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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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이름을 안다는 것 이름은 전조라는 말이 있다. 이름을 듣는 순간 우리 몸과 마음이 동시에 반응한다. 좋아하는 음식 이름을 들을 때 마음이 저절로 따뜻해지고 입에 침이 고인다. 싫어하는 음식 이름을 듣는 순간 낯이 찌푸려진다.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그리움이 물안개처럼 번져오고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마음 가득 불쾌함이 몰려오고 몸이 굳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름은 구별을 위한 기호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개별성에 눈을 뜬다는 말이다. ‘고양이’라는 일반 명사는 어떤 동물 종을 지칭하지만 ‘톰과 제리’라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톰’은 우리에게 특별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이름은 늘 어떤 맥락과 함께 떠오른다. 특정한 장소에 대한 기억은 그곳에서 인연을 맺었던 누군가와 더불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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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하늘만은 남겨두자 만국기가 펄럭이던 운동회 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흥분상태였다. 달리기와 줄다리기, 기마전과 오자미를 던져 박을 터뜨리는 게임도 즐거웠지만 잠을 설치며 그날을 기다리도록 한 것은 역시 평소에는 먹어볼 수 없었던 군것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투명한 병에 담긴 주황색의 음료는 가히 천국의 맛이었다. 내 눈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크고 작은 풍선이 줄줄이 매달린 풍선 뽑기였다. 알록달록하고 큼지막한 풍선을 차지하고 싶었지만 내 몫은 늘 아주 작은 풍선이었다. 그때마다 내 눈길은 큰 풍선을 뽑고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친구들을 향하곤 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 풍선 뽑기에 동참할 수 없던 아이들도 풍선 놀이에 슬쩍 참여할 수 있었다. 풍선을 들고 다니다 시들해진 아이들이 단단한 매듭을 끌러 풍선을 풀어놓으면 푸스스스 소리를 내며 제멋대로 날아가는 풍선을 함께 따라다니며 깔깔거렸다. 60년 전 저편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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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세상 보는 법을 배우다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정원 일에 몰두하고 있는 길벗을 찾아 먼 길을 다녀왔다. 화사한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그의 정원은 정원사의 손길 덕분인지 정갈하고 가지런했다. 마거리트, 피튜니아, 으아리, 덩굴장미, 사계국화, 분홍낮달맞이, 삼색병꽃, 원평소국, 작약, 로벨리아, 알리움, 마삭줄, 자란 등 형형색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벌들은 잉잉대며 날다가 꽃가루에 몸을 묻은 채 열락을 즐기고 있었고, 제비나비는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꽃에 사뿐히 내려앉곤 했다. 꽃과 곤충은 둘이면서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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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색이 바랜 노란 리본 10년 전, 저마다 다른 꿈을 꾸던 싱그런 304개의 꽃봉오리들이 채 피어나지도 못한 채 떨어졌다. 팽목항 주변을 떠돌던 섧디설운 울음소리는 지금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 또한 지지부진하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가슴에 달거나 가방에 매달고 다니던 노란 리본은 어느 사이엔가 슬그머니 제거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내 지갑에는 10년 전에 넣어둔 카드가 꽂혀 있다.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부터 바꾸겠습니다.” 지갑을 열 때마다 민망해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살고 있는 나의 무심함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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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고통이 주는 선물 ‘내 인생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요.’ 만나는 이마다 이런 하소연을 한다. 행복은 저 멀리 신기루처럼 깜박일 뿐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전시된 타인들의 행복한 모습은 우리의 남루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감당해야 할 인생의 무게가 태산처럼 느껴질 때 비애감도 덩달아 커진다. 고달픔, 서러움, 억울함의 감정은 무거운 추가 되어 우리를 심연으로 잡아당긴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순간 지금이라는 기적을 한껏 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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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우리 위로 떨어지는 섬광 얼마 전 시카고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다녀왔다. 미국 전역에서 온 참가자들은 3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울림과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 모임의 첫 시간에 진행자는 참가자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후에 다섯 글자로 이 모임에 참여하며 품은 소망을 표현해보라고 요구했다. ‘날마다 기적’ ‘방향성 찾기’ ‘울림 내 안에’ ‘비움과 채움’ ‘살고 싶어서’ ‘한 박자 쉬고’ ‘한 걸음 성장’ ‘나 좀 살려줘’ ‘별을 찾아서’ ‘홀로와 함께’ ‘모름 속으로’ ‘날 놀래켜 줘’. 아주 짧은 이 표현들 속에 각자가 처한 상황과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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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다가왔다. 대한 추위가 무섭지만 정치권은 뜨겁기 이를 데 없다. 거대 양당의 틀 안에서 달음질하는 이들도 있고,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며 판을 다시 짜느라 이합집산하는 이들도 있다. 출사표를 낸 이들은 저마다 경세가를 자처한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순정한 마음으로 나선 이들도 있고, 허망한 열정에 들떠 나서는 이들도 있다. 유권자들의 분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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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모든 인간은 시작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메피스토는 말한다. “시간을 이용하시오. 시간은 아주 빨리 사라지니까! 질서가 당신에게 시간을 버는 법을 가르쳐줄 거요.” 악마는, 시간은 이용해야 하는 것이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질서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시간을 잘 통제하지 못하고 허비하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 메피스토의 세계에서 향유를 위한 멈춤은 허용되지 않는다. 꿈을 꾸는 사람이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한 해의 끝자락에 섰다. 시간을 타고 사는 것 같았지만 실은 시간에 떠밀리며 살았다. 조급증에 시달리며 질주해 온 우리 발자취가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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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기다리는 사람들 기독교인들은 성탄절에 이르기까지의 4주간을 대림절기라 한다. 이미 오신 예수를 기리는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이다. 교회력의 한 해를 기다림으로 시작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기다림은 지금은 부재한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행위이다. 학생은 방학을 기다리고, 군인은 제대 날짜를 기다리고, 구직자는 합격 통보를 기다린다.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는 기다림이야말로 삶의 활력소이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고사목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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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씨앗을 손에 쥔 채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우리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세운다. 서방 언론은 이 전쟁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 칭하고, 아랍계 언론은 이스라엘-가자 전쟁이라 칭한다. 한쪽은 암암리에 전쟁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상기시키고 있고, 다른 쪽은 주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주목하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어떻게 칭하든 지붕이 없는 거대한 감옥 같았던 그 땅은 황폐하게 변하고 있다. 가자 땅에서 들려오는 폭발음과 애곡하는 소리가 무딘 귀에도 아프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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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니토크리스의 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라는 책에서 바빌론 여왕 니토크리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도시 중앙을 통과하여 곧게 흐르던 유프라테스강에 운하 몇개를 파 물이 몇 굽이로 굴절되어 흐르게 했다. 홍수를 예방하는 효과는 물론이고 외적들이 곧바로 도성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 많은 기념비들과 도로를 건설했다. 니토크리스는 소름 끼치는 장난도 생각해냈다. 그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문 위에 자신의 묘를 만들게 한 후 이런 비문을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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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자기 죄를 씻기 위해 에우리스테우스 왕의 종이 되었다. 심술궂었던 왕은 그에게 열두 가지 과업을 해결하라고 명령했다.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을 하루 동안에 청소하는 일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 외양간에는 소가 수천 마리 살고 있었고, 여러 해 동안 한 번도 청소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이지만 헤라클레스는 알페이오스강과 페네우스의 강물 줄기를 외양간으로 끌어들여 단번에 외양간 청소를 끝냈다. 과거에는 일거에 일을 끝내버린 헤라클레스의 지력과 담력에 마음이 후련해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외양간의 오물들이 강물로 흘러들어갔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