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홍
산골 농부
최신기사
-
시선 마지막 유언장 아들아,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 아궁이 땔감을 하면서 문득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먹고 네 어미랑 같이 보건소에 가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다. 아비와 어미도 어느덧 예순 중반을 훌쩍 넘었으니, 지금 떠난다 해도 서운하거나 아쉬울 게 없다. 그러니까 갑자기 아비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심폐소생술을 하거나 119도 부르지 말기 바란다. 그냥 아비가 살던 집에서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게 도와주기 바란다. 그게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 생각한다.
-
시선 허튼소리 농사철이 끝나고 나면 농부들은 골병든 몸을 돌보느라 정형외과로 한의원으로 다니느라 바쁘다. 모두 지구 가열화로 농사짓기가 갈수록 어려워 몸과 마음이 몇배로 고달파서 일어난 일이라 한다. 이런 현상을 ‘기후 재난’이라 한다. 기후 재난은 농부들에게 가장 빠르고 험악하게 다가온다. 오늘 낮에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후배가 명예퇴직을 준비하면서 찾아왔다.
-
시선 농부들은 애간장이 탄다 20년째 살고 있는 작은 흙집 지붕이 삭아 이슬비만 내려도 아내가 걱정을 한다. 어찌 지붕만 삭았겠는가. 싱크대 서랍도 삭고, 창고문도 삭고, 고된 농사일에 무릎과 팔꿈치도 삭고, 설익고 서툰 사람 관계로 마음도 삭아 성한 데가 없다. 서너 해 전부터는 오랜 낫질과 호미질로 손가락 마디마디가 비틀어져 밤마다 아리다. 사람만 늙어 가는 게 아니다. 집도 같이 늙어 간다. 스무 해 전에 흙집을 함께 지은 ‘나무로’ 대표 김도환 목수가 아스팔트싱글 지붕을 살펴보더니, 평생 쓸 수 있는 양철(징크) 지붕으로 바꾸자고 한다. 아내와 나는 공사비를 빌려서라도 바꾸기로 했다. 더 삭으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니까 말이다. 김도환 목수가 20년 전에 흙집을 지을 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
시선 이게 사는 맛이지 싶다 오늘 낮에,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한 지 2년쯤 지난 후배가 찾아왔다. 가난한 부모를 만나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 만드는 공장에서 40년 넘도록 일만 하고 살아온 후배다. 일밖에 모르고 살아왔다는 말이 어울리는 후배다. 왜냐하면 하루라도 지각을 하거나 결근을 하면 마치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처럼 부지런히 살아왔기 때문이다.
-
시선 지구를 살리는 영웅이라고? 이웃 마을의 시를 좋아하는 중학생 우진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시원한 매실차를 마시며 우진이가 물었다. “봄날샘 집엔 농기계가 하나도 없네요? 왜 힘들게 맨날 손으로 농사지으세요? 요즘은 편리하고 빠른 농기계가 많잖아요?” “우진아, 대답을 들으려면 밭으로 가야 하는데 괜찮겠냐? 참, 봄날샘은 농기계가 필요할 때는 빌려 쓴단다.”
-
시선 삶을 빛나게 하는 고마운 친구 마을회관에서 아지매(할머니)들과 ‘몸살림운동’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가끔 마음을 짠하게 하는 말씀이 있다. “아이고, 치매 들기 전에 얼릉 죽어야지.” “그래그래, 아프지 말고 오늘밤에라도 집에서 잠결에 고마 죽으모 얼매나 좋겠노.” “아니,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가.”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뿐이다. “요즘 도시고 농촌이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암이 아니라 치매래요. 그러니까 방에 혼자 있지 말고 산책도 하고 마을회관에 와서 저랑 같이 몸살림운동도 해요.”
-
시선 권정생 선생님께 선생님, 오늘도 지구촌 곳곳에서 지구온난화로 말미암은 자연재해와 전쟁 따위로 숱한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 사시는 나라에는 미움도 원망도 탐욕도 자연재해도 전쟁도 없겠지요? 선생님께서 2005년 5월10일에 쓴 유언장을 다시 읽어 봅니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중략)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
시선 부자가 되면 안 되는 까닭 2 ‘부자’란 재산이 많은 사람이다. 얼마나 재산이 많으면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것은 있다’는 속담까지 있을까?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살기도 아니,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빠듯한 사람이 수두룩한데 말이다. 더구나 요즘 부자는 3년이 아니라 30년, 300년을 일하지 않고도 먹을 것이 남아돈다고 한다. 오늘 아침 TV 뉴스를 보던 마을 어르신이 푸념을 늘어놓으신다. “아이고, 저 썩을 놈은 큰 죄를 짓고 감옥에 가도 무신 걱정이 있겠노.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은행에 넣어둔 이자가 불어난다 안 카나.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다 아이가. 그라이 우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겠노.”
-
시선 부자가 되면 안 되는 까닭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식구회의를 열었다. 영화를 보러 갈 때도, 여행을 갈 때도, 용돈을 올려줄 때도, 옷이나 신발을 살 때도, 학원과 학교를 선택할 때도, 어떤 일이든 식구회의를 열어 결정했다. 지금은 그 아이들이 다 자라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산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식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식구회의를 연다.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도 나눈다. 그리고 서로 덕담을 나누기도 한다.
-
시선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이웃에 사는 농부들과 ‘7일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하기 한 달 전부터 육식을 하지 않고 음식도 조금씩 줄여 나갔다. 3일 전부터는 죽을 먹었고, 단식하는 날부터는 물과 죽염만 먹었다. 먹을 양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단식을 하느냐고? 바쁜 농사철이 되기 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길이 단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시선 봄이 와서 참 좋다 작년 11월부터 지금까지 지구가열화로 날씨가 따뜻하고 비가 많이 내렸다. 이러한 기상 환경이 봄철로 이어지면 작년 늦가을에 심어 둔 양파에 노균병 같은 병이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경상남도농업기술원에선 지금부터 여러 가지 약제(농약)를 바꿔가며 뿌려야 한단다. 한 종류 약제를 뿌리면 그 약제에 내성이 생겨 효과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
시선 밥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따뜻한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을 곳이 없어 애태우다, 2019년에 마을회관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이 봄날 연둣빛 새순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농촌 마을은 몇가구 이상 모여 살면 나라에서 마을회관을 지어 준다. 그런데 마을회관 지을 터는 마을에서 구해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이 마을에 들어오고 13년이 지나도록 그 터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2017년 어느 날, 마을회관 지을 수 있는 터를 하동 할머니가 내어 주셨다. “갈수록 마을 사람들이 나이 들고 몸도 불편한데 함께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며 그냥 내어 주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기쁜지 밥을 먹지 않고도 배가 부르고 잠까지 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