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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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노란봉투법’을 위한 기도 “역사는 두 번 반복한다. 처음엔 비극으로, 다음엔 희극으로.” 사회혼란 속에 나폴레옹의 조카가 나폴레옹을 흉내 내 황제에 오르자 카를 마르크스가 한 유명한 말이다. ‘노란봉투법’이란 노동개혁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이 말이 떠올랐다. 비극은 1989년에 일어났다. 1980년 전두환은 광주학살 뒤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라는 위헌적 조직을 통해 반민주적인 유신 노동법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만든 노동악법을 만들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노동자대투쟁이 터져 나왔고, 여소야대의 국회는 1989년 반민주적 요소를 일부 완화한 노동법을 통과시켰다. 노태우는 거부권을 행사했고 노동개혁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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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정당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한국정치사에서 재평가해야 할 정치인이 있다면? 여럿 있지만, 그중 한명이 1960~1970년대 야당 지도자 유진산이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온건투쟁 노선을 주장해 요즘 용어로 ‘수박’에 해당하는 ‘사쿠라’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그는 당대표였던 1970년대 초 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김대중·김영삼이라는 40대 소장파가 들고나온 ‘40대 기수론’을 수용, 세대교체를 주도했다. 그 덕분에 양김이라는 두 명의 걸출한 정치인이 성장할 수 있었다. 역설적인 것은 정작 양김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지역주의에 기초해 정당민주주의를 후퇴시켜 정당을 사당화하고 세대교체를 막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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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양회동, 윤석열, 김남국, 심상정 “20살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고, 40살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자라면 머리가 없는 것이다.” 나이 듦에 대해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고 있다. 항상은 아니지만, 종종 이 땅에서 최소한 세 가지만이라도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최소주의적’ 생각을 한다. ‘고문’ ‘산업재해 사망’ ‘열사’가 그것이다. 반인류적 범죄인 고문은 이 땅에선 사라진 것 같다. 먹고살기 위해 출근했다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를 ‘자랑’하는 산재사망은 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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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윤석열의 비극?’ ‘10년 같은 1년.’ 윤석열 정부 출범 1년을 맞아 드는 생각이다. 정말 지난 1년은 길었다.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윤 대통령은 2년 전 정치에 입문하며 “보수와 중도, (문재인 정부에서) 이탈한 진보세력까지 아우르는” 정치와 “존엄한 삶에 필요한 경제적 기초와 교육의 기회가 보장되고 승자 독식이 아닌 민주주의”를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국민통합’과 ‘진보적 민주주의’는 지난 1년 동안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극우주의, 그것도 오랫동안 정치권에서 연마된, 뿌리와 관록을 가진 ‘세련된 극우’가 아니라 정치초년생의 ‘선무당’ 같은 조야한 ‘극우적 독선’만이 난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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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서울은 불타고 있는데… “로마는 불타고 있는데, 네로는 비파나 켜고 있다.” 1970년대 초 세계적인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가 당시 부상하고 있었던 ‘새로운 정치학’에 대해 한 말이다. 1960년대 말부터 세계는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지속된 전후 세계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끝나고 경제위기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 파리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번져간 청년세대의 탈권위주의 68혁명, 미국에서 시작된 반전운동 등 격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학자들은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처방’을 정치학의 중심과제라고 생각했던 그동안의 ‘규범적 정치학’을 ‘과학’과 거리가 먼 ‘낡은 윤리학’이라고 비판하며 쓰레기통에 버렸다. 대신 과학의 전제조건인 ‘가치중립’이란 이름 아래 불타는 세계를 외면한 채 통계학 등 자연과학적 연구수단에 기초한 정치실험에 몰두했다. 정치학자들의 이 같은 모습이 로마는 불타고 있는데 이를 보며 비파를 켜면서 노래를 부른 네로를 닮았다는 통렬한 비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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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철인왕 윤석열의 위험한 순교자주의 굴욕적 한·일 정상회담으로 여론이 싸늘하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한·일관계 개선은 여론과 관계없이 옳은 일이고 꼭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므로 여론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일본인의 마음을 여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자랑한다. 이완용이 나라를 바치고 일본인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했다고 자화자찬하는 꼴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이미 “지지율이 10%로 떨어져도 한·일관계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뉴스를 보자 떠오른 것이 2007년 마치 ‘순교자’처럼 노무현 정부라는 ‘친북좌파’에 의해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일념에서 대선에 출마한다는 박근혜(당시 의원)의 선언을 듣고 썼던 글이다. “순교자주의란 여론 등과 상관없이 자신이 옳은 일을 위해 순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종교인에게는 중요한 덕목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인의 경우 민주화투쟁 등에 있어서 필요할 때도 있지만 민심에 반하고 틀린 것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 무데뽀로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성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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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김건희 특검과 배신의 정치 ‘죄수의 딜레마.’ 상대방의 선택을 모르는 상태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론화한 정치이론이다. 한 예로, 같이 학생운동을 한 둘이 잡혀가 조사를 받는데 친구가 뭐라고 진술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진술을 해야 하는 어려움을 말한다. 둘 다 끝까지 잡아떼면 풀려나지만, 친구가 이미 불었는데 나만 잡아떼다가는 괘씸죄로 중형을 피할 수 없다. 친구가 불었다면 나도 부는 것이 현명하다.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경험’이다. 오래 운동을 하다보면, 친구의 성향을 알 수 있다. 그가 의리가 있다면, 나도 불지 않고 버틴다. 그가 쉽게 배신한다면, 나도 부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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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비상시국회의에 바란다 “참가할 거예요?” 며칠 전 오랫동안 사회운동을 같이해온 선후배 몇명이 모여 민주화운동 원로 등이 제안한 윤석열 정부의 ‘검찰독재와 전쟁위기를 막기 위한 비상시국회의’에 대해 논의했다. 의견은 일치했다. ‘검사대통령’의 막무가내식 국정운영, 검찰의 기소권 행사 형평성 등에도 불구하고 ‘검찰독재’는 정치학적으로 아직까지는 과한 표현이지만, 노동탄압, 민주주의 후퇴, 시장만능적 정책과 민생위기, 대통령의 호전적이고 단세포적인 사고와 거친 언술로 인한 ‘남북관계와 외교위기’ 등을 고려할 때 시국회의에 공감한다. 하지만 윤 정부만 비판하는 시국회의로는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촛불 트라우마’ 때문이다. 수많은 국민이 어렵게 쟁취한 촛불항쟁을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다 말아먹고 불과 5년 전 탄핵당했던 세력에 권력을 내줘 소위 ‘검찰독재’ 정권을 탄생시킨 것에 대한 분노와 허탈감 때문에 다시는 비슷한 일이 생겨선 안 된다고 다짐했는데, 이번 일이 그런 것 같다는 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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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유신선거로의 ‘개혁’? 한국정치에는 널리 퍼져 있지만 잘못된 통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박정희 정권 때부터, 특히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결한 1971년 이후, 한국정치가 영남 대 호남의 지역대결이었다는 생각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을 무너트린 것은 광주가 아니라 대구와 같은 영남인 부산·마산(부마항쟁)이었다. 87년 대선 이전에는 선거가 지역대결이 아니었고, 특히 영호남의 대결이 된 것은 90년 3당 통합 이후다. 우리 국회의원선거가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을 뽑는 소선거구제였다는 생각도 비슷한 예다.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중대선거구제(선거구를 크게 만들어 한 선거구에서 2~3명을 뽑는 선거구제)를 우리도 무려 15년이나 실시했었다. 구체적으로, 모든 선거구에서 여당을 당선시키기 위해 1973년 유신과 함께 도입하여 전두환 시대까지 실시했다. 정치학자로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 중 하나는 정치권이 시대착오적이고 문제가 많은 이 선거구제를 심심하면 들고 나온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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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광기의 사회’ 대한민국 “요즈음의 한국 사회를 규정하라면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단연코 ‘반지성의 사회’ ‘증오의 사회’라고 부르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지성적 논의, 합리적 논쟁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한 것은 누구 편, 어느 진영이냐는 편 가르기와 진영논리다. 비극적이지만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더 이상 지성이 아니라 진영논리에 의한 증오다.” 내가 10년 전 이 지면에 썼던 ‘반지성·증오사회’(2013년 6월3일)의 일부이다. 이 글은 이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반지성과 증오가 약화되어 이를 벗어났기 때문인가? 아니다. 반지성과 증오가 ‘광기’의 수준에 이른 ‘광기의 사회’에 달했기 때문이다. ‘광기의 사회’, 2022년 말 우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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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짐이 헌법이다? 헌법은 한 나라의 가치와 규범을 규정한 최고의 법률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헌법을 위정자들이 필요에 따라 헌신짝처럼 짓밟아 왔다. 이 때문에 헌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미국과 달리 헌법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실감하지 못한다. 이승만은 재선이 어렵게 되자 1952년 국회의원들을 체포하는 등 부산정치파동이라는 공포정치를 통해 개헌을 했고 2년 뒤에는 헌법이 금지한 3선을 위해 사사오입개헌을 했다. 박정희도 1969년 3선 개헌을 했고 1972년에는 종신집권을 위해 유신개헌을 했다. 예외적으로, 최고위정자가 ‘헌법을 수호한다’고 나선 것은 두 번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첫 번째는 1974년 1월8일 박정희 정권이 발표한 악명 높은 긴급조치 1호로, 유신헌법 수호에 나선 것이다. “나는 현재의 헌법을 수호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1987년 4월13일 전두환이 발표한 ‘호헌선언’이다. 국민들의 직선제 요구에 대해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는 ‘체육관헌법’을 수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한국현대사가 최고위정자에 의한 ‘헌법유린의 역사’에 다름 아니지만, 예외적으로 최고위정자가 헌법수호를 외치고 나선 두 사례 역시 반민주헌법을 지키겠다는 ‘독재수호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다시 말해, 우리 현대사에서 최고위정자에 의한 헌법수호선언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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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백기완이 그립다 겨울이 문 앞이다. 절기만이 아니라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권에는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무능한 윤석열 정부는 갈수록 극우적 색채를 띠어 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로 허우적대며 방어적 대정부투쟁에 올인하고 있다. 유일한 원내 진보정당으로 창당 10년을 맞은 정의당도 존폐 기로 속에서 재도약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일부에서는 퇴진촛불을 들고 있지만 어렵게 만들어준 촛불항쟁을 더불어민주당이 어떻게 말아먹었는지 잘 보았기에, 많은 국민들은 “한 번 속았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답답한 일이다. 답답한 마음에 ‘민주성지’로 많은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남양주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2년 전 전태일 열사 옆에 차갑게 누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세월이 답답한 만큼, 그의 가르침과 천하를 호령하던 그의 사자후가 그 어느 때보다 그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