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최신기사
-
이희경의 한뼘 양생 대학 도서관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올해 박완서 전작을 다시 읽고 있다. 그의 거침없는 문장들과 어떤 도식적 비평으로도 가둘 수 없는 세계에 새삼 놀라는 중이다. 이렇게 일상적이고 구체적인데도, 인간의 허위와 욕망을 이토록 날카롭게 드러내는 작가는 흔치 않다. 마침, 박완서 아카이브 전시가 열린다고 해서 친구와 함께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전시회가 열리는 서울대 중앙도서관 문턱은 높았다. 어렵게 찾은 출입 회전문 앞에서 박완서 전시 장소를 묻는 우리에게 돌아온 첫 말은 “신분증 내세요”였다. 동행한 친구가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자 출입은 곧바로 가로막혔고, 다른 방법은 없겠냐고 묻자 “왜 이렇게 목소리가 커요?”라는 ‘통박’이 돌아왔다. 무안했고 위축되었다. 결국 ‘비굴 모드’로 통사정한 끝에 신용카드를 맡기고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
이희경의 한뼘 양생 명숙 언니 부고를 처음 접했을 때 오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던 때가 불과 한 달 반 전이었고, 그때만 해도 아무 낌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시간도 안 돼 여기저기서 올레 이사장 서명숙의 부고가 떴다. 3월 말에 옆구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었는데 4월7일 호스피스 병동에서 숨진 것이다. 황망했다. 서둘러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그러나 주말을 낀 제주 1박2일 왕복표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치 아이돌 공연 예매하듯, 추석 귀성열차 예매하듯 새로고침을 반복하면서 간신히 표 한 장을 구했다. 하지만 결국 문상을 가진 못했다. 공항으로 가던 도중, 제주 강풍으로 모든 항공편이 결항이라는 메시지를 받았기때문이다. 전국에 비가 내렸고, 나는 가던 길을 오들오들 떨면서 되짚어 왔다. 조금 울었는데 추위 탓인지, 슬퍼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
이희경의 한뼘 양생 살기 위해 숨는 용기 내가 속한 공동체 출신 김고은 작가가 은둔 고립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너무 희미한 존재들>을 출간했다. 그는 ‘은둔 고립’을 통계에 갇힌 사회현상으로 박제하는 대신, 에두아르 콘의 ‘혼맹’ 개념을 빌려와 존재론적 층위에서 재해석한다. 스스로를 ‘자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세계와의 연결이 끊겨버린,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정의한 것이다. 관점을 이렇게 이동시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까? -
이희경의 한뼘 양생 새해에 하는 ‘뻔한’ 말 한국의 새해는 두 번이다. 이를 ‘이중과세(二重過歲)’라 비판하며 하나로 줄이자는 말이 나오던 시절도 있었지만,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새해가 두 번이라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양력 새해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어도, 음력 새해라는 ‘패자부활전’이 다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번 설 연휴에도 1월 초에 써놓았던 문구를 다시 읽었다. “단정히 살고, 치밀하게 생각하고, 진득하게 공부하기.” -
이희경의 한뼘 양생 마르잔, 마흐사, 나르게스를 기억하며 이란을 잘 몰랐다. 축구, 팔레비, 호메이니 등 몇개의 단편적 사실들과 ‘핵’ ‘하마스’ ‘악의 축’ 같은 미국적 프레임이 인상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2008년 흑백의 강렬함과 소박함이 돋보이는 2D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를 만났다. 케첩 바른 감자칩과 아디다스 운동화를 좋아하고 이소룡을 동경하며, “왕에게 죽음을!”을 외치던 꼬마 ‘마르잔’. 그 천방지축 소녀의 성장기를 따라가면서 이란은 내게 ‘사람이 사는 땅’으로 실감되었다. -
이희경의 한뼘 양생 ‘누가’ 돌봄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지난 10월, 제주에서 작은 포럼이 열렸다. 20년 전 서간집 <경계에서 말한다>를 함께 펴낸 한·일 양국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조한혜정과 우에노 지즈코가 희수를 맞아 다시 뭉친 자리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오늘날의 페미니즘’ ‘돌봄 사회’ ‘나이듦과 죽음’ 등을 주제로 진행된 이틀간의 대담 내내 뚜렷한 차이를 드러냈다. 서로를 ‘혜정’ ‘지즈코’라고 다정히 부르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덕분에 관전하던 사람들도 꽤 쫄깃한 시간을 보냈고, 다들 장외에서 이 차이를 해석하고 토론하느라 ‘불타올랐다’.
-
이희경의 한뼘 양생 무덤의 미래 4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묘를 이장(移葬)했다. 당시 정신없이 구했던 묘지는 경기도 모 공원묘지에서도 거의 산꼭대기 자리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장례식 풍경. 사람들이 무거운 관을 낑낑대며 운반했고, 어린 동생들은 눈 쌓인 산에서 계속 미끄러지면서 울었다. 지금은 접근성이 좋아졌다지만, 노쇠한 어머니에게 그곳은 어느 날부터 갈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1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집 근처에 평장묘를 마련했고, 이번에 그곳으로 아버지를 이장한 것이다.
-
이희경의 한뼘 양생 새벽에 만나는 붓다 새벽 낭송을 한다. 상반기에는 <주역>을, 요즘은 <불경>을 읽고 있다. 발심한 친구들이 새벽 정해진 시간에 온라인으로 만나 40분 정도 한 단락씩 돌아가며 낭송한다. 설명도 토론도 없이 오로지 낭송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간은 소리의 리듬과 공명이 텍스트 이해를 넘어 타자에게 감응하는 수행, 몸과 마음이 함께 깨어나는 리추얼의 시간이 된다.
-
이희경의 한뼘 양생 다른 ‘소년의 시간’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은 충격적이었다. 열세 살 소년이 또래 소녀를 칼로 살해한 뒤 자기 집에서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해간다. 카메라는 점층적으로 학생과 교사의 불통이 일상화된 학교, 자녀 부양에 최선을 다하지만 닫힌 방문 안에서 아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는 부모, 그리고 오직 ‘칼’이라는 물리적 증거만 찾아 헤매는 경찰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소년의 시간’에 얼마나 무지한지가 드러난다.
-
이희경의 한뼘 양생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 같은 베이비붐 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경험하며 성·건강·삶의 방식 전반에서 ‘자기결정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젊을 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단어가 가장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차 ‘죽음의 자기결정권’에 마음이 간다. 당연히 스콧 니어링에 매혹됐다. 그는 백 살 되는 날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결심하고, 6주간 단식 끝에 생을 마쳤다. 나도 니어링처럼 죽어야지. 그런데 어느 날 선배의 일갈이 날아왔다. “얘, 니어링처럼 평생 자급자족 육체노동을 하고, 자연식으로 간결하게 살아야 그렇게 죽는 거야. 과자도 못 끊으면서 어떻게 니어링처럼 죽니?” 아, 난 니어링처럼 죽기는 틀렸구나.
-
이희경의 한뼘 양생 여성할당제, 형식 아닌 비전으로 개인적인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나는 이재명 대통령이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초등입시반’ 같은 아동학대 수준의 경쟁교육이 사라지고, 가난한 노인이 고립된 채 살다가 6개월 만에 발견되는 일이 없으며, 외모나 성 정체성 때문에 차별받거나 놀림거리가 되지 않고, 노동자가 혼자 일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몸이 조각나는 일이 더는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정권이 성공했으면 좋겠다.
-
이희경의 한뼘 양생 곰과의 위험한 공존 매년 이맘때 즐거움은 환경영화제 출품작을 감상하는 일이다. 올해 나의 ‘원픽’은 안드레아스 피흘러 감독의 다큐멘터리 <곰과의 위험한 공존>이다. 곰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존재다. 영화 <가을의 전설>에서 브래드 피트가 침대가 아닌 숲에서 곰과 결투를 벌이며 죽음을 맞이할 때, 나는 영화의 대사처럼 그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여겼다. 장자크 아노의 <베어>를 통해서도 나는 곰의 힘, 용기, 지혜, 관용에 깊이 매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