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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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신성한 땅은 어디인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틈 날 때마다 크고 작은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 기념관을 찾아가 머물렀다. 어디에나 그곳의 역사와 전시된 유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안내인들이 있었다. 전시된 유물 하나하나는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끈이었다. 역사는 기억하려는 이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게티스버그 미국 전쟁 박물관은 1863년 7월1일부터 3일까지 게티스버그 인근에서 벌어진 참혹했던 전투를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 짧은 기간 동안 8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 전투에서 승리한 북군은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박물관에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초등학생들은 곳곳에 모여 자원봉사자들의 설명을 들으며 메모를 하고 있었고, 이미 관람을 끝낸 듯한 중·고등학생들은 기념품을 사기 위해 바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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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먼산에 물결처럼 번지는 연초록 나뭇잎들의 바림을 황홀하게 바라본다. 장엄한 생명 세계가 그곳에 있다. ‘골짜기의 신묘함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아득한 암컷이라고 하고, 아득한 암컷이라는 문을 천지의 근본’이라고 했던 노자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산은 뭇 생명을 품어 안고 기른다. 하지만 미세먼지와 황사는 그 산을 바라보는 우리 시선을 어지럽힌다. 가뭄이 지속되면서 도처에서 일어난 산불로 생명의 터전이 무너지고 있다. 집을 잃은 이들의 탄식이 억눌린 함성이 되어 번져간다. 기후 재앙을 알리는 경고의 나팔소리가 이미 울렸지만 사람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태연하다. 더 많은 소비와 편리한 삶에 대한 욕망이 지구촌의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적 책임 의식을 압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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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희망은 과거로부터 온다 “노인들이라고 해서 너무 얕보지 말고,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동냥해서 (주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이 아니지.” 94세인 양금덕 할머니의 담담하지만 단호한 선언이다. 미쓰비시중공업으로 강제동원돼 17개월 동안 일하고 한 푼도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었느냐는 의혹의 눈길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의 말이기에 심상하게 들을 수 없다. 정부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 제3자 변제를 통해 강제동원 배상 문제를 풀겠다고 했다. 당사자들은 그런 돈이라면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분들에게 중요한 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니라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인정과 사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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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아낌만 한 것이 없다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이 일어난 지 벌써 10여일이 지났다. 사망자가 4만1000명을 넘겼다 한다. 언론은 이제 구조에서 복구로 이행하는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한 생명도 쉽게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건물의 잔해에 갇힌 지 228시간 만에 구조된 사람도 있지 않은가? 실낱같은 가능성이라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구조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리해야 할 문젯거리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됨을 묻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있다. 거대 언어모델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가 등장하면서 인지혁명이 머지않았다고들 말한다. 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챗지피티는 적절한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제공해준다. 논문의 얼개도 짜고, 설교문도 작성하고, 시도 쓰고, 소설의 플롯도 만든다. 머뭇거림이나 주저함과는 거리가 멀다. 사유를 위한 성찰적 거리는 설 자리가 없다. 편리한 도구임이 분명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크다. 거짓 정보와 합성 데이터가 섞여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도구는 인간 삶을 뒤흔드는 미묘한 지점을 보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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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어디에나 있는 고향 많은 사람이 일시적 귀향을 서두르는 시간에 엉뚱하게도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작가인 장 아메리가 떠오른다. 그는 평생 나치의 절멸수용소에서 겪은 고문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1978년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고문이 그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고문이 “타자에 의한 내 자아의 경계 침해”라며 고문에 시달린 기억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을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고향은 저기 어딘가에 있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구성되는 사회적 실체인지도 모르겠다. ‘달러가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말도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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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레흐는 어디에나 있다 폴란드 출신 미국 작가 저지 코진스키(Jerzy Kosinsky)의 <무지개빛 까마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상황 속에 버려진 한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이다. 이 책은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겁하며 맹목적인지 보여준다. 작중인물인 새 장수 레흐는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욕구불만이 생길 때마다 자기가 팔러 다니는 새 중에서 가장 크고 힘이 센 놈을 골라내 온몸에 야생화보다 더 알록달록한 색을 칠한다. 숲에서 새의 목을 가볍게 비틀면 새는 숨이 막혀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지른다. 이내 같은 종류의 새들이 몰려와 초조하게 날아다니면 레흐는 그 새를 놓아준다. 자유를 누리게 된 새는 기쁨에 겨워 한 점의 무지개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그 새를 맞이한 잿빛 새들은 잠시 혼란을 느낀다.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새는 자기가 그들의 동료임을 알리려고 더 가까이 다가가지만, 새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가 일시에 그 새를 공격해 죽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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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그늘이 지나간 장소 기독교인들에게 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 날이다. 교회는 기다림의 절기로 한 해를 시작한다. 기다림을 촉발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싹튼 그리움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움을 품고 산다. 어쩌면 그리움이야말로 우리 삶을 밀어가는 힘이 아닐까?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을 때 삶은 권태롭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림의 대상이 올 때까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더럽고 어지럽혀진 집을 정돈하는 사람처럼, 기다림의 대상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예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자 요한은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하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이해했다. 아름다운 세상을 기대하는 이들은 그 세상을 선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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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심연을 뚫고 솟아오르는 빛 마르틴 루터가 불붙인 종교개혁 기념일이 다가온다. 모든 생명은 탄생, 성장, 정체, 경직, 죽음의 과정을 거친다. 문명도 마찬가지다. 변화를 추동하는 역동성이 형식과 조화를 이룰 때 문명은 빛이 난다. 역동성이 형식을 압도할 때 혼란이 찾아오고, 형식이 역동성을 억누를 때 정체 상태가 발생한다. 종교가 권력에 맛들이고 부를 축적할 때, 권력 욕망이 권위를 압도할 때 종교는 타락하게 마련이다. 하나의 소리가 압도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때 다른 소리들은 잦아들고 세상은 경직된다. 권력은 위기에 빠질 때마다 폭력을 사용하라는 유혹에 즐겨 굴복한다. 종교적 진실의 핵심은 지배의 포기이지만, 지배에 맛들인 종교인들은 신자들을 수동적 객체로 전락시킴으로 그들의 영혼을 자기 의지에 복속시키려 한다. 자기 확신에 찬 말들이 범람하면서 진리 혹은 진실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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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신의 이름을 오용하는 이들 러시아발 위기가 심각하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남지역을 합병하기 위한 주민투표가 진행되었다. 러시아는 주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고 선언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그 투표가 적법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며 합병 계획을 철회해야 한다고 말한다. 러시아는 그러나 그런 우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만약 그 지역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있다면 그것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핵무기도 사용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지역 전문가들은 그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닐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러시아는 이미 예비군 동원령을 내렸고 전쟁에 나설 의사가 없는 이들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의 이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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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저보다 꼭 10년 위신데 10년 전보다 좋은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후배가 물었다. 늘 긍정적이고 명석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그의 음성이 해 질 녘 서해 바다처럼 사뭇 쓸쓸하게 들렸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 것이 10년 세월이 내게 준 선물 같아요.” 그는 사소한 차이 때문에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분열에까지 이르는 세태를 탄식했다. 어제까지 동료였던 이들이 진영 논리에 따라 갈리면서 서로를 낯선 존재로 바라보는 현실이 아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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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운다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정치인들에게서 품격 있는 언어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정치 마당이 쟁론의 현장임을 모르지 않지만 모든 논쟁이 분열적이거나 비아냥거림일 필요는 없다. 치열한 탐구 정신, 정확한 정보, 사안에 대한 공정한 이해, 적절한 표현이야말로 설득력의 요체이다.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현실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만들기도 한다. 히브리어 ‘다바르’는 말이라는 뜻과 사건이라는 뜻을 두루 내포한다. 말은 사건을 일으킨다. 사람은 말로 세상을 짓는다. 친절하고 따뜻한 말이 발화되는 순간 누군가의 가슴에 꽃이 핀다. 거칠고 냉혹한 말은 우리 내면에 얼음 세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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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사회적 자본의 저장소 유대교 랍비인 나오미가 <아인슈타인과 랍비>라는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다. 70대 중반에 이른 외할아버지께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왔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사람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실 뿐 아무 일에도 의욕을 보이질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평생을 함께했고, 아들딸과 손자·손녀들로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고, 사업 또한 번창했고, 건강 또한 좋았다. 우울증에 빠질 이유가 없다고 느낀 엄마가 외할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잠자코 계시던 외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이제 아무도 없다!” 그리고 “키비츠(kibbitz) 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결핍된 키비츠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