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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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대통령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나의 대통령 퇴진 구호는 ‘김영삼’에서 시작됐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정리해고 반대 투쟁 폭력 진압, 이라크전쟁 파병과 비정규악법 통과,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와 백남기 농민 사망… 이유도 방향도 분명했다. 대통령을 바꾸자는 구호이기보다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였으므로 그것은 급진적 민주주의의 요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익숙했던 퇴진 구호에 이물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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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우리, 팔레스타인 “미국이 원자폭탄 터뜨려서 해방시켜줬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은 해방됐을지 몰라도 우리 원폭 피해자는 해방이 됐습니까.” 몇달 전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 말이 잊히지 않았다. 내게 해방은 1945년에 있었던, 지나간 사건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아직 닿지 못한 역사였다. 해방을 너무 쉽게 말해왔음을 반성했다. 가자지구 집단학살 1년을 앞두고 열린 집회 제목은 ‘우리는 팔레스타인 해방의 연대자’였다.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을 모르고 해방의 연대자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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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딥페이크, 깊은 속임수 찍히는 사람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작고 성능이 좋은 캠코더나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이미지로 사람을 속이는 프로그램이 개발된 사실은 대체로 여성의 권리가 침해되는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법은 기술의 ‘악용’을 막으려 했지만 늘 한발 늦었다. 이제 누구나 손쉽게 성착취물을 만들 수 있게 된 현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이 기술을 훌쩍 넘어선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동의했든 하지 않았든 스스로 찍었든 남이 찍었든, 여성의 이미지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수단이 되는, 사회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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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에어컨으로 시험에 든 기분이라면 에어컨으로 시험에 드는 기분, 나만 느끼는 건 아닐 듯하다. 틀어놓으면 죄짓는 기분, 틀지 않으면 자학하는 기분. 기후위기로 여름은 더 무더워지고 냉방은 더욱 필수적인 것이 되는데 그렇게 전기를 쓸수록 기후위기는 더 심각해진다니 고약한 시험이다. 그런데 이건 시험의 일부일 뿐이다. 지난주, 에어컨 설치 아르바이트를 하던 20대 노동자가 온열질환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가 작업한 공간은 중학교 급식실이었다. 누군가에게 밥을 먹이려 일하던 누군가는 더위를 견디며 밥을 짓고, 누군가를 시원하게 해주려고 일하던 누군가는 더위에 쓰러졌다. 그날, 13일은 전력수요가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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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참사는 리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불은 리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참사는 리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위험물을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대피할 통로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작업장이 있었고,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라는 듯 사람을 ‘쓰면서’ 정작 위험할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은 기업이 있었다. 리튬에는 책임이 없다. 그런데 아리셀 참사 이후 정부의 재발방지대책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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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판단하지 않는 자들이 만드는 재난 작년 7월은 비가 무섭고도 질기게 쏟아졌다. 월 강수량은 기상청 관측 이래 두 번째로 많았다. 7월15일은, 충북 오송 지하차도가 물에 잠겨 14명, 경북 예천 산사태로 12명이 사망하는 등 희생자가 30명이 넘었다. 이런 기억은 기후위기 시대에 재난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느끼게 한다. 하지만 재해가 늘어난다고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이 따라 늘지는 않는다. 올해 4월 대만을 강타한 지진의 결과에서 볼 수 있듯 재난에 대비하고 대응하는 국가의 역량이 재난의 양상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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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밀양, 고마운 초대장 “무조건 밀어!” 경찰 간부의 명령이 들려왔다. 방패를 든 경찰들이 산 중턱에서 주민을 밀어내며 순식간에 길을 냈다. 한전 직원들이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송전탑 공사 현장으로 들어갔다. 산길이 되었던 경찰들은 다시 공사 현장의 울타리가 되었다. 인권침해감시단으로 현장에 있던 내가 경찰에 채인 것도 찰나였다. 2013년 10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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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이 폐허를 응시하자 숫자만 남았다. 거슬러가면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으로 드러난 필수의료·지역의료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사회적 관심사였다. 언젠가부터 의사 수가 얼마나 부족한지, 어떻게 늘릴 것인지로 관심이 옮겨가다가 이제는 내년도 의대 입학 정원이 몇명일지만 남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풀기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의사가 부족하다는 근거로 곧잘 인용되는 OECD 비교를 보면 한국은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객관적 건강 지표는 우수한데 주관적 건강 인식이 매우 낮다. 의사는 적은 편인데 병원과 병상과 장비는 매우 많다. 1인당 외래 진료 횟수나 입원일수는 평균의 두 배를 넘는다. 한국 사람들이 두 배나 더 아플 리 없는데 말이다. 동시에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각한 불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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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기억은 동사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은 기억할 말들을 만날 때 단단해진다.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다가올수록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내가 몇년째 엇비슷한 말들에 멈춰 있음을 깨달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이 앞장서고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서 밀어가며 만들어온 시간을 떠올리면 지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느낌이다. 조금 낯설고 많이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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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우리, 정치할래요? 친척 어른들이 “나중에 정치할 거냐”고 묻곤 했다. 예상되던 직업과 동떨어진, 인권운동이라는 것을 한다길래 궁금하셨을 게다. ‘운동권’이 ‘정치권’에 들어가는 일이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던 시절이다. 나는 변명이라도 하듯 손사래를 쳤다. 정치가 아니라 운동을 계속할 거라고. 시간이 흘러 나는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작년 가을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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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나에게 노동이란 누구는 노래를 했고 누구는 악기를 연주했다. 피켓을 들고 캠페인을 하는 사람도,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생 그래프를 그리느라 진지한 사람, 혓바닥을 이용해 컴퓨터에 스토리를 입력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진집 제목은 <이것도 노동이다>. 말하고 싶은 바가 선명하다. 그것도 노동이라고 맞장구치기는 어렵지 않다. 무언가 해내는 인간의 보편적 활동을 우리는 노동이라 불러왔다. 가수, 연주자, 감독, 작가와 같은 직업의 이름으로 그런 활동을 분류하듯 우리가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에 노동은 꽤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도 사진 속 인물들에서 자꾸 ‘장애인’이 보이는 것은, ‘장애’와 ‘노동’을 이질적으로 느끼게 하는 오랜 습속 탓이다. 일-‘할 수 없는(dis-abled)’ 몸으로 간주되어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어 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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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우리의 대안을 조직하자 봄이 오고 있을까? 반도체 시장에 봄이 온다는 기사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윤석열 대통령 말마따나 반도체는 “우리의 생활이고, 안보고, 산업경제 그 자체”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모든 나라에서 그렇다 보니 불확실성도 점점 커진다. 누구도 봄을 자신 있게 전망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질문은 다음에 있다. 반도체 시장에 봄이 오면 우리 삶에도 봄이 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