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는 기억할 것이다

서정홍 시인

여름 땡볕이 물러간 9월7일, 모종판에 양파 씨앗을 넣고 미리 만들어 둔 산밭에 나란히 놓았다. 모종판이 땅에 고루고루 닿도록 나무판자를 모종판 위에 놓고 자근자근 밟았다. 그리고 50일 동안 양파 모종판에 물을 주었다. 싹이 나기 전까지는 하루에 두 번씩, 싹이 나고 나면 하루에 한 번씩 물을 주었다. 벼농사든 양파농사든 모종을 잘 키우려면 아기 키우듯이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서정홍 시인

서정홍 시인

어느덧 양파 모종이 쑥쑥 자라 심을 때가 다가왔다. 해마다 양파 모종 심을 때가 다가오면 앞집에 사시는 하동 아지매(할머니)가 먼저 물어보신다. “이 집에는 양파 모종 언제 심을 끼고. 미리 날을 잡아야 한다이.” “10월27일에 심으려고 합니다. 그날 장대 아지매랑 날짜 비워 두이소. 다른 사람보다 며칠 먼저 심으려고 모종도 튼튼하게 잘 키워 두었습니다. 그런데 아지매는 허리 수술하고 나서 몸도 안 좋은데 올해부터는 쉬셔야 합니다. 자녀들도 절대로 일하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자식들한테 일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지. 허리가 아파도 몸 살펴가믄서 천천히 심어볼 테니까 걱정 마래이. 하다가 허리가 아파서 도저히 못하겠다 싶으모 내가 알아서 안 할 테니까.” “여든이 넘었는데 허리가 안 아파도 이젠 쉬셔야 할 나이입니다.” “다들 일하는데 혼자 쉬모 심심하다 아이가. 아무튼 이제 우리 마을에도 일할 사람이 자꾸 줄어들어 걱정이구마. 그라이 이 집에도 어렵게 일꾼 얻어다 농사지을 생각 말고, 둘이서 딱 지을 만큼만 하는 게 마음 편해.” “아지매들과 한 해 며칠이라도 같이 일하다 보면 배우고 깨칠 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지매들이 자꾸 나이가 들고 몸이 아프기 시작하니까 일손 도와달라고 말씀드리기가 여간 미안한 게 아닙니다.”

아내는 양파 심는 날이 잡히면 이삼일 전부터 아지매들이 드실 새참과 점심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마을 아지매들을 볼 때마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 같다는 아내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다. “여보, 새참은 무얼 준비하는 게 좋을까요? 날씨가 쌀쌀하니 따끈따끈한 콩나물국밥이 좋겠지요? 점심때는 오랜만에 당면과 버섯과 채소를 듬뿍 넣은 소고기 전골을 준비할게요. 후식으로 큰 배를 몇 개 사 둘까 해요. 아지매들이 이가 션찮으시니 큰 배를 반으로 잘라 숟가락으로 파서 드실 수 있도록.”

그렇게 그렇게 해서 정해진 날에 양파 모종을 다 심었다. 가을비가 내리지 않아 며칠째 물을 주었다. 물을 줄 때마다 산밭에 연둣빛 양파 모종이 고개를 쑥쑥 들고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내년 6월 초순, 양파를 수확할 때까지 물을 주고 김을 매고 웃거름을 주고 다시 김을 매야 할 것이다. 농약과 화학비료와 비닐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지으니까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부지런해야 할 것이다.

내년 양파를 수확할 때까지 220일 남짓 양파밭에 바람과 구름이 지나가고 단비가 내리고 햇빛이 비치고 밤하늘 별과 달이 뜰 것이다. 두더지와 고라니와 아기다람쥐와 여치들이 친구처럼 찾아올 것이다. 멧돼지도 내려올지 모른다. 밭을 볼 때마다 모종을 심은 하동 아지매와 장대 아지매가 흘린 땀과, 새참과 점심밥을 준비하던 아내의 환한 얼굴도 떠오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모두 다, 양파는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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