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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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경계선 위에서 살아가기 낯선 자리에서 누군가를 마주할 때, 우리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탐지기가 작동한다. 상대의 말투, 표정, 그리고 전해지는 분위기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거리를 가늠한다.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녹아내리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다. 매스컴이나 글을 통해 이미 나를 접한 이들은 마치 오랜 지인을 대하듯 편안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익숙함은 우리 몸과 마음에 자리 잡은 경계의 문턱을 낮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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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풀잎의 낮은 연대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헌팅턴. ‘미국 민주주의의 심장이자 예언자’라 일컬어지는 시인 월트 휘트먼의 생가를 찾았다. 기념관은 스산한 겨울 날씨 탓인지 쓸쓸했지만, 시인의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는 집 안으로 들어서자 160년 전 그가 마주했던 시대의 고뇌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남북전쟁이라는 미증유의 비극 속에서, 그는 어떻게 적과 아군이라는 선명한 분열을 넘어 모든 생명의 존귀함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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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강보에 싸인 희망 성탄절 무렵, 미국의 생태학자 로빈 월 키머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 그의 가족은 고향 마을을 떠나 켄터키로 이주해 살았다. 이웃들은 모두 가난했다. 어느 날 그들은 속칭 샷건 하우스라 불리는 판잣집에 사는 헤이즐 바넷이라는 늙은 이웃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여인은 “밤에 당신네 불을 보는 게 좋아요. 이웃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라고 말하며 그들을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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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칭찬이라는 시험 번잡한 일상에 지친 마음을 잠시나마 내려놓으려고 가끔 산에 오른다. 인적이 드문 산길을 걷노라면 가쁜 숨 사이로 노랫가락이 절로 흘러나온다. “떡갈나무 숲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길래,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지요, 나 혼자 마시곤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르다가 흠칫 놀란다. 샘물을 홀로 누리겠다는 심사가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미심쩍어서다. 소중한 것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헤아려져, 이내 그 상황을 수긍하고 만다. 사람의 발길이 잦아지면 물은 흐려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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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우리 내면에 남아 있는 선의 불씨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뻔뻔하게 자기 이익만 챙기거나 누구나 아는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부인하는 사람을 볼 때 터져나오는 탄식이다. 이 말에는 양심이야말로 사람다움을 가늠하는 척도라는 가치판단이 들어 있다. 문제는 자기 잇속에 매몰되어 사는 사람은 이런 탄식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양심을 가리키는 헬라어 ‘쉰에이데시스’와 라틴어 ‘콘스키엔티아’는 공히 ‘함께 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누구와 함께 안다는 것일까? 일단 나와 마주 서 있는 타자가 떠오른다. 중국 후한 시대의 관리였던 양진은 옛 동료인 왕밀이 “밤이 깊어 아무도 모릅니다”라고 말하며 뇌물을 바치려 하자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단 말인가”라며 그를 엄히 꾸짖었다. 양진은 양심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하지만 ‘함께’가 근원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양심은 자기 안에 내재된 도덕 법칙이다. 성찰이 자기와의 대화인 것처럼 양심은 도덕적 자아를 포기하려는 순간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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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고향이 된 사람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나날이다. 종종거리며 거리를 걷는 이들의 표정이 어둡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느긋하고 한적한 평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서, 남들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저마다 자기를 몰아댄다. 분주함이 신분의 상징이 된 시대다. 가속화하는 시간에 떠밀리며 살기에 늘 숨이 가쁘다. 회복 탄력성이 줄어들어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낸다. 몸이 발하는 멈춤 신호 앞에서도 멈추지 못해 탈이 나곤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탄 이들은 좀처럼 멈추지 못한다. 멈추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추월할 거라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멈추지 못함의 부산물은 조급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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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대위법적 조화를 꿈꾼다 지난 며칠간 바흐의 음악에 흠뻑 빠져 지냈다. 독립적인 다성부(polyphony)가 어울려 음악적 건축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경이로웠다. 하나의 선율을 또 다른 선율이 따른다. 각기 독립적인 선율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때로는 대립하고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어울린다. 음들이 일으키는 긴장이 생동감을 자아내고 마침내 원만한 조화에 이르는 과정은 마치 뒤척이며 흐르던 지류들이 합류해 강을 이루고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스며드는 광경과 같았다. 바흐의 대위법은 조화로운 대립의 메타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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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인류의 오랜 꿈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미국 국립공군박물관은 라이트 형제의 고향에 자리 잡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곳에는 인류가 하늘을 향해 품었던 꿈의 궤적이 초기 비행기부터 스페이스 셔틀에 이르기까지 생생히 전시돼 있다. 공기가 희박한 고산 지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해, 극지와 사막, 우주 공간까지 인간의 상상력이 닿는 곳마다 그 발걸음은 이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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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어긋나는 말들에 대하여 언젠가 읽은 우화다. 수사자와 암소는 뜨거운 사랑에 빠졌고 둘은 한 가정을 이루었다. 수사자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매일 사냥을 해서 신선한 고기를 대접했다. 암소는 싫었지만 남편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고기를 먹었다. 암소는 날마다 남편을 위해 신선한 건초를 준비해 대접했다. 사자는 건초를 먹는 게 고역이었지만 끝까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참을성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서로 헤어지기로 했다. 그때 그들이 서로에게 한 말은 “나는 최선을 다했어”였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최선이 어리석은 최선이었다는 사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진정한 사랑은 ‘지식’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지식은 특정한 정보를 뜻하지 않는다. 사랑에 내포된 지식은 자기 욕구를 상대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그의 고통, 슬픔, 기쁨, 불안, 내밀한 상처를 알아채고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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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듣는 마음, 정치의 시작 성경은 두 여인의 분쟁을 지혜롭게 해결한 이야기로 솔로몬 왕의 통치를 소개한다. 아기를 두고 서로 자신의 자식이라 주장하던 두 여인 앞에서, 왕은 신하에게 “아이를 둘로 나누어 주라”고 명령한다. 그 말에 한 여인은 울부짖으며 말한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차라리 저 여인에게 주십시오. 아이를 죽이지 마십시오.” 다른 여인은 왕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말한다. 솔로몬은 아이를 살리려 한 여인이 진짜 어머니임을 간파하고, 아이를 그 여인에게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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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오동나무에 꽃 필 때 오동나무에 핀 연보라색 꽃이 5월의 산하를 물들이고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이 있고, 줄기가 곧아 선비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의 어느 선비는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그 곡조를 간직한다”고 노래했다. 오동나무를 볼 때마다 아주 오래전 고향 마을 풍경이 떠오른다. 마을 사람들은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마감하고 간략한 저녁 식사를 마치면 서둘러 우리 집에 오곤 했다. 트랜지스터라디오가 있던 우리 집은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었다. 라디오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하려고 마당가 오동나무 가지 위에 올려놓았다.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가다가도 연속극이 시작되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숨을 죽인 채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함께 감탄하고 웃고 눈시울을 적셨다. 연속극이 끝나면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고 그들이 비운 자리를 마치 우유를 쏟아놓은 것 같은 은하수가 채웠다. 공동체가 살아 있던 시절의 풍경이다. 결혼, 출산, 장례와 노동의 모든 과정이 마을의 일이었던 그 시절은 가난했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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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세상이 장터로 변할 때 오늘은 기독교인들이 성금요일이라 일컫는 날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기억하는 날에 ‘거룩한 성(聖)’자를 더한 것은 그의 죽음의 숭고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처형 방식이다. 사형수는 장시간의 고통을 견뎌야 하고, 완벽한 고립감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옷까지 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림으로 그들은 인간적인 품격조차 박탈당했다. 사람들의 눈에 고스란히 노출된 그들의 몸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았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이들은 조롱과 모욕을 가함으로 처형당하는 이들과 자기들을 구별했다. 인간의 잔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장에서 죽어가는 한 인간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조롱거리로 삼는 순간 인간의 소외는 절정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