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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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사람들 “속도에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왜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냐는 질문에 30대 초반의 한 젊은이가 한 대답이다. “그 속도에 맞춰 살려다 보니 스트레스는 심해지고 자존감은 날로 줄어들더군요. 이렇게 살다가는 삶의 지향을 잃은 채 부유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늦기 전에 내가 잘할 수 있고 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해보자 싶었어요.” 그는 고심 끝에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조금도 후회가 없었다. 경쟁에서 밀려나 억지 춘향으로 낙향한 것이 아니기에 비애감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생텍쥐페리는 삶에는 해결책이 없고 밀고 나가는 힘만 있다고 말했다. 그 힘을 만들어낼 때 해결책이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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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여백을 창조하는 사람들 사사건건 피새를 부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성격 탓이려니 하고 그저 웃어 넘겨주기 힘들 만큼 조급하고 날카로워 주변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들은 말과 표정으로 불화를 솟쳐 올린다. 이런 이들을 일러 성경은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라고 말한다. 이들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즐거운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은 중력처럼 우리 마음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자기의 옳음에 대한 과도한 확신에 사로잡힌 이들일수록 다름에 대한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기가 세운 기준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비난하고 배척한다. 다면적, 다원적, 유기체적 사고가 멈출 때 세상은 성격들 사이의 전장이 된다. 온기 없는 곳에서 생명은 자라지 못한다. 남극의 황제펭귄들은 알을 발 위에 올려놓고 따뜻한 깃털로 알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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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다시 평화의 노래를 부를 때 청명한 가을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잠자리와 저 멀리 편대비행을 하는 헬리콥터가 겹쳐 보인다. 거리 때문인지 둘의 크기가 엇비슷하게 보인다. 비현실적 광경이다. 강남에서 제일 높은 빌딩 주변을 선회한 수십 대의 헬리콥터는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본다면 멋진 광경이다. 제76주년 국군의날 행사에 참여하는 부대의 예행연습이었을 것이다. 며칠 동안 전투기가 날면서 내는 굉음이 우리 일상을 뒤흔들었다. 국군의날 오후 첨단 무기를 탑재한 차와 병력이 서울의 도심 한복판을 행진했다. 괴물 미사일로 불리는 현무-5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지하 벙커 깊은 곳에 숨은 적을 타격하는 능력을 갖췄다 한다. 당국자는 이 행사가 국군의 위용을 보여주는 동시에 대북 억지력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행사를 보고 가슴이 벅찼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한반도의 긴장을 높이려는 것 같아 불편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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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옹두리가 전해주는 말 문득 익숙하던 세계가 낯설어질 때가 있다. 명료하다 여기던 것들이 모호해지고, 가깝다 생각하던 것들이 멀어지고, 질서정연하다 여기던 세상이 뒤죽박죽인 것 같고, 든든하다 여기던 것들이 속절없이 흔들릴 때, 나 홀로 세상에서 단절된 것 같은 느낌에 아뜩해진다. 부조리의 경험이다. 예기치 않은 죽음과 맞닥뜨릴 때가 특히 그러하다. 죽음에 대한 자각은 우리 일상의 흐름을 폭력적으로 단절시킨다. 단절은 고립이다. 세상이 부빙처럼 멀어져 갈 때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죽음과의 불쾌한 대면을 애써 연기하거나 피하려 한다. 하지만 죽음의 자각은 우리 삶을 근원에서 돌아보라는 일종의 초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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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교육의 목표는 무엇인가 며칠간 좋은 교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모임에 이야기 손님으로 참여했다. 교육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학교 현장이 점차 황량하게 변해가는 현실 속에서 교사의 사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모색하는 자리였다. 방학 중인데도 많은 교사가 참여한 것은 교권이 무너지고 있는 오늘의 교육 현실 속에서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계기로 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사에 대한 언어적, 정서적, 신체적 폭력이 항다반사로 일어나는 현장에서 교사들은 자괴감을 느낀다. 교사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은 철회된 것처럼 보인다. 많은 교사들이 현장에서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오길 기다린다. 교육의 귀중한 토대가 허물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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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이름을 안다는 것 이름은 전조라는 말이 있다. 이름을 듣는 순간 우리 몸과 마음이 동시에 반응한다. 좋아하는 음식 이름을 들을 때 마음이 저절로 따뜻해지고 입에 침이 고인다. 싫어하는 음식 이름을 듣는 순간 낯이 찌푸려진다.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그리움이 물안개처럼 번져오고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마음 가득 불쾌함이 몰려오고 몸이 굳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름은 구별을 위한 기호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개별성에 눈을 뜬다는 말이다. ‘고양이’라는 일반 명사는 어떤 동물 종을 지칭하지만 ‘톰과 제리’라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톰’은 우리에게 특별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이름은 늘 어떤 맥락과 함께 떠오른다. 특정한 장소에 대한 기억은 그곳에서 인연을 맺었던 누군가와 더불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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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하늘만은 남겨두자 만국기가 펄럭이던 운동회 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흥분상태였다. 달리기와 줄다리기, 기마전과 오자미를 던져 박을 터뜨리는 게임도 즐거웠지만 잠을 설치며 그날을 기다리도록 한 것은 역시 평소에는 먹어볼 수 없었던 군것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투명한 병에 담긴 주황색의 음료는 가히 천국의 맛이었다. 내 눈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크고 작은 풍선이 줄줄이 매달린 풍선 뽑기였다. 알록달록하고 큼지막한 풍선을 차지하고 싶었지만 내 몫은 늘 아주 작은 풍선이었다. 그때마다 내 눈길은 큰 풍선을 뽑고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친구들을 향하곤 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 풍선 뽑기에 동참할 수 없던 아이들도 풍선 놀이에 슬쩍 참여할 수 있었다. 풍선을 들고 다니다 시들해진 아이들이 단단한 매듭을 끌러 풍선을 풀어놓으면 푸스스스 소리를 내며 제멋대로 날아가는 풍선을 함께 따라다니며 깔깔거렸다. 60년 전 저편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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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세상 보는 법을 배우다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정원 일에 몰두하고 있는 길벗을 찾아 먼 길을 다녀왔다. 화사한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그의 정원은 정원사의 손길 덕분인지 정갈하고 가지런했다. 마거리트, 피튜니아, 으아리, 덩굴장미, 사계국화, 분홍낮달맞이, 삼색병꽃, 원평소국, 작약, 로벨리아, 알리움, 마삭줄, 자란 등 형형색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벌들은 잉잉대며 날다가 꽃가루에 몸을 묻은 채 열락을 즐기고 있었고, 제비나비는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꽃에 사뿐히 내려앉곤 했다. 꽃과 곤충은 둘이면서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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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색이 바랜 노란 리본 10년 전, 저마다 다른 꿈을 꾸던 싱그런 304개의 꽃봉오리들이 채 피어나지도 못한 채 떨어졌다. 팽목항 주변을 떠돌던 섧디설운 울음소리는 지금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 또한 지지부진하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가슴에 달거나 가방에 매달고 다니던 노란 리본은 어느 사이엔가 슬그머니 제거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내 지갑에는 10년 전에 넣어둔 카드가 꽂혀 있다.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부터 바꾸겠습니다.” 지갑을 열 때마다 민망해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살고 있는 나의 무심함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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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고통이 주는 선물 ‘내 인생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요.’ 만나는 이마다 이런 하소연을 한다. 행복은 저 멀리 신기루처럼 깜박일 뿐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전시된 타인들의 행복한 모습은 우리의 남루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감당해야 할 인생의 무게가 태산처럼 느껴질 때 비애감도 덩달아 커진다. 고달픔, 서러움, 억울함의 감정은 무거운 추가 되어 우리를 심연으로 잡아당긴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순간 지금이라는 기적을 한껏 누리지 못한다. 행복의 신기루를 좇는 이들일수록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통은 즉시 제거되어야 할 적이다. 고통은 행복의 철천지원수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고통에 대한 내성도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일에 연루되려 하지 않는다. 사랑조차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진통제를 복용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고립을 택하기도 한다. 외로움이 심화되고 자기 삶을 위협할 수도 있는 타자에 대한 적대감 또한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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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우리 위로 떨어지는 섬광 얼마 전 시카고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다녀왔다. 미국 전역에서 온 참가자들은 3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울림과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 모임의 첫 시간에 진행자는 참가자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후에 다섯 글자로 이 모임에 참여하며 품은 소망을 표현해보라고 요구했다. ‘날마다 기적’ ‘방향성 찾기’ ‘울림 내 안에’ ‘비움과 채움’ ‘살고 싶어서’ ‘한 박자 쉬고’ ‘한 걸음 성장’ ‘나 좀 살려줘’ ‘별을 찾아서’ ‘홀로와 함께’ ‘모름 속으로’ ‘날 놀래켜 줘’. 아주 짧은 이 표현들 속에 각자가 처한 상황과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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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다가왔다. 대한 추위가 무섭지만 정치권은 뜨겁기 이를 데 없다. 거대 양당의 틀 안에서 달음질하는 이들도 있고,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며 판을 다시 짜느라 이합집산하는 이들도 있다. 출사표를 낸 이들은 저마다 경세가를 자처한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순정한 마음으로 나선 이들도 있고, 허망한 열정에 들떠 나서는 이들도 있다. 유권자들의 분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상황이다. 박석무 선생의 <다산의 마음을 찾아>를 읽다가 우리 시대를 비춰주는 것 같은 한 대목과 만났다. 다산은 퇴계가 제자 이중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에 주목한다. 퇴계는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탄식이 자기에게도 있다고 고백한다. “나의 경우는 학문이나 능력이 텅텅 빈 사람인데도 그런 줄을 알아차리지 못함에 대한 탄식이라네.” 대학자의 겸허한 자기반성이다. 다산은 그런 퇴계의 글을 읽다가 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자기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사람들은 도리어 그의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땀이 나고 송구스럽다. 이를 태연히 인정하여 남들이 속아줌을 즐기다가 진짜 큰일을 맡기는 경우 군색하고 답답함에 몸 둘 곳이 없을 터이니 매우 두려운 일이다.” 성경의 한 지혜자도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은금의 순도는 불에 넣어 보면 알 수 있고, 사람의 순수함은 조금만 이름이 나면 알 수 있다.” 무서운 말이다. 자기가 한 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 평가는 언제든 냉혹한 적대감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