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최신기사
-
사유와 성찰 어긋나는 말들에 대하여 언젠가 읽은 우화다. 수사자와 암소는 뜨거운 사랑에 빠졌고 둘은 한 가정을 이루었다. 수사자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매일 사냥을 해서 신선한 고기를 대접했다. 암소는 싫었지만 남편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고기를 먹었다. 암소는 날마다 남편을 위해 신선한 건초를 준비해 대접했다. 사자는 건초를 먹는 게 고역이었지만 끝까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참을성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서로 헤어지기로 했다. 그때 그들이 서로에게 한 말은 “나는 최선을 다했어”였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최선이 어리석은 최선이었다는 사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진정한 사랑은 ‘지식’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지식은 특정한 정보를 뜻하지 않는다. 사랑에 내포된 지식은 자기 욕구를 상대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그의 고통, 슬픔, 기쁨, 불안, 내밀한 상처를 알아채고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말이다.
-
사유와 성찰 듣는 마음, 정치의 시작 성경은 두 여인의 분쟁을 지혜롭게 해결한 이야기로 솔로몬 왕의 통치를 소개한다. 아기를 두고 서로 자신의 자식이라 주장하던 두 여인 앞에서, 왕은 신하에게 “아이를 둘로 나누어 주라”고 명령한다. 그 말에 한 여인은 울부짖으며 말한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차라리 저 여인에게 주십시오. 아이를 죽이지 마십시오.” 다른 여인은 왕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말한다. 솔로몬은 아이를 살리려 한 여인이 진짜 어머니임을 간파하고, 아이를 그 여인에게 넘긴다.
-
사유와 성찰 오동나무에 꽃 필 때 오동나무에 핀 연보라색 꽃이 5월의 산하를 물들이고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이 있고, 줄기가 곧아 선비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의 어느 선비는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그 곡조를 간직한다”고 노래했다. 오동나무를 볼 때마다 아주 오래전 고향 마을 풍경이 떠오른다. 마을 사람들은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마감하고 간략한 저녁 식사를 마치면 서둘러 우리 집에 오곤 했다. 트랜지스터라디오가 있던 우리 집은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었다. 라디오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하려고 마당가 오동나무 가지 위에 올려놓았다.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가다가도 연속극이 시작되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숨을 죽인 채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함께 감탄하고 웃고 눈시울을 적셨다. 연속극이 끝나면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고 그들이 비운 자리를 마치 우유를 쏟아놓은 것 같은 은하수가 채웠다. 공동체가 살아 있던 시절의 풍경이다. 결혼, 출산, 장례와 노동의 모든 과정이 마을의 일이었던 그 시절은 가난했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
사유와 성찰 세상이 장터로 변할 때 오늘은 기독교인들이 성금요일이라 일컫는 날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기억하는 날에 ‘거룩한 성(聖)’자를 더한 것은 그의 죽음의 숭고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처형 방식이다. 사형수는 장시간의 고통을 견뎌야 하고, 완벽한 고립감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옷까지 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림으로 그들은 인간적인 품격조차 박탈당했다. 사람들의 눈에 고스란히 노출된 그들의 몸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았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이들은 조롱과 모욕을 가함으로 처형당하는 이들과 자기들을 구별했다. 인간의 잔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장에서 죽어가는 한 인간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조롱거리로 삼는 순간 인간의 소외는 절정에 이른다.
-
사유와 성찰 봇도랑에 물이 차면 어둡고 으스스하다. 춘분 절기에 접어들었지만 냉기가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후 습관적으로 뉴스에 눈길이 간다.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지 않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탄식과 울분에 찬 언어가 난무한다. 진영을 막론하고 희망 섞인 예측을 쏟아내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날 선 감정들이 부딪치며 내는 굉음에 귀가 먹먹하다. 광장을 지날 때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려오는 날 선 언어에 저절로 낯이 찌푸려진다. 증오와 선동, 냉소와 저주의 언어를 들을 때마다 채찍에 맞은 듯 가슴이 아리다.
-
사유와 성찰 우리는 선택 앞에 서 있다 국어사전은 삼세판을 ‘더도 덜도 말고 꼭 세 판’이라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지만 삼세판의 심리를 오롯이 드러내지는 못한다. 우연이 작동할 가능성이 많은 단판 승부는 재도전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 승자는 안도하지만 패자는 쉽게 승복하기 어렵다. 경쟁이 치열하고, 사회적 긴장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배제의 논리가 기승을 부린다. 우리 사회에 삼세판의 여백은 사라지고 사회적 낙인찍기가 만연하고 있다. 낙인찍기는 어떤 사람의 특정한 행동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의 존재에 대한 단정적 평가이기에 가혹하다. 낙인찍힌 사람들은 모든 삶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 같은 암담함을 느낀다. 그 폐쇄된 어둠은 일쑤 자기 비하 혹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배우 김새론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가혹하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적 사건이다. 우리 사회를 ‘오징어 게임’의 실사판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살벌한 세상이다.
-
사유와 성찰 지옥에서 벗어날 용기 희망의 조짐과 절망의 조짐이 교차하는 나날이다. 역대 최대 규모라는 LA 산불은 사람들이 애써 일군 삶의 터전을 초토화시킨 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기후위기가 초래할 지구적 재앙의 서곡인가 싶어 아뜩해진다. 그 혼란의 와중에도 빈집에 들어가 약탈을 감행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고, 약탈자 가운데는 소방관의 복장까지 갖춰 입은 이들도 있다 한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재난 속에 피어나는 인정의 꽃도 있다. 기쁨은 개별적이지만 고통은 보편적이다. 많은 자원봉사자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서고 있다. 미국의 작가 리베카 솔닛은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라는 부제가 붙은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자연이 한번 손을 대면 전 세계가 친구가 된다”고 말한다. 타자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이야말로 분열된 세상의 치유제가 아닐까?
-
사유와 성찰 명랑하게 저항하는 사람들 “이름도 모르는, 이름을 알 수도 없는, 알고자 할 필요조차도 없는 씨알 여러분! 하늘의 맑음, 땅이 번듯함 속에 안녕하십니까? 물의 날뜀, 바람의 외침 속에 씩씩하십니까?” 함석헌 선생이 ‘씨알의 소리’ 1974년 6월호를 통해 독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인사말이다. 긴급조치가 발령되어 엄혹했던 시기, 모두가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던 때 그는 독자들의 안부를 묻는다. 그냥 잘 있느냐는 인사가 아니라 정신이 살아 있냐고 묻는 것이다. 그때로부터 꼭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인사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으밀아밀 계엄을 모의하고 실행한 이들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어둠은 치밀하고 끈질기고 강고하다.
-
사유와 성찰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사람들 “속도에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왜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냐는 질문에 30대 초반의 한 젊은이가 한 대답이다. “그 속도에 맞춰 살려다 보니 스트레스는 심해지고 자존감은 날로 줄어들더군요. 이렇게 살다가는 삶의 지향을 잃은 채 부유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늦기 전에 내가 잘할 수 있고 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해보자 싶었어요.” 그는 고심 끝에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조금도 후회가 없었다. 경쟁에서 밀려나 억지 춘향으로 낙향한 것이 아니기에 비애감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생텍쥐페리는 삶에는 해결책이 없고 밀고 나가는 힘만 있다고 말했다. 그 힘을 만들어낼 때 해결책이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
사유와 성찰 여백을 창조하는 사람들 사사건건 피새를 부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성격 탓이려니 하고 그저 웃어 넘겨주기 힘들 만큼 조급하고 날카로워 주변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들은 말과 표정으로 불화를 솟쳐 올린다. 이런 이들을 일러 성경은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라고 말한다. 이들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즐거운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은 중력처럼 우리 마음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자기의 옳음에 대한 과도한 확신에 사로잡힌 이들일수록 다름에 대한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기가 세운 기준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비난하고 배척한다. 다면적, 다원적, 유기체적 사고가 멈출 때 세상은 성격들 사이의 전장이 된다. 온기 없는 곳에서 생명은 자라지 못한다. 남극의 황제펭귄들은 알을 발 위에 올려놓고 따뜻한 깃털로 알을 품는다.
-
사유와 성찰 다시 평화의 노래를 부를 때 청명한 가을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잠자리와 저 멀리 편대비행을 하는 헬리콥터가 겹쳐 보인다. 거리 때문인지 둘의 크기가 엇비슷하게 보인다. 비현실적 광경이다. 강남에서 제일 높은 빌딩 주변을 선회한 수십 대의 헬리콥터는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본다면 멋진 광경이다. 제76주년 국군의날 행사에 참여하는 부대의 예행연습이었을 것이다. 며칠 동안 전투기가 날면서 내는 굉음이 우리 일상을 뒤흔들었다. 국군의날 오후 첨단 무기를 탑재한 차와 병력이 서울의 도심 한복판을 행진했다. 괴물 미사일로 불리는 현무-5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지하 벙커 깊은 곳에 숨은 적을 타격하는 능력을 갖췄다 한다. 당국자는 이 행사가 국군의 위용을 보여주는 동시에 대북 억지력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행사를 보고 가슴이 벅찼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한반도의 긴장을 높이려는 것 같아 불편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
사유와 성찰 옹두리가 전해주는 말 문득 익숙하던 세계가 낯설어질 때가 있다. 명료하다 여기던 것들이 모호해지고, 가깝다 생각하던 것들이 멀어지고, 질서정연하다 여기던 세상이 뒤죽박죽인 것 같고, 든든하다 여기던 것들이 속절없이 흔들릴 때, 나 홀로 세상에서 단절된 것 같은 느낌에 아뜩해진다. 부조리의 경험이다. 예기치 않은 죽음과 맞닥뜨릴 때가 특히 그러하다. 죽음에 대한 자각은 우리 일상의 흐름을 폭력적으로 단절시킨다. 단절은 고립이다. 세상이 부빙처럼 멀어져 갈 때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죽음과의 불쾌한 대면을 애써 연기하거나 피하려 한다. 하지만 죽음의 자각은 우리 삶을 근원에서 돌아보라는 일종의 초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