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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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우리 내면에 남아 있는 선의 불씨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뻔뻔하게 자기 이익만 챙기거나 누구나 아는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부인하는 사람을 볼 때 터져나오는 탄식이다. 이 말에는 양심이야말로 사람다움을 가늠하는 척도라는 가치판단이 들어 있다. 문제는 자기 잇속에 매몰되어 사는 사람은 이런 탄식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양심을 가리키는 헬라어 ‘쉰에이데시스’와 라틴어 ‘콘스키엔티아’는 공히 ‘함께 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누구와 함께 안다는 것일까? 일단 나와 마주 서 있는 타자가 떠오른다. 중국 후한 시대의 관리였던 양진은 옛 동료인 왕밀이 “밤이 깊어 아무도 모릅니다”라고 말하며 뇌물을 바치려 하자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단 말인가”라며 그를 엄히 꾸짖었다. 양진은 양심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하지만 ‘함께’가 근원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양심은 자기 안에 내재된 도덕 법칙이다. 성찰이 자기와의 대화인 것처럼 양심은 도덕적 자아를 포기하려는 순간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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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고향이 된 사람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나날이다. 종종거리며 거리를 걷는 이들의 표정이 어둡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느긋하고 한적한 평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서, 남들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저마다 자기를 몰아댄다. 분주함이 신분의 상징이 된 시대다. 가속화하는 시간에 떠밀리며 살기에 늘 숨이 가쁘다. 회복 탄력성이 줄어들어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낸다. 몸이 발하는 멈춤 신호 앞에서도 멈추지 못해 탈이 나곤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탄 이들은 좀처럼 멈추지 못한다. 멈추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추월할 거라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멈추지 못함의 부산물은 조급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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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대위법적 조화를 꿈꾼다 지난 며칠간 바흐의 음악에 흠뻑 빠져 지냈다. 독립적인 다성부(polyphony)가 어울려 음악적 건축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경이로웠다. 하나의 선율을 또 다른 선율이 따른다. 각기 독립적인 선율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때로는 대립하고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어울린다. 음들이 일으키는 긴장이 생동감을 자아내고 마침내 원만한 조화에 이르는 과정은 마치 뒤척이며 흐르던 지류들이 합류해 강을 이루고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스며드는 광경과 같았다. 바흐의 대위법은 조화로운 대립의 메타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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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인류의 오랜 꿈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미국 국립공군박물관은 라이트 형제의 고향에 자리 잡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곳에는 인류가 하늘을 향해 품었던 꿈의 궤적이 초기 비행기부터 스페이스 셔틀에 이르기까지 생생히 전시돼 있다. 공기가 희박한 고산 지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해, 극지와 사막, 우주 공간까지 인간의 상상력이 닿는 곳마다 그 발걸음은 이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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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어긋나는 말들에 대하여 언젠가 읽은 우화다. 수사자와 암소는 뜨거운 사랑에 빠졌고 둘은 한 가정을 이루었다. 수사자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매일 사냥을 해서 신선한 고기를 대접했다. 암소는 싫었지만 남편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고기를 먹었다. 암소는 날마다 남편을 위해 신선한 건초를 준비해 대접했다. 사자는 건초를 먹는 게 고역이었지만 끝까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참을성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서로 헤어지기로 했다. 그때 그들이 서로에게 한 말은 “나는 최선을 다했어”였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최선이 어리석은 최선이었다는 사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진정한 사랑은 ‘지식’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지식은 특정한 정보를 뜻하지 않는다. 사랑에 내포된 지식은 자기 욕구를 상대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그의 고통, 슬픔, 기쁨, 불안, 내밀한 상처를 알아채고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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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듣는 마음, 정치의 시작 성경은 두 여인의 분쟁을 지혜롭게 해결한 이야기로 솔로몬 왕의 통치를 소개한다. 아기를 두고 서로 자신의 자식이라 주장하던 두 여인 앞에서, 왕은 신하에게 “아이를 둘로 나누어 주라”고 명령한다. 그 말에 한 여인은 울부짖으며 말한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차라리 저 여인에게 주십시오. 아이를 죽이지 마십시오.” 다른 여인은 왕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말한다. 솔로몬은 아이를 살리려 한 여인이 진짜 어머니임을 간파하고, 아이를 그 여인에게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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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오동나무에 꽃 필 때 오동나무에 핀 연보라색 꽃이 5월의 산하를 물들이고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이 있고, 줄기가 곧아 선비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의 어느 선비는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그 곡조를 간직한다”고 노래했다. 오동나무를 볼 때마다 아주 오래전 고향 마을 풍경이 떠오른다. 마을 사람들은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마감하고 간략한 저녁 식사를 마치면 서둘러 우리 집에 오곤 했다. 트랜지스터라디오가 있던 우리 집은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었다. 라디오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하려고 마당가 오동나무 가지 위에 올려놓았다.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가다가도 연속극이 시작되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숨을 죽인 채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함께 감탄하고 웃고 눈시울을 적셨다. 연속극이 끝나면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고 그들이 비운 자리를 마치 우유를 쏟아놓은 것 같은 은하수가 채웠다. 공동체가 살아 있던 시절의 풍경이다. 결혼, 출산, 장례와 노동의 모든 과정이 마을의 일이었던 그 시절은 가난했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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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세상이 장터로 변할 때 오늘은 기독교인들이 성금요일이라 일컫는 날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기억하는 날에 ‘거룩한 성(聖)’자를 더한 것은 그의 죽음의 숭고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처형 방식이다. 사형수는 장시간의 고통을 견뎌야 하고, 완벽한 고립감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옷까지 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림으로 그들은 인간적인 품격조차 박탈당했다. 사람들의 눈에 고스란히 노출된 그들의 몸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았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이들은 조롱과 모욕을 가함으로 처형당하는 이들과 자기들을 구별했다. 인간의 잔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장에서 죽어가는 한 인간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조롱거리로 삼는 순간 인간의 소외는 절정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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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봇도랑에 물이 차면 어둡고 으스스하다. 춘분 절기에 접어들었지만 냉기가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후 습관적으로 뉴스에 눈길이 간다.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지 않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탄식과 울분에 찬 언어가 난무한다. 진영을 막론하고 희망 섞인 예측을 쏟아내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날 선 감정들이 부딪치며 내는 굉음에 귀가 먹먹하다. 광장을 지날 때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려오는 날 선 언어에 저절로 낯이 찌푸려진다. 증오와 선동, 냉소와 저주의 언어를 들을 때마다 채찍에 맞은 듯 가슴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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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우리는 선택 앞에 서 있다 국어사전은 삼세판을 ‘더도 덜도 말고 꼭 세 판’이라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지만 삼세판의 심리를 오롯이 드러내지는 못한다. 우연이 작동할 가능성이 많은 단판 승부는 재도전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 승자는 안도하지만 패자는 쉽게 승복하기 어렵다. 경쟁이 치열하고, 사회적 긴장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배제의 논리가 기승을 부린다. 우리 사회에 삼세판의 여백은 사라지고 사회적 낙인찍기가 만연하고 있다. 낙인찍기는 어떤 사람의 특정한 행동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의 존재에 대한 단정적 평가이기에 가혹하다. 낙인찍힌 사람들은 모든 삶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 같은 암담함을 느낀다. 그 폐쇄된 어둠은 일쑤 자기 비하 혹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배우 김새론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가혹하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적 사건이다. 우리 사회를 ‘오징어 게임’의 실사판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살벌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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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지옥에서 벗어날 용기 희망의 조짐과 절망의 조짐이 교차하는 나날이다. 역대 최대 규모라는 LA 산불은 사람들이 애써 일군 삶의 터전을 초토화시킨 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기후위기가 초래할 지구적 재앙의 서곡인가 싶어 아뜩해진다. 그 혼란의 와중에도 빈집에 들어가 약탈을 감행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고, 약탈자 가운데는 소방관의 복장까지 갖춰 입은 이들도 있다 한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재난 속에 피어나는 인정의 꽃도 있다. 기쁨은 개별적이지만 고통은 보편적이다. 많은 자원봉사자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서고 있다. 미국의 작가 리베카 솔닛은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라는 부제가 붙은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자연이 한번 손을 대면 전 세계가 친구가 된다”고 말한다. 타자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이야말로 분열된 세상의 치유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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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명랑하게 저항하는 사람들 “이름도 모르는, 이름을 알 수도 없는, 알고자 할 필요조차도 없는 씨알 여러분! 하늘의 맑음, 땅이 번듯함 속에 안녕하십니까? 물의 날뜀, 바람의 외침 속에 씩씩하십니까?” 함석헌 선생이 ‘씨알의 소리’ 1974년 6월호를 통해 독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인사말이다. 긴급조치가 발령되어 엄혹했던 시기, 모두가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던 때 그는 독자들의 안부를 묻는다. 그냥 잘 있느냐는 인사가 아니라 정신이 살아 있냐고 묻는 것이다. 그때로부터 꼭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인사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으밀아밀 계엄을 모의하고 실행한 이들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어둠은 치밀하고 끈질기고 강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