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홍
산골 농부
최신기사
-
시선 부치지 않은 편지 “서 시인, 자네나 나나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낮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야간학교 다녔지. 열네 살, 그때부터 지금까지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부지런히 살아온 죄밖에 없잖은가. 그런데 갑자기 내 몸에 무서운 암이 자라고 있다는 의사 선생 말을 듣고는 온몸에 힘이 빠져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네.” 새해 아침, 마치 삶을 다 내려놓은 듯 힘없는 자네 전화를 받고는 앞이 어질어질했다네. 아픔과 절망으로 가득 찬 자네를 떠올리며 이 글을 쓴다네. 자네는 도시에서, 나는 산골에서 이날까지 빠듯한 살림살이에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오직 일밖에 모르고 살았지. 특기와 취미생활이 모두‘일’뿐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말일세. 그러니 몸속에 병이 자라는 줄 어찌 알았겠느냐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58년 개띠 해에 태어난 우리는, 제대로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왔잖은가. 그러니 낭만과 여유는 우리 몫이 아니었지.
-
시선 명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2022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이제 산골 마을 논과 밭은 모두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아이고, 농사일이 오데 끝이 있는가. 고마 죽어삐야 끝나지.” 마을 어르신들이 죽어야 끝난다던 농사일도 잠시 방학이다. 이젠 틈틈이 뒷산에 가서 내년 가을까지 아궁이에 넣을 장작을 하거나 밭두둑에 비닐 대신 쓸 부엽토를 긁어 놓으면 된다. 그리고 장날에 가서 겨울 간식으로 먹을 옥수수와 현미 뻥튀기를 하고, 무를 썰어 겨울 햇볕에 말릴 때이다. 밤이 오면 아내랑 돋보기를 쓰고 벌레 먹거나 쪼그라진 녹두와 팥을 가려내고, 빛깔 좋고 잘생긴 녀석들은 미리 주문한 분들한테 택배로 보내야 한다. 가끔 두더지가 파헤쳐 놓은 마늘밭과 양파밭에 가서 두둑을 꾹꾹 밟아 준다. 그래야만 긴 겨울 내내 뿌리가 얼어 죽지 않는다. 농약과 화학비료와 비닐조차 쓰지 않고 농사지으려니 생각보다 잔손질이 많이 간다. 그래도 겨울철 일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오늘 못하면 내일 해도 그만이라 여유가 있다.
-
시선 가만히 아이들 이름 불러본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11월12일(토), 경남 창원 합포여중 교사 세 분이 학생 스무명을 데리고 ‘문학기행’을 오기로 한 날이다. 아내와 나는 이른 아침부터 손님맞이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산골 마을에 뿌리 내린 지 17년이 지났지만 우리 마을엔 학생이 한 명도 없다. 다른 마을도 거의 마찬가지다. 지구촌 돌림병(코로나19)으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던 도시 학생들과 교사들이 올해부터 가끔씩 찾아오고 있다.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 일인가. 어느덧 오전 9시40분이다. 반가운 손님맞이하느라 지나가던 바람도 잠시 멈추고, 마을 텃새들이 노래를 부르고, 개가 짖고 소가 울어댔다. 드디어 참나무 아래 넓은 쉼터에 버스가 섰다. 학생들이 하나둘 내렸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난 뒤, 한 줄로 서서 광목천으로 눈을 가리고 앞사람 어깨를 두 손으로 살며시 잡고 걸었다. 고달프고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잠시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는 시간이다. 개울을 지나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나 가을걷이 끝난 다랑논으로 가서 논둑에 한 줄로 앉았다. 그리고 광목천을 자기 손으로 천천히 풀고, 다랑논 한쪽에 짚으로 무대를 만들고, 한 사람씩 그 무대에 서서 느낌과 깨달음을 나누었다.
-
시선 딱 한 가지 오랜만에 도시 중학교 진로특강을 하면서 아이들한테 물었다. “요즘 어른들한테 배울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나요?”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대답을 했다. “영어요. 그리고 수학요.” “국어요.” “선생님, 영업도 배울 수 있어요.” “아니 영업이라니요?” “우리 아버지가 자동차 영업 사원인데요. 자동차 많이 팔아서 상도 받았어요.”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교실이 떠나도록 웃었다. “어른들한테 배울 수 있는 게 또 없을까요?” “집이나 땅을 사고팔아서 돈 버는 거요.” “주식 투기하다 망하는 거요.” “아무 데서나 막말하고 시치미 떼고 거짓말하는 거요.” “성적이 떨어지면 윽박지르고 겁주는 거요.” “사람 차별하고 무시하는 거요.”
-
시선 아버지, 요즘 무슨 일 하세요 가끔 도시에 사는 아들 녀석한테 안부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요즘 무슨 일 하세요? 땀 너무 많이 흘리지 마시고 쉬엄쉬엄하세요. 이웃들도 잘 지내시지요?” 내가 만일 도시에 살고 있었다면 아들 녀석이 어찌 이웃들 안부를 묻겠는가. 그리고 농촌을 오직 ‘관광 대상’으로 여겼을지 누가 알겠는가.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불어닥쳤을 때도 참으로 많은 분이 안부를 물어봐 주었다. 집과 농작물은 무사한지, 힘든 일은 없는지, 산골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잘 있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관심을 갖고 물어봐 주었다. 이렇게 위로와 응원이 가득한 안부 전화를 받고 나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고, 없던 힘도 절로 생긴다. 더구나 “요즘 무슨 일 하세요” 하고 물어봐 주는 아들 녀석이 참으로 든든하고 고맙다.
-
시선 아이는 온 마을이 키운다 산골 마을에 서울 손님이 왔다. 3년째 지구촌 돌림병(코로나19)으로 마음 놓고 오가지도 못하다가, 3박4일 겨우 짬을 내고 용기를 내어 왔다. 더구나 서울과 합천은 큰마음 먹어야만 오갈 수 있는 거리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사나흘 전부터 귀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그 손님이 누구냐고? 여섯 살 손자 ‘서로’다. 이름은 ‘로’인데 성을 붙여 그냥 ‘서로’라 부른다. 서로 혼자 온 것은 아니다. 서로 엄마도 같이 왔다. 서로 아빠는 일터에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둘이만 왔다. 서로 엄마는 눈이 불편한, 정확하게 말하자면 1급시각장애인이다. 서로는 엄마 손을 꼭 잡고 서울 마포구 성미산 아래에서 서울역으로, 서울역에서 케이티엑스를 타고 대구역으로, 대구역에서 다시 합천 황매산 자락까지 무사히 왔다. 여섯 살 아이와 눈이 불편한 엄마가 이렇게 먼 거리를! 놀랍기만 하다. 서로 엄마는 서로한테 할머니 할아버지와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 용기를 내어 왔단다. 어찌 고마운 마음이 절로 들지 않으랴.
-
시선 세상이 아프면 우리도 아프다 전화가 왔다. “서정홍 농부님, 저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 소속된 의사입니다. 다가오는 일요일 오전 10시에 찾아뵙고 싶습니다. 인원은 13명입니다.” “어떤 목적으로 의사 선생님들이 산골 마을에 오려고 하는지요?” “농사 일손도 거들고, 농사와 기후변화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무더운 7월이라 땡볕 아래 김매는 일 말고는 할 게 없는데요. 오전 열 시면 농부들도 더워서 일하기 고달픈 시간인데….” “잘할 수 있습니다. 한두 시간이라도 일손을 거들고 난 뒤에 농부님 말씀을 듣고, 같이 점심을 드셨으면 합니다.”
-
시선 그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으니 지난 6월17일은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풀무학교) 강연이 있는 날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강연이 저녁 7시30분부터라 오전은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 해도 농촌 학생들 만나는 일은 거절하지 않고 억지로 짬을 내어서라도 간다. 자라나는 학생들이 있기에 농사지을 맛이 나는데 거절해야 할 까닭이 없다. 그날도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천천히 몸을 풀고 산밭으로 갔다. 몸이 피곤해서 조금 더 누워 있고 싶어도 몸이 저절로 일어난다. “하이고, 이제 당신이나 나나 농사꾼이 다 되어가네요.” 오늘따라 아내가 하는 그 말이 싫지가 않다. 농사지으며 산 지, 고작 17년 지났는데 농사꾼이 다 되어간다니!
-
시선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애들아 전북 진안 진성중학교 아이들아! 지난 5월20일, 두 시간 남짓 너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지. 2~3학년 모두 합쳐 전교생이 아홉 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였지만, 둘레에 산과 들이 있어 참으로 편안하게 보였단다. 자연이 살아 있는 이곳에서 너희들 얼굴에 아침 햇살과 같은 빛나는 기운이 번졌으면 좋겠어. 너희들이 행복해야만 어른들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오늘은 강연 시간에 못다 한 날씨와 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단다. 너희들이 사는 진안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걱정이 많더구나. 내가 사는 합천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산밭에 심어둔 마늘과 양파가 배짝배짝 다 말라죽어 가고 있어. 그래서 유월 초순 무렵에 뽑아야 할 마늘을 요즘 뽑고 있어. 얼마나 땅이 말랐으면 풀도 잘 자라지 않아. 이 모두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탓이래. 어쩌면 좋을까? 옛날처럼 기우제라도 지내야 할까? 도시 사람들은 이런 애달픈 농부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을 거야. 알고 있다 해도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워낙 힘들고 바빠서 걱정할 겨를이 없을 거야.
-
시선 스승님 말씀 이놈들아,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어깨 힘 빼고 살아야 혀. 어깨 힘 들어간 놈치고 인간 같은 놈 하나 없어. 돈깨나 있고 권력을 쥐고 있는 놈들 어깨를 가만히 봐. 장관이고 판검사고 어깨 뻣뻣해지면 볼 장 다 본 게야. 그런 막돼먹은 놈하고는 상종을 하지 말아. 어디로 가든 사이비가 많아. 어떻게 가려내느냐고? 둘레를 자세히 살펴보면 천지삐까리야. 부모 재산 물려받아 일하지 않고도 우쭐우쭐 떵떵거리며 사는 놈 있지. 이런 놈은 부모형제도 이웃도 모르는 망나니야. 사람 안 될 놈이지. 돈 귀한 줄 알아야 사람 귀한 줄 아는 법이거든. 그리고 누굴 만나기만 하면 가르치려 드는 놈 있지. 이런 놈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아. 어디로 가든 잘난 척하고, 고지식한 태도로 상대를 얕잡아 본다 말이야.
-
시선 내년에도 감자 심을 수 있을까 지난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다섯 달 동안이나 비와 눈이 내리지 않아 산골 어르신들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라 곳곳에 산불이 나서 산골에 살던 농부들이 오랫동안 살던 집을 잃고 애간장을 태운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며 한숨을 푹푹 쉬셨다. 해마다 삼월 중순 무렵이면 마을 아지매(할머니)들과 쑥을 뜯어 쑥국을 끓여 나누어 먹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하순 무렵에야 덤불 사이로 겨우 돋아난 쑥을 캐서 쑥국을 끓여 먹었다. 50년 만에 닥친 큰 가뭄이라 밭둑이나 언덕에 쑥이 자라지 않아 다른 해보다 열흘 남짓 늦게야 쑥국 맛을 보았다.
-
시선 문재인 대통령님께 문재인 대통령님, 이렇게 불러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3월9일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뽑힐 테니까요. 그동안 얼마나 애썼는지요? 머리 숙여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남모르게 흘린 눈물이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그동안 못다 한 일을 하나하나 이루시기 바랍니다. 퇴임 후, 경남 양산으로 돌아가면 그동안 바빠서 하지 못한 텃밭농사부터 해 보시렵니까? 조그만 텃밭에 유기농 거름을 넣고 괭이로 땅을 일구어 상추와 부추 씨앗을 뿌려 보시기 바랍니다. 당근, 쑥갓, 케일, 치커리, 양배추, 청경채, 쌈배추를 좋아하시면 같이 뿌려도 좋습니다. 씨앗이 워낙 작아 장갑을 끼지 마시고 맨손으로 뿌려야 합니다. 모래알보다 작은 씨앗을 손바닥에 가만히 올려놓고, 씨앗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