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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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민주당의 성평등 DNA 1987년 겨울, TV에서 대통령 후보의 연설 장면을 보다가 충격을 받은, 어린 내가 있었다. 김대중 후보가 “남녀차별을 없애겠다”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잠시 멍했다. 없애야 하고 없앨 수 있다고? 그걸 하자고? 아빠는 돈 벌고 엄마는 ‘집안일’ 하는 세계를 질문하기까지 시간이 더 걸렸지만 새로운 세계를 만난 듯한 짧은 순간은 잊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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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압도적 승리를 위하여 ‘압도적 정권교체’라는 말이 민주주의를 압도하고 있다. 표를 더 달라는 말이야 어느 정당이나 한다. 이왕 당선될 거라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고 싶다는 기대에 잘못은 없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의 압도적 승리가 민주주의의 압도적 승리일 것처럼 말하면 곤란하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계엄까지 겪었으니 압도적 안정감을 기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 숨은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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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파면 결정에 담긴 실마리 넉 달 걸려 ‘윤석열 파면’을 맞았는데 기쁨의 유효기간이 나흘도 가지 않았다. 헌법재판관 임명을 거부하던 한덕수 권한대행은 대통령 몫의 헌법재판관 지명을 감행했다. 지명된 이들의 면면도 놀랍다. 헌재 결정을 무를 수 없으니 헌재에 얼룩이라도 묻히겠다는 심산인가. “망국의 원흉 반국가 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다던 계엄 선포 담화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취를 부정하는 세력들과 맞서 싸워야 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김문수의 대선 후보 출마 선언이 이어받았다. 윤석열의 대장놀이는 유효기간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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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윤석열 파면과 민주주의 사이 윤석열 구속은 취소되고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기일은 확인되지 않는 일주일을 보냈다. 다수가 예상하던 탄핵 인용이 뒤집혀 기각될 수 있다는 합리적인 추론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체감상으로는 가장 길고 불안한 일주일이었다. 구속 취소 결정이 없었다면 그저 조금 긴 일주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책임한 법원과 노골적 편들기에 나선 검찰의 합작품으로 윤석열이 석방되자 또 무슨 기괴한 논리가 등장할까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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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든든한 연대, 단단한 민주주의 지난주 재난인권교육을 주제로 하는 토론회가 있었다. ‘재난’은 오래 쌓인 문제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시간이다. 어쩔 수 없었다거나 몇몇 문제만 교정하면 된다는 말들은 결국 ‘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탄식을 반복하게 만든다. 토론이 가벼울 수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게도 영혼이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윤석열을 생각하지 않는 두 시간, 탄핵 가결 이후 두 달 남짓 누려보지 못한 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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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내란성 불면의 밤을 지나며 잡혀갔나? 잠 못 드는 밤이 이어졌다. 눈 뜨고 못 볼 일은 늘어났다. 윤석열 체포를 막겠다며 ‘방탄의원단’이 관저로 모이고 경호처는 철조망, 쇠사슬로 저지선을 만들었다. ‘반공청년단’과 ‘백골단’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윤석열 방어권 보장 촉구’를 긴급 안건으로 상정했다. 내란범 체포가 지지부진하자 내전이 번지는 모양새다. 내란의 수괴는 윤석열이라면 내전의 야전사령관은 전광훈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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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강태완과 윤석열 강태완의 추모제에 가려 했다. 11월8일 특장차와 중장비 사이에 끼어 숨진 32세 노동자. 그는 몽골 태생이지만 한국에서 자라 몽골어를 못하는, 한국말을 너무 잘했으나 한국인은 아닌 사람이었다. ‘미등록’인 그의 꿈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꿈을 위해 그는 제도가 부과한 도전을 수행했다. 말이 안 통하는 몽골로 자진출국했고, 입시를 준비해 한국의 대학에 입학했고, 인구소멸 지역에 살면 거주 비자가 나온다길래 김제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올해 6월 거주는 허락받았으나, 생명까지는 허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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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대통령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나의 대통령 퇴진 구호는 ‘김영삼’에서 시작됐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정리해고 반대 투쟁 폭력 진압, 이라크전쟁 파병과 비정규악법 통과,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와 백남기 농민 사망… 이유도 방향도 분명했다. 대통령을 바꾸자는 구호이기보다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였으므로 그것은 급진적 민주주의의 요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익숙했던 퇴진 구호에 이물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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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우리, 팔레스타인 “미국이 원자폭탄 터뜨려서 해방시켜줬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은 해방됐을지 몰라도 우리 원폭 피해자는 해방이 됐습니까.” 몇달 전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 말이 잊히지 않았다. 내게 해방은 1945년에 있었던, 지나간 사건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아직 닿지 못한 역사였다. 해방을 너무 쉽게 말해왔음을 반성했다. 가자지구 집단학살 1년을 앞두고 열린 집회 제목은 ‘우리는 팔레스타인 해방의 연대자’였다.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을 모르고 해방의 연대자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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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딥페이크, 깊은 속임수 찍히는 사람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작고 성능이 좋은 캠코더나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이미지로 사람을 속이는 프로그램이 개발된 사실은 대체로 여성의 권리가 침해되는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법은 기술의 ‘악용’을 막으려 했지만 늘 한발 늦었다. 이제 누구나 손쉽게 성착취물을 만들 수 있게 된 현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이 기술을 훌쩍 넘어선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동의했든 하지 않았든 스스로 찍었든 남이 찍었든, 여성의 이미지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수단이 되는, 사회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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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에어컨으로 시험에 든 기분이라면 에어컨으로 시험에 드는 기분, 나만 느끼는 건 아닐 듯하다. 틀어놓으면 죄짓는 기분, 틀지 않으면 자학하는 기분. 기후위기로 여름은 더 무더워지고 냉방은 더욱 필수적인 것이 되는데 그렇게 전기를 쓸수록 기후위기는 더 심각해진다니 고약한 시험이다. 그런데 이건 시험의 일부일 뿐이다. 지난주, 에어컨 설치 아르바이트를 하던 20대 노동자가 온열질환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가 작업한 공간은 중학교 급식실이었다. 누군가에게 밥을 먹이려 일하던 누군가는 더위를 견디며 밥을 짓고, 누군가를 시원하게 해주려고 일하던 누군가는 더위에 쓰러졌다. 그날, 13일은 전력수요가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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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참사는 리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불은 리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참사는 리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위험물을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대피할 통로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작업장이 있었고,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라는 듯 사람을 ‘쓰면서’ 정작 위험할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은 기업이 있었다. 리튬에는 책임이 없다. 그런데 아리셀 참사 이후 정부의 재발방지대책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