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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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전세라는 사기 몇년 전 지인이 전세사기를 당했다. 마주칠 때마다 타들어가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고생스러웠지만 소송으로 전세금을 찾아 다행, 하필 이상한 사람한테 걸려 운도 없다고만 생각했다. 전세사기 피해 사례가 쏟아져나오는 요즘, 거꾸로였음을 깨달았다. 이사 나오는 날이면 꼬박꼬박 전세금이 통장에 들어왔던 내가 지독히 운이 좋았다. 전세는 돈을 빌려주고 집을 빌리는 계약이다. 임대인은 이자 없이 돈을 빌리고 세입자는 임대료 없이 거주하니 그럴싸하다. 그러나 채무자가 언제나 갑이다. 집이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못 하나 박는 것까지 참견할 수 있었고, 전세금을 올리든 월세로 바꾸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어렵다 하면 내보내면 그만이었다. 세입자는 내보내도 문제인데 못 나가도 문제였다. 다음 세입자를 구해놓고 나가라거나 법대로 하라거나, 채무자가 오히려 큰소리쳤다. 집에 발이 묶이거나, 복잡한 절차를 밟아 이사를 나가거나, 까딱 전세금을 잃게 되면 집을 잘못 구한 자기를 책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입자는 돈을 빌려준 채권자가 아니라 존엄을 저당 잡힌 세입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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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기후부정의에 대한 청구서 정부가 2분기 공공요금 인상을 유보했다. 한숨 돌렸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다. 한전과 가스공사 적자를 들먹이며 이내 인상된 고지서를 보낼 것이다. 적자 구조에 대한 근본적 분석과 대안은 없고, 범국민 에너지 절약 운동 같은 걸 또 내놓을 것이다. 많이 쓰고 덜 내는 게 문제라는 듯 말이다. 그런데 이게 기후위기와 맞물려있는 문제라 마음이 또 편치 않다. 탄소 배출을 줄이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경로는 화석연료를 태우는 에너지 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화석연료 대신 재생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만으로 달성될 수 없다. 에너지가 무한한 듯 쓰고 버리기를 반복하던 삶의 양식도 바꿔야 한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요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그래서 나온다. 다른 국가들에 비해 한국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매우 싼 편이다. 한 국가의 전기사용량을 인구수로 나눈 1인당 전기사용량을 비교하면 한국은 세계 3위다. 익숙한 시장 논리로 두 가지 사실을 연결하면 ‘싸니까 많이 쓴다’는 결론이 굳어지고 ‘덜 쓰려면 요금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고지서에 찍힌 요금만 걱정하는 게 무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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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불똥에 대하여 “불똥은 면하겠습니다. ㅎㅎㅎ” 경찰청 경비국에서 일하는 A는 기분이 좋았다. 이틀 전 이태원 압사 사고의 불똥이 경비국으로 튀면 어쩌나 걱정하던 중이었다. 어제 행정안전부 장관에 이어 오늘 대통령실까지 경찰이 선제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기자들에게 말해줬다. 이게 다 자기가 “공직과 장관실에 전달한 결과”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던 서울청 정보부장 B도 흐뭇했다. 어제부터 대응 논리를 만들어 경찰청 정보국으로 전달한 효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력배치가 미흡했다는 시각으로 흐르면 대통령실 이전까지 문제가 번질 텐데 자치단체 책임이 부각되도록 수사 드라이브를 걸어야지. 오늘은 경비국 후배들에게 “경찰은 안전확보의 1차 책임자가 아니”라며 “행사에 경찰이 안전유지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관행을 깨”야 한다는 메시지도 보내뒀다. 그 시각에도 이태원 참사 부상자가 사망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릿속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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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이상민은 꺼져주세요 10·29 이태원 참사는 핼러윈데이를 맞아 이태원을 찾은 시민들이 인파에 떠밀리다 압사당한 사건이 아니다. 압사의 위험을 대비하지 못한 국가가 구조 신호마저 무시하다가 수습에 실패한 사건이다. 생명권 보호에 실패한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국가 책임’은 너무 추상적인 말이라 누구더러 어쩌라는 것인지 모호하다. 책임지는 국가를 아직 만나보지 못한 우리의 현재다. 국가는 재난참사로부터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예방과 대비, 대응과 수습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진상규명은 시스템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평가의 방향이 중요하다. 재난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구체적 순간들에는 구체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수사는 이들의 과실을 따지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현장에서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다면, 우리의 생명은 어떤 공무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권리가 아니며, 시스템이 없다는 말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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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돼지머리와 무정차 대구 대현동 이슬람 사원을 짓는 골목에 놓인 돼지머리 사진을 봤다. 때를 놓쳐 쓰지 못했지만 말을 잃어 쓰지 못하기도 했다. 사원 증축을 둘러싼 갈등은 꾸준히 접하고 있었다. 경북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무슬림 유학생들이 십시일반 모금으로 비좁은 기도실의 증축을 계획했고 2020년 9월 건축허가를 받았다. 2021년 2월 인근 주민들이 민원을 넣으러 구청에 찾아간 날, 구청은 즉시 공사를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느닷없는 통보에 이어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현수막과 팻말이 골목에 들어섰다. 대화로 잘 풀어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놓지 않고 혹시나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까 봐 인터뷰도 사양하던 무슬림 유학생들은 7월 법원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해를 넘겨 작년 9월 대법원이 공사중지 처분을 취소시켰다. 돼지머리는 한 달쯤 지나 골목에 등장했다.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동물을 보여주는 의도는 명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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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신묘한 말 안전하게 일하고 싶다는 소망이 재난인가.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이 ‘사회적 재난’이라며 중대본을 꾸렸다. 정부의 사고회로를 도통 알 수가 없다. 화주업체 재산의 안전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안전운임제는 화물노동자를 포함한 모두의 안전을 위해 정부가 먼저 확대해야 할 제도다. 화물노동자가 화물을 실어나르는 덕분에 돈을 버는 화주업체가 마땅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도 정부의 역할이다. 모든 게 거꾸로다. 정부는 ‘불법파업’으로부터 ‘법과 원칙’을 지키는 역할을 자청했다. 화물연대 파업을 ‘불법과 범죄’로 만들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모로 가도 불법이기만 하면 된다는 듯 이유가 계속 바뀐다. 화물기사는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이므로 파업할 권리가 없어 불법, 개인사업자는 영업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업무개시명령을 거부하면 불법, 사업자가 부당하게 담합하여 공동으로 행위하였으므로 불법. ‘불법파업’은 신묘한 힘을 가진 말이다. 파업이 불법인가 합법인가 따지다 보면 노동자가 파업까지 하게 된 이유는 사라져버린다. 되풀이해 듣다 보면 파업 자체가 불법인 듯 홀리게 된다. 파업은 경제적 손실을 입히니 불법적이고, 제한된 경우에만 허용된다고 많은 이들이 오해한다. ‘불법파업’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후일 법원이 어떤 판단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파업 자체가 불온한 것이 되는 순간 승리하기 때문이다. 불법파업의 반대말은 합법파업이 아니다. 파업할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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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사과가 사과인 세계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에 관해 공개 사과를 했다고 한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 “너무나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과받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8년 전 기억이 떠오를 뿐이다. 당시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께서 겪으신 고통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최종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했다. 사과와 책임은 면책의 동의어였고 탄압의 계고장이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보고서를 읽던 중이라 더욱 그랬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시간을 복기하며 괴롭던 때였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주요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데 실패해왔다. 동시에 사법적 책임 묻기의 한계도 알게 됐다. 한계를 넘어설 방법은 아직 모르겠는데 정치적 책임 묻기는 벌써 실패했다. 박근혜는 파면되어야 하나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반하지는 않았다는 결정으로. 그는 “최종 책임”을 졌을지 모르나 참사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았다. 피해자도 우리도 사과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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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기어이 동행하자시면 동행을 제안할 때는 보통 어디로 어떻게 갈 계획인지를 설명한다. 함께 가기를 기대하는 이유도 붙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은 동행 제안은 꽤나 무례하고 때론 폭력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약자와의 동행’은 어떤가. 그의 말에는 ‘약자’가 자주 등장한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일관된 모습이다. “공정과 상식의 이름으로 진짜 약자를 도와야 합니다.”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 그는 국민의힘 선대위 산하 ‘약자와의 동행 위원회’ 위원장을 직접 맡기도 했다. 취임 후 뜸하다 싶더니 취임 100일 전후로 ‘약자’가 다시 불려 나오기 시작했다. 발달장애인 복지관, 다문화가족 지원센터, 독거노인 가정, 자립준비청년 생활시설 등을 방문하는 행보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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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기후정의행진, 그들이 온다 괜찮지 않은 것들은 예전부터 괜찮지 않았다. 폭우로 침수되기 전에도 반지하는 거주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했다. 폭염이 아니더라도 홈리스에게 여름은 혹독하게 더웠고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식량 위기를 거론하기 전에도 먹을거리 구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고, 흉작이라 걱정, 풍작이라도 걱정인 농민들 사정도 오래됐다. 사람답게 살 권리보다 시장답게 처분할 당위가 앞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누군가는 이미 괜찮지 않았다. 기후위기는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세계로 우리를 데려갈 것 같은 불안을 안긴다. 그런 세계는 없다. 다르게 겪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농민과 노동자의 비참이 무시됐기에 자연을 끊임없이 캐고 쓰고 버리는 구조도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돌보고 키우고 살리는 일이 여성에게 떠넘겨져, 사람마저 쓰고 버리는 구조가 어찌됐든 굴러갔다. 원주민과 비-백인은 비-인간화되면서 더 쉽게 착취당했고 비인간 동식물은 비인간이라서 더 죽임을 당했다. 누군가 겪는 삶의 위기는 지워지고 자본의 위기가 그들에게 떠넘겨졌다. 그렇게 위기를 떠넘겨온 세계가 기후위기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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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아래쪽의 재난 아래쪽 집들이 물에 잠기기 시작하는 걸 보며 대통령은 퇴근했다. 재난은 아래쪽의 문제였을 뿐이다. 침수로 사람이 목숨을 잃은 집 앞에서 반지하 방을 내려다보던 사진만큼 솔직한 고백이 있을까. 그는 아래쪽의 재난을 구경하는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폭우와 함께 재난불평등이 드러나고 있다. 가난할수록 재해에 더 잦게 노출되고 더 크게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은 새롭지 않다. 장애인, 아동, 노인 등 재난에서 더 취약한 집단이 있다는 사실도 재난 대응 정책의 서두에 곧잘 언급된다. 이번에는 반지하가 주목을 받았다. 그 도시의 시장은 반지하 주택을 없애나가겠다고 했다. 그 나라의 장관은 “그분들은 어디로 가나” 물으며 반지하 거주민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아무도 아래쪽 사람들에게 묻지 않았고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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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좁은 철창을 간신히 삐져나온 목소리가 숨막히게 더운 공기를 뚫고 전해졌다. 이대로 살지 않겠다는 선언인 듯 이대로 살지 말자는 제안인 듯 육중하다.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파업 중인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노동자들의 목소리다. 부지회장 유최안이 22년 경력의 용접기술로 자신을 가두고, 여섯 명의 노동자가 탱크 탑 구조물에 올라 고공농성을 한 지도 한 달이 되어간다. 14일부터는 산업은행 앞에서 세 명의 노동자가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어떤 선언이고 어떤 제안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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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아프면 쉴, 권리가 되려면 단식투쟁을 마치고 쉬는 중이다. 때 되면 먹고, 낮에는 걷고 밤에는 잔다. 휴가제도라면 남부럽지 않았는데, 이렇게 잘 쉬는 기분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일상을 거들어주는 누군가가 있고, 주위 모두가 회복을 응원한다는 점이 쉼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쉬고 나면 복귀할 자리가 있고 쉬는 동안 소득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은 쉼의 시작일 뿐이었다. ‘아프면 쉴 권리’는 코로나19를 겪으며 사회적 화두가 되었다. 시민사회가 1995년부터 과제로 제시한 상병수당이 2020년 7월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에 포함되었고 오는 7월 시범사업을 앞두고 있다. 상병수당은 일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다쳐서 쉬어야 할 때 소득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감염병의 속성상 ‘아픈 사람이 쉬어야 나/우리가 안전하다’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쉬게 하려면 급여를 지원해야 한다는 자명한 결론에 닿았다. 그러나 감각의 절반은 감염인 격리 필요에서 나오기도 했으므로 저절로 권리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보건복지부는 ‘아프면 쉴 권리’의 중요성을 “증상이 있음에도 쉬지 못하고 출근해 집단감염으로 확산된 사례”로 설명한다. 아파도 출근해야 했던 그 노동자에게는 무슨 사정이 있었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