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 바랜 노란 리본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10년 전, 저마다 다른 꿈을 꾸던 싱그런 304개의 꽃봉오리들이 채 피어나지도 못한 채 떨어졌다. 팽목항 주변을 떠돌던 섧디설운 울음소리는 지금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 또한 지지부진하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가슴에 달거나 가방에 매달고 다니던 노란 리본은 어느 사이엔가 슬그머니 제거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내 지갑에는 10년 전에 넣어둔 카드가 꽂혀 있다.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부터 바꾸겠습니다.” 지갑을 열 때마다 민망해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살고 있는 나의 무심함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우리부터 바꾸겠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인지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생명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를 열고 싶다는 바람이, 열어야 한다는 당위가 그 문구 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생명을 담보로 이익을 추구하는 미친 질주를 멈춰야 한다는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칼 폴라니의 말처럼 ‘악마의 맷돌’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는 세계는 인류 역사가 소중하게 간직해온 모든 가치를 한데 넣고 갈아서 경제적 이익이라는 가루를 취하는 데 여념이 없다.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타자의 고통에 반응할 줄 모르는 무정함과 무책임함이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무정한 사람들은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그만하면 됐다’고 말한다.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떨쳐버리고 미래의 희망을 위해 살라고 말한다. 그들의 충고는 적절치 않다. 오히려 폭력적이다. 그럴 수 없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결심한다고 떨쳐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몸에 난 상처 자국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영혼에 각인된 상처는 숨길 수는 있지만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것조차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과 사고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쉽게 스러지지 않는다.

4월이면 흐릿해져가는 아픔의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독일의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동판화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보곤 한다. 콜비츠는 세기 전환기에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했고 인간의 폭력에 의해 스러지는 생명들에 대한 연민에 몸부림쳤다. 작품 속의 아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앙상한 어깨를 드러낸 아이는 엄마 품에서 축 늘어져 있다. 눈을 감은 아이의 얼굴엔 희로애락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엄마는 죽은 아이를 으스러져라 부둥켜안고 있다. 이마에 새겨진 굵은 주름이 상실의 깊이를 나타낸다. 엄마는 이미 싸늘히 식어버린 아이를 따뜻한 체온으로 덥혀 삶의 세계로 데려오고 싶다. 엄마의 팔과 다리는 굳건하지만 자식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무력해보인다. 엄마와 아이의 몸은 둘이지만 한 덩어리로 보인다. 지극한 슬픔이 둘을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죽음과 더불어 엄마의 하늘이 무너졌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한다.

이 판화작품은 ‘피에타’를 연상시킨다. 슬픔 혹은 비탄을 뜻하는 피에타는 도상학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피에타는 우리가 잊어선 안 되는 슬픔을 드러낸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피에타 앞에서 경외감을 느낀다. 아픔과 슬픔에 공명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피에타는 또한 세상의 어떤 폭력 앞에서도 스러질 수 없는 사랑의 궁극적 승리를 암시한다. 고통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열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노동 현장에서, 거리에서, 바다에서 소중한 자식을 잃은 부모들 가운데는 더 이상 무고한 죽음이 없는 세상을 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이들이 있다. 숭고한 열정이다.

304개의 꽃송이들은 지금도 자기들의 무고한 죽음을 잊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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