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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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가을, 곰 소풍 지난 토요일, 드디어 반이, 달이를 직관했다. 단풍철 주말이라 청주까지 가는 길은 밀렸지만, 몇년 동안 기다렸던 일이라 내내 마음이 들떴다. 다행히 행사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가장 먼저 이 아이들을 보러 갔다. 한 녀석만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유유자적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누굴까? 반이? 달이? 둘은 형제지간이라 얼굴은 비슷하다. 다만 반이는 가슴무늬가 크고 짙으며, 달이는 좀 옅고 좁다. 맞다. 반이, 달이는 2018년에 구출되어 현재 청주동물원에서 살고 있는 사육곰이다. 사육곰이란 용어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생물종 분류로는 반달가슴곰이지만, 행동이 민첩해 나무를 잘 타고, 꿀, 과일, 견과류 같은 식물성 먹이를 선호하며, 높은 지능을 가진 야생 반달가슴곰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된 어떤 생물의 불행한 역사와 현재의 곤경을 동시에 표명한다. 그들은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약재로 쓰였던 웅담 때문에 처음에는 무분별한 사냥의 대상이 되고, 그다음에는 사육의 대상이 되면서 이제는 야생동물도 반려동물도 가축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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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함께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우리 같은 ‘마처’ 세대(부모를 돌보는 ‘마’지막 세대, 자식들에게 돌봄을 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의 가장 큰 고민은 “늙으면 누가 돌봐주지?” 아닐까? 현실적으로 4인 1실의 요양원 아니면 어림잡아 보증금 2억원, 월 150만원 이상을 내야 하는 실버타운, 이 양자택일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메종 드 히미코>. 도쿄에서 게이바를 운영하던 히미코가 갑자기 은퇴, 바닷가 낡은 호텔을 사서 게이 양로원을 만들었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가 영감을 줬다. 게이는 아니지만 나도 그와 같은 양로원을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살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든든했다. 영화에서는 히미코의 젊은 애인(무려 ‘오다기리 조’다!)이 암에 걸린 히미코 대신 양로원을 운영하며 히미코의 딸을 찾아내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도 한다. 오, 우리의 사설 양로원도 주변 청년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겠네. 그런데 노인복지학 전공 후배의 일갈, “언니, 그거 돈도 엄청 많이 들고, 운영하려면 대관업무로 골치 썩을 텐데, 늙어서 그걸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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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어느 죽음 20일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무 징조도 없이 너무 황망하게. 근래 어머니는 컨디션이 좋으셨다. 나는 낙상만 조심하면 된다며 잔소리했고, 어머니는 “넘어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냐”며 볼멘 대꾸를 하곤 했다. 그런데 정말 보행기 바퀴가 무언가에 걸리면서 크게 넘어지신 것이다. 이어진 응급실 뺑뺑이. 어머니가 다니던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는 아예 환자를 받지 않았고, 다른 곳은 긴급수술이 필요해도 자기들은 못한다고 했다. 결국 다른 병원으로 갔지만 거기서도 응급실 밖에서 30분 넘게 대기해야만 했다. 나는 까무룩 의식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애간장이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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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액티브 시니어’에서 도망치기 전철에서 그 광고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인지부조화에 빠졌다. 유명 연예인의 얼굴과 그 밑에 나란히 달린 ‘웨딩’ ‘어학’ ‘여행’ ‘상조’ 사이의 연관성을 전혀 알아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신문 하단의 통광고를 보았을 때도 비슷했다. 거기 적혀 있는 ‘액티브 시니어를 위한 라이프 스타일 채널’이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요즘 상조회사가 장례 주관을 넘어 ‘토털 라이프 케어 서비스’ 회사로 변신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신문 광고 역시 아동 학습지로 유명한 모 기업의 새로운 시니어 사업에 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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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해초를 구해줘 얼마 전 막을 내린 국제환경영화제에서 <해초를 구해줘>를 가장 먼저 봤다. <나의 문어 선생님>처럼 환상적인 바닷속을 볼 수 있고 재밌고 기발한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소개글에 끌렸기 때문이다. 내용은 캐나다의 젊은 여성 변호사 프랜시스가 다시마를 어렵게 구해 바닷속에 심고 키우느라 ‘생고생’을 하는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어릴 때 가족과 함께 여행한 캐나다 서부 해안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여력이 날 때마다 카리브해 등에서 환경운동을 하고 다시 밴쿠버섬으로 돌아와 해변을 산책한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바다가 변한다. 불가사리 수가 점점 줄더니 어느 날 단박에 모두 사라지고 해달도 떼죽음을 당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해양숲 전체가 파괴될 테다. 프랜시스가 찾은 해법은 해초 양식이었다. 알다시피 해초는 바닷속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해양 산성화를 감소시키고, 다른 해양 생물에게 서식지를 제공하며, 양식 과정에서 별다른 폐기물을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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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몸의 일기를 쓴다 얼마 전 후배가 74세의 딩크족 노부부에 대한 다큐 한 편을 소개했다. 핵심은 ‘느림’이었다. 70대가 되면 ‘후다닥’ 밥을 차리는 게 불가능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노년 코하우징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나에게 후배는 “그냥 넓은 집에서 친구들과 다 같이 사세요. 70, 80대가 되어서 각자 공간을 갖는 게 의미가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사실 그 프로젝트에서 비용이나 건축법 못지않게 고민이 된 것은 ‘늙은 몸’에 대한 구체성이었다. 건물 안에 엘리베이터가 필요할까? 몇살까지 운전할 수 있을까? 늙은 몸이 도통 가늠되지 않을 때 나는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를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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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나도 주치의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깨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관절 전문병원’부터 갔다. 특정 자세를 취할 때 통증이 온다고 하자 의사는 MRI를 찍으라고 했다. 비싸서 좀 망설였지만 찍었다. 진단은 회전근개파열이었다. 의사는 수술해야 한다면서 다짜고짜 수술 일정을 잡고 가라고 했다. ‘회전근개’라는 단어도 처음 듣는 나에게 병의 원인 혹은 수술 이외의 치료 방법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정신이 혼미해진 채로 집에 돌아온 나는 ‘회전근개파열’을 폭풍 검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라인상의 산더미 같은 정보 속에서 갈피를 잡기란 힘들었다. 나는 동네 정형외과에 또 갔다. 그 의사는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비급여 항목인 DNA 주사를 권유했다. 뭔가 개운치 않아서 이번엔 재활의학과를 찾아갔다. 여기서도 수술보다 보존치료를 권했다. 하지만 처방은 초음파를 찍고 도수치료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역시 모두 비급여 항목이다. 나는 결국 대학병원에 갔다. 몇달 기다려서 어렵게 만난 교수는 “회전근개파열 맞고요, 지금은 수술하지 않아도 되고요, 6개월 후에 다시 봅시다. 전공의가 가르쳐주는 밴드 운동 열심히 하세요”라고 짧게 말했다. 그날 의사를 만난 시간은 채 3분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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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다시, 공부란 무엇인가 새삼 공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내가 속한 작은 인문학공동체와 나의 공부에 대한 질문이다. 신도시 주택가에서 16년 전 처음 마을인문학 공동체를 열었을 때, 세상에서는 우리를 ‘공주(공부하는 주부)’로 불렀다. 당황했지만 현실이었다. 이후 ‘공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민은 “다른 공부가 다른 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다시 모스, 마르크스, 폴라니 등의 공부로 연결되고, 또다시 마을작업장, 마을화폐의 실험으로 나아갔다. 이후 청년들이 오면 “청년들과 중장년 세대의 연대”라는 화두를 붙잡고, 또 밀양과 엮이면 “에너지 정의와 탈성장의 삶”이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공부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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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아들 돌봄 시대가 오고 있다 노인은 병원 순례가 일상인지라 나 역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일이 점점 잦아진다. 그때마다 다른 보호자들을 관찰하게 되는데, 좀 티격태격한다 싶으면 영락없이 우리처럼 모녀지간이다. 상대적으로 며느리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반면에 병원 수발을 하는 아들은 많아졌다. 어머니 휠체어를 밀고 와서 접수하는 젊은 아들, 초고령의 아버지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고령의 아들도 보인다. 일본은 이미 가족 내 돌봄의 3분의 1을 남성이 담당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남성 돌봄에 대한 공식 통계가 없지만 내 주변엔 이런 사례가 적지 않다. 우선 60대 은퇴자인 지인은 은퇴와 동시에 파킨슨병에 걸린 장모를 아내와 함께 집에서 돌본다. 흔히 ADL(Activities of Daily Livig)이라고 부르는 식사, 보행, 용변, 목욕 등의 일상 돌봄은 아내가 맡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깜빡깜빡 인지가 저하되는 장모님의 말벗을 해드리고, 화초를 함께 가꾸는 등의 정서적 지원은 자기 몫이라 여긴다. 물론 기꺼이 수행하지만 그렇다고 은퇴 이후 꿈꿨던 제2의 인생이 미뤄지고 있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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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요가하는 마음 난 요가 마니아다. 특별한 장비 없이 요가 매트 한 장과 그것을 깔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되는 단출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갱년기 극복 프로젝트로 댄스 스포츠를 예찬하거나 헬스장에서 체계적인 PT를 받을 것을 권유했을 때도 의연히 요가 중심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그렇다고 요가 생활이 늘 소박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요가계의 샤넬이라고 불리는 고가의 M사 매트를 휴대용까지 두 개나 가지고 있으며, 여행 중 숙소 베란다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나무자세를 하는 모습을 찍어 주변에 은근히 뻐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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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어느 날 밀양, 그리고 잔소리와 밥 지난 주말 친구들과 함께 밀양에 갔다. 정확하게는 한때 ‘밀양의 전쟁’이라고 불렸던 탈송전탑 투쟁의 주역, ‘밀양 할매’들을 만나러 갔다. 더불어 2012년 이후 꾸준히 사람과 감과 책이 오가면서 정분을 쌓아온 단장면의 박은숙, 권귀영 등도 보고 싶었다. 여전히 밀양에는 한전의 보상금 수령을 거부하며 버티는 100여가구의 사람들이 남아 있지만, 할매들은 대부분 쇠잔해져 잘 모이지 못한다고 했다. 이번에 우리가 뵐 수 있던 할매도 덕촌 할매(89세), 동래 할매(82세) 두 분이었다. 140㎝, 34㎏의 바싹 마른 삭정이 같은 몸으로 산꼭대기 움막 농성장에서 꼬박 7개월을 살기도 했던 덕촌 할매는 이제 더 작아진 몸으로 딸네 바로 옆의 작은 농막에서 지내고 계셨다. 우리를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멀리서 온 연대자”에 대한 반가움은 감추지 않으셨다. 동래 할매는 우리를 많이 기다리신 눈치였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수 농사를 지었다는 땅콩과 생강꽃차 그리고 과일을 계속 내오셨다. 그런데 위암 수술로 15㎏이 빠져 너무 수척해진 나머지 더 이상 전국을 다니던 전투적 투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올해도 농사를 지어 꽃차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시는 목소리가 너무 힘없고 쓸쓸해서 난 좀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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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1월9일 이태원 특별법이 통과될까 심란한 일은 너무 많고 되는 일은 너무 없는 시절이라, 화병 나지 않으려고 뉴스를 ‘끊고’ 산다는 사람이 주변에 늘고 있다. 동생은 손흥민 축구 시합을 보는 낙에, 지인 한 명은 판다 푸바오를 보는 재미에 산다고 했다. 나 역시 뉴스를 설핏 보고 대부분 흘리면서 산다. 그러다 지난해 12월20일, 눈 내린 영하 7도의 언 땅에 이마와 두 팔꿈치, 두 무릎 등 온몸을 붙이며, ‘10·29 이태원 참사 특별법’ 국회 본회의 통과를 촉구하는 이태원 유가족의 오체투지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날은 이태원 참사 418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세월은 “차라리 (친구와) 같이 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심정으로, 회사 동료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다섯 개의 가면을 쓰고 다니는” 기분으로, 또한 “아직도 그 시간만 되면 심장이 떨리”거나 혹은 “왜 하필 우리였을까, 조금 억울해”하면서(<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이태원 생존자와 유가족이 겨우겨우 버텨온 시간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로 418일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