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홍
산골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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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부자가 되면 안 되는 까닭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식구회의를 열었다. 영화를 보러 갈 때도, 여행을 갈 때도, 용돈을 올려줄 때도, 옷이나 신발을 살 때도, 학원과 학교를 선택할 때도, 어떤 일이든 식구회의를 열어 결정했다. 지금은 그 아이들이 다 자라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산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식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식구회의를 연다.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도 나눈다. 그리고 서로 덕담을 나누기도 한다. 나는 식구회의 때, 자식들에게 한평생 소박하고 가난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가끔 한다. 이오덕 선생님 말씀처럼, 가난해야 물건을 귀하게 쓰고, 가난해야 사람다운 정을 가지게 되고, 그 정을 주고받게 된다.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이 넉넉해서 흥청망청 쓰기만 하면 자기밖에 모르고, 게을러지고, 창조력이고 슬기고 생겨날 수 없다. 무엇이든지 풍족해서 편리하게 살면 사람의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되고, 무엇보다도 자연이 다 죽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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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이웃에 사는 농부들과 ‘7일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하기 한 달 전부터 육식을 하지 않고 음식도 조금씩 줄여 나갔다. 3일 전부터는 죽을 먹었고, 단식하는 날부터는 물과 죽염만 먹었다. 먹을 양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단식을 하느냐고? 바쁜 농사철이 되기 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길이 단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식을 하는 방법이나 까닭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이가 다르고 몸과 마음 상태가 다르므로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단식하기 전에 이런 다짐을 했다. ‘누군가의 덕으로 여태 먹고살았으니 작고 하찮은 일에 날을 세우지 말아야지. 알게 모르게 남한테 상처를 주었으니 남한테 받은 상처를 되갚지 말아야지. 단 하루도 죄짓지 않고 산 날이 없으니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해 아픈 사람 위로할 수 있게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아야지. 마음 여리고 어진 사람 주눅 들지 않게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지 말아야지. 가는 곳마다 여유와 낭만이 찾아올 수 있게 잘난 척 어깨 힘주지 말아야지. 나를 잃어버리지 않게 바쁘거나 부지런하게 살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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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봄이 와서 참 좋다 작년 11월부터 지금까지 지구가열화로 날씨가 따뜻하고 비가 많이 내렸다. 이러한 기상 환경이 봄철로 이어지면 작년 늦가을에 심어 둔 양파에 노균병 같은 병이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경상남도농업기술원에선 지금부터 여러 가지 약제(농약)를 바꿔가며 뿌려야 한단다. 한 종류 약제를 뿌리면 그 약제에 내성이 생겨 효과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독한 농약을 뿌리면 양파는 살아날지 모르지만 흙은 병들고 지하수도 오염될 것이다. 농약은 개울로 흘러 강으로 바다로 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몸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앞으로 병든 농작물을 살리려고 서너 번 뿌리던 농약을 대여섯 번 뿌려야 할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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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밥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따뜻한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을 곳이 없어 애태우다, 2019년에 마을회관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이 봄날 연둣빛 새순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농촌 마을은 몇가구 이상 모여 살면 나라에서 마을회관을 지어 준다. 그런데 마을회관 지을 터는 마을에서 구해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이 마을에 들어오고 13년이 지나도록 그 터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2017년 어느 날, 마을회관 지을 수 있는 터를 하동 할머니가 내어 주셨다. “갈수록 마을 사람들이 나이 들고 몸도 불편한데 함께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며 그냥 내어 주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기쁜지 밥을 먹지 않고도 배가 부르고 잠까지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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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새해에도 스승님 뒤를 따라 이 시대 참스승이 누구냐고? 천 번 만 번 물어도 대답은 똑같다. 한평생 농사지으며, 그것도 ‘돈벌이 농사’가 아닌 ‘살림살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신 산골 할머니이시다. 그분들은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보고 한글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뭔지도 잘 모르신다. 그러나 자연 순리에 따라 이웃들과 땀 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살다보면 반드시 ‘착한 뒤끝’이 있다는 것쯤은 어느 누구보다 잘 아신다. “사람이 그냥 밥 묵고 살다 죽으모 되지. 밥 묵고 살자고 남을 속이고 괴롭히모 쓰겠냐? 돈 좀 벌어보겠다고 집을 두세 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그렇고. 투기로 땅을 사고파는 것도 그렇고.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많이 갖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게 다 천벌받을 짓이야. 집이고 땅이고 돈이고 누가 많이 가지모 가난한 사람은 우찌 묵고살겠노? 가난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해서 우리 멕이고 재우고 입히는데…. 새와 벌레도 집이 한 채잖아. 그라이 천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씰데없이 많이 갖고 있는 게 천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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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빈 들녘에 홀로 서서 코로나19로 4년 남짓 학교와 도서관에서 특별한 행사와 교육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산골에 문학 탐방이나 자연 체험 하러 찾아오는 학생이나 교사도 없었다. 사람 사는 마을에 사람이 찾아오지 않아 온 마을이 쓸쓸했다. 마치 4년을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학교에서도 외부 강사를 초대하지 않아, 강연으로 살림을 꾸리는 강사(예술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했다.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은 없다. 나 같은 산골 농부야 달세 주지 않아도 되는 작은 흙집이 있고, 비탈진 산밭이라도 일구어 먹고살 수는 있어 큰 걱정은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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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기적은 여기서부터 어느 시인은 사람만이 ‘문제’라 하고 어느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라 한다. 결국 문제든 희망이든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오늘 낮에 부산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찾아온 아이가 산밭에 떨어진 밤을 줍다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신발 밑에 더러운 흙이 묻었어요.” 한 해 가운데 가장 바쁜 가을걷이 때라, 산길마다 논밭에서 나온 농기계가 떨어뜨리고 간 흙덩이가 수두룩하다. 그 흙이 도시 아이 눈에는 목숨을 살리는 흙이 아니라 그저 더러운 흙으로 보였을까? 농부들은 흙에서 산다. 흙을 닮아 살갗도 흙빛이다. 농부들은 논밭에서든 마을길에서든 만나기만 하면 ‘살리는 이야기’만 한다. “자네 밭에 김장배추와 무는 우찌 그리 잘 자라는가?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가?” “내년엔 다랑논에 벼농사 안 짓고 콩 심을 거라며? 흙이 좋아 콩농사도 잘될 걸세.” 내가 도시에서 살 때는 무얼 살리는 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편히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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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미리 알려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공유공간 시시’는 합천군 가회면에 있다.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가다 보면 두세 번쯤은 ‘어, 이 길이 맞나?’ 싶을 만큼 깊은 산골 마을이다. 공유공간 시시란 이름에는 세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사는 게 조금 시시하면 어때, 나답게 살아가면 되는 거지. 시가 찾아오는 공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피어나는 공간. 이름 하나에도 이런 멋진 이야기가 있다니! 시시,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안하고 낭만이 흘러넘친다. 다가오는 10월2일(월) 오후 2시부터 5시, 시시에서 여럿이 함께 모여 신나는 잔치를 연다. 2시부터 장터를 열고 3시부터 5시까지는 지역 곳곳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청년들이 모여 ‘시시숲밭 콘서트’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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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유산 고마운 분들 덕으로 정성스럽게 지은 작은 흙집. 흙집 방 안에 별을 노래하는 농부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손때 묻은 책. 고달픈 농사일에 지쳐 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아 준 작은 구들방. 손님들과 둘러앉아 아픔과 희망을 함께 나눈 오래된 밥상과 찻잔. 가을에서 봄까지 전기와 기름 없어도 따뜻하게 잘 수 있게 만든 아궁이와 이웃 마을 청년 농부 구륜이가 준 아궁이 땔감. 앞마당에 옛 주인이 심은 늙은 감나무와 가죽나무. 산골 이웃이 선물로 준 고운 단풍나무. 가까운 텃밭에서 철마다 자라는 부추, 상추, 토마토, 케일, 치커리, 고추, 들깨, 참깨, 취나물, 오이, 가지, 옥수수, 토란, 여주, 땅콩, 감자, 양파, 마늘, 박하, 대파, 쪽파, 무, 배추, 생강, 시금치, 쑥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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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장마 지나고 7월 내내 장맛비가 내려 들녘이 쑥대밭이 되었다. 20년 남짓 농사지으면서 ‘쑥대밭’이란 말을 처음 쓴다. 낮밤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려 개울에 있는 다리가 물에 잠겼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웃집 다랑논을 타고 빙빙 돌아 산밭으로 가서, 비를 쫄딱 맞으며 들깨 모종을 심었다. 7월 말인데도 들깨 모종을 심지 못한 이웃이 많다. 가을 당근을 심을 때가 지났는데 아직 밭에 거름도 뿌리지 못했다. 이맘때면 주렁주렁 열려야만 하는 오이와 가지는 그림자도 볼 수가 없다. 토마토는 물러 터져 저절로 떨어졌다. 참깨는 비바람에 넘어져 고개를 처박거나 흙을 뒤집어쓰고 서로 엉켜 있다. 대파는 잎이 노랗게 병이 들어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땅콩밭이고 박하밭이고 어디고 하얀 선녀벌레가 달라붙어 수액을 빨아먹느라 야단법석이다. 마을 어르신들도 올해는 선녀벌레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아무튼 박하는 수확도 못하고 다 잘라버렸다. 당근은 뽑을 때가 되었는데? 잠깐 비 그친 사이에 한두 개 뽑아서 먹어 보니 다른 해보다 맛이 없었다. 그래서 미리 주문한 분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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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우리 모두 한식구 지난 6월은 몸이 열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로 농작물을 심고 거두는 시기가 해마다 달라 온 마음을 다 쏟아야만 했다. 장마가 오기 전에 가장 먼저 마늘을 뽑아서 사나흘쯤 밭두둑에서 말렸다. 기온이 너무 올라가면 마늘이 화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마늘대로 마늘을 덮어가면서 한 줄로 펼쳐서 말렸다. 마늘대가 두꺼운 홍산 마늘은 이레쯤 말렸다. 마늘대를 잘라서 바로 건조기에 말리는 농부도 있지만, 소농들은 그냥 자연 바람에 말린다. 그리고 끈으로 묶어서 바람이 잘 통하는 창고 천장에 걸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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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더 늦기 전에 도시 사람들은 집 밖을 나가기만 하면 문화 혜택을 누리며 여가 활동을 할 수 있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물론 돈이 있어야 하지만). 학교, 학원, 도서관, 병원, 약국, 영화관, 백화점, 마트, 놀이터, 공원, 운동장, 헬스장, 목욕탕, 식당, 카페들이 줄지어 서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농촌 사람들은 집 밖을 나가면 눈에 보이는 게 산과 들이고 비닐하우스고 축사들이다. 내가 사는 산골 마을은 미장원도 없어 큰 면 소재지나 시 지역까지 가야만 한다. 치과도 한두 시간 차를 타고 진주, 창원, 대구까지 가는 사람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