가 하고 있다. 예측은 기술에, 대응은 일선 공무원과 국민에게 미루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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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밀양, 고마운 초대장 “무조건 밀어!” 경찰 간부의 명령이 들려왔다. 방패를 든 경찰들이 산 중턱에서 주민을 밀어내며 순식간에 길을 냈다. 한전 직원들이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송전탑 공사 현장으로 들어갔다. 산길이 되었던 경찰들은 다시 공사 현장의 울타리가 되었다. 인권침해감시단으로 현장에 있던 내가 경찰에 채인 것도 찰나였다. 2013년 10월이었다. 겹겹이 선 경찰들 사이로 끌려간, 불과 10m도 되지 않는 거리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다. 울창하고 고즈넉한 숲길이 있었고 터무니없는 고요가 있었다. 다가올 위험에 불안해하며 흔들리는 눈동자도, 내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며 꼭 다문 입술도, 누구도 다치지 않길 바라며 쓸어내리는 손길도, 온기를 나누며 서로 기대는 어깨도, 그곳엔 없었다. 평화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게, 연행보다 당혹스럽고 분통했다. 소름 끼치게 서늘한, 내 것은 아닌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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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이 폐허를 응시하자 숫자만 남았다. 거슬러가면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으로 드러난 필수의료·지역의료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사회적 관심사였다. 언젠가부터 의사 수가 얼마나 부족한지, 어떻게 늘릴 것인지로 관심이 옮겨가다가 이제는 내년도 의대 입학 정원이 몇명일지만 남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풀기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의사가 부족하다는 근거로 곧잘 인용되는 OECD 비교를 보면 한국은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객관적 건강 지표는 우수한데 주관적 건강 인식이 매우 낮다. 의사는 적은 편인데 병원과 병상과 장비는 매우 많다. 1인당 외래 진료 횟수나 입원일수는 평균의 두 배를 넘는다. 한국 사람들이 두 배나 더 아플 리 없는데 말이다. 동시에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각한 불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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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기억은 동사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은 기억할 말들을 만날 때 단단해진다.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다가올수록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내가 몇년째 엇비슷한 말들에 멈춰 있음을 깨달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이 앞장서고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서 밀어가며 만들어온 시간을 떠올리면 지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느낌이다. 조금 낯설고 많이 속상하다. 지나온 시간을 복기하는 일이 필요하다. 내가 기억하는 변곡점 중 하나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공식 사과다. 2017년 8월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사과했다. 많은 이들이 촛불 이후 달라진 시대를 보여주는 징표로 읽었다. 하지만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었다. “지난 정부가 선체 침몰을 지켜보면서도 승객 한 명 구조하지 못했을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지난 정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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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우리, 정치할래요? 친척 어른들이 “나중에 정치할 거냐”고 묻곤 했다. 예상되던 직업과 동떨어진, 인권운동이라는 것을 한다길래 궁금하셨을 게다. ‘운동권’이 ‘정치권’에 들어가는 일이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던 시절이다. 나는 변명이라도 하듯 손사래를 쳤다. 정치가 아니라 운동을 계속할 거라고. 시간이 흘러 나는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작년 가을부터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서로 헐뜯으며 진영 대립을 반복할 것은 뻔했다. 냉소가 아니다. 한국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 대선만 봐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극한의 대치는 판박이다.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하고 돈 벌고 집 구하고 가족을 꾸리고 등등, 살아가는 방식이라 여겼던 구조가 세계 어디에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곳곳에 불만이 쌓이니 정치인들도 해법을 찾는다. 하지만 위기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사는 일이 고된 사람들에게 적을 만들어주기 바쁘다. 상대 정당이든, 이주민이든, 다른 국가든, 세상이 엉망인 이유를 엉뚱한 데로 돌린다. 신자유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정치의 위기를 심화시킨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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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나에게 노동이란 누구는 노래를 했고 누구는 악기를 연주했다. 피켓을 들고 캠페인을 하는 사람도,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생 그래프를 그리느라 진지한 사람, 혓바닥을 이용해 컴퓨터에 스토리를 입력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진집 제목은 <이것도 노동이다>. 말하고 싶은 바가 선명하다. 그것도 노동이라고 맞장구치기는 어렵지 않다. 무언가 해내는 인간의 보편적 활동을 우리는 노동이라 불러왔다. 가수, 연주자, 감독, 작가와 같은 직업의 이름으로 그런 활동을 분류하듯 우리가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에 노동은 꽤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도 사진 속 인물들에서 자꾸 ‘장애인’이 보이는 것은, ‘장애’와 ‘노동’을 이질적으로 느끼게 하는 오랜 습속 탓이다. 일-‘할 수 없는(dis-abled)’ 몸으로 간주되어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어 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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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우리의 대안을 조직하자 봄이 오고 있을까? 반도체 시장에 봄이 온다는 기사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윤석열 대통령 말마따나 반도체는 “우리의 생활이고, 안보고, 산업경제 그 자체”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모든 나라에서 그렇다 보니 불확실성도 점점 커진다. 누구도 봄을 자신 있게 전망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질문은 다음에 있다. 반도체 시장에 봄이 오면 우리 삶에도 봄이 오나. 연말 윤 대통령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고용률이 높고 실업률이 낮다”는 성과를 내세웠다. 하지만 늘어난 취업자 수 분포를 보면 이런 모습이다. 음식점에서 일하는 청년, 돌봄일을 하는 여성, 여기저기 60세 이상 노인. 이들 중 자신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고 마음 놓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임금은 낮고 일은 고된데 갑질도 빈번하다. 그래서 구직 포기 청년이 늘어나니 실업률이 낮다. 다른 한편으로는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앱을 쳐다보느라 봄을 기다릴 시간조차 없다. 일해서 빚 갚을 기회는 점점 사라지는데 빚을 갚아야 하니 닥치는 대로 일해야 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