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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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새봄은 어떻게 오는가 아이가 좋아하던 반찬을 말하며 웃던 엄마가 아이가 좋아하던 샴푸 냄새를 말하며 울기 시작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2014년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을 맡은 동안 나는 마음을 단단히 여미리라 다짐했다. 공감과 이해가 섣부를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실용적이었다. 같이 슬퍼할 겨를이 없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손과 머리를 보태자. 국회 농성 중 유가족 몇 분이 삭발이라도 해야겠다고 할 때 말린 것도 같은 이유다. 2015년 4월의 첫날에는 말릴 수 없었다. 정부의 보도자료와 함께 ‘희생자 1인당 평균 얼마’류의 기사가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었다. 내가 이미 모욕감과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청와대까지 행진해야겠다는 집념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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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의료 공백, 권리의 공백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호흡곤란 증상을 보였다. 병원은 신생아 집중 치료를 위한 장비가 없다며 두 시간 거리의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밤길을 달려가 닿은 병원은 미리 확인도 없이 찾아왔느냐며 입원을 거부했다. 또 다른 병원을 찾아갔지만 자리가 없었다. 두 번째 병원으로 돌아가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확인서가 필요하다며 돌려보냈다. 자리가 없다는 확인을 받으러 세 번째 병원을 갔지만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하라는 말만 했다. 그사이 아기의 심장은 멎었다. 태어나 하루도 채우지 못하고, 구급차 안에서. 2005년 터키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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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김진숙만 빼고, 세월호만 빼고 부산에서 걷기 시작한 여성노동자 김진숙이 청와대에 닿는 날이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로 삭발을 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보였다. 세월호 활동에서 멀어진 지 좀 됐지만 2014년 같이 살다시피 하며 함께 싸운 동지들이라 늘 애틋하다. 인사를 나누며 안식년이 끝난다고 했더니 한 아빠가 넌지시 웃으며 말했다. “다시 활동해야지.” 나도 능청을 떨며 답했다. “그래야죠! 세월호만 빼고.”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아차 싶었다.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 도로를 막아선 경찰을 보며 두 날의 기억이 엇갈리던 참이었다. 2014년 5월8일 대통령을 만나야겠다며 청와대를 향해 걷던 유가족이 밤을 지새운 자리였다. 국정조사와 감사, 수사가 권력 앞에서 멈출 때마다 그 자리에 벽이 세워졌다. 2016년 12월3일, 그 벽을 무너뜨렸다.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사람들과 함께 유가족이 앞장서 걸었다. 벽을 기억하며 흘리는 눈물이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다시 그 자리였다. 함께 시대를 넘어섰다는 착각은 달지도 않았는데, 뱉으려니 쓰렸다. “36년째 해고자”라는 김진숙의 시간이 아득해지며 또 다른날이 떠올랐다. 2017년 3월10일 박근혜는 파면됐으나 ‘세월호만 빼고’였다. 농담으로 할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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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착한 임대인’만 기다리게 하지 마라 8년 전 이야기다. 친구들과 같이 살기로 하고 발품을 어지간히 팔았다. 전세를 알아봤지만 결국 40만원 월세를 끼고 계약을 하게 됐다. 예정에 없던 부담이 생겼지만 집을 잘 구했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2년이 다가오면서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는 ‘묵시적 갱신’이 이루어진 것을 자축했다. 집도 좋고, 집주인도 좋으니, 우리 운도 좋다며. 월세를 보내는 날쯤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앞으로는 50만원을 보내달라고 했다. “네? 따로 연락 없으셔서 이전 계약대로 계속 산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래요? 그런데 처음에 너무 적게 받았어. 이번에 10만원은 올려야겠는데?” 친구들과 회의를 했다. “안 낸다고 버티다가 2년 후에 나가야 하면 어떡해?” 억울했지만, 우리는 법을 운운하지 않기로 했다. 인정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5만원의 은총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