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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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우리를 속박하는 편견 오랜 세월이 흘러가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일들이 있다. 누구에게나 결정적 시간이 있다. 만해 한용운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라고 노래하던 바로 그 순간 말이다. 그 순간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발생한다. 예측할 수 없기에 대비할 수도 없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런 시간을 가리켜 카이로스라 했다. 그것은 계측할 수 없는 시간, 우리 일상 속에 수직으로 파고드는 시간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일평생 몇 번은 그런 체험을 한다. 그 시간은 존재 전체를 뒤흔들어 다시는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만든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앞에서, 비겁과 안일의 유혹을 물리치고 기꺼이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오롯이 드러낸다.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지만 평생 성찰의 계기가 되는 일들도 더러 일어난다. 돌이켜 보니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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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사람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자 빌 게이츠와 멀린다의 이혼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인생의 다음 단계에서 부부로서 함께 성장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 이혼의 변이다. 언표된 말보다 숨겨진 말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부부간의 내밀한 속사정을 누가 알까? 사람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는 것이고, 그 길 위에서 누군가를 보살피고 책임을 지는 것이고, 지향을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길이 자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장애물을 피해 이리저리 에돌다보면 방향을 잃기 일쑤라는 데 있다. 프랑스 조각가 자코메티의 ‘광장을 가로지르는 남자’처럼 우리는 어딘가로 향하지만, 근원적 쓸쓸함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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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지구 문해력’을 높일 때 재·보궐 선거가 끝났다. 정부의 실정과 다수당인 여당의 무책임에 대한 국민의 추궁이 매서웠다. 승리와 패배의 요인에 대한 분석 기사들이 넘쳐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보며 시민들은 여와 야 사이에 이념이나 도덕성에 큰 차이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삶은 위태롭고 미래의 전망 또한 암울할 때 사람들이 집권 여당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경제와 정치가 우리 삶을 과잉 대표할 때 현실을 차분하게 진단하고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한 논의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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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훼손된 행성의 손님으로 살기 신도시 건설을 기획하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 비밀스러운 정보를 활용하여 그 지역의 땅을 사들였다고 한다. 친·인척이나 지인들에게 으밀아밀 정보를 건네면서 그들은 ‘꿩 잡는 게 매’라고 생각했을까? 지상에 방 한 칸 마련하려고 온갖 굴욕을 감수하며 살아온 이들의 마음에 후림불이 당겨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다 그런 거 아니냐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어쩌면 객체화된 권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일 것이다. 직무와 관련되어 취득한 정보를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것은 슬기로운 투자 생활이 아니라 직무 유기이다. 공공의 것을 사유화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죄의 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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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묵화’ 같은 세상의 꿈 생과 사의 경계선을 상정하고 살지만 삶은 언제나 그러한 인간의 가정을 배신하곤 한다. 느닷없이 닥쳐온 별리의 아픔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삶의 의미를 물어올 때면 그저 가슴만 먹먹해진다. 나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쓸쓸함, 분주하게 살고는 있지만 실상은 지향을 잃고 맴돌고 있다는 자각이 찾아올 때면 돌연 세상은 낯선 곳으로 변하고 만다. 자신의 존재를 문제로 파악하는 인간은, 부여받은 삶의 언저리를 맴돌며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바장인다. 다른 이들은 다 자기 삶에 어떤 형태로든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데, 홀로 무의미의 심연으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은 아뜩함을 호소하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지성의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해답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런 말이 지금 슬픔의 심연 앞에서 어지러움을 느끼는 이에게 무슨 위로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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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표정을 잃은 사람들 함석헌 선생은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은 참얼굴 하나 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나를 잊게 되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아지고, 남을 위해주고 싶은 마음이 파도처럼 일어나는 얼굴, 마주 앉아 그저 바라보고 싶은 얼굴 말이다. 때로는 햇빛처럼 환하게 빛나고, 풍랑 속에서도 태산처럼 평안히 잠이 들고, 세상의 온갖 아픔을 짊어진 듯 통곡할 줄도 아는 얼굴이야말로 참사람의 얼굴이 아니던가. 신산스러운 삶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들끓던 욕망이 잦아들어 담담함에 이른 얼굴과 마주칠 때가 있다. 세월이 그의 얼굴에 새겨놓은 흔적을 바라보며 우리는 안쓰러움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나 희로애락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은 오히려 낯설기만 하다. 절대적인 부동의 세계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운명의 타격이 그에게서 생기를 빼앗아간 것일까. 그 앞에 서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아 몸둘 바를 몰라 한다. 생때같은 자식들을 잃은 부모의 얼굴이 그러하고,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린 이들의 얼굴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