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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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다시, 공부란 무엇인가 새삼 공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내가 속한 작은 인문학공동체와 나의 공부에 대한 질문이다. 신도시 주택가에서 16년 전 처음 마을인문학 공동체를 열었을 때, 세상에서는 우리를 ‘공주(공부하는 주부)’로 불렀다. 당황했지만 현실이었다. 이후 ‘공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민은 “다른 공부가 다른 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다시 모스, 마르크스, 폴라니 등의 공부로 연결되고, 또다시 마을작업장, 마을화폐의 실험으로 나아갔다. 이후 청년들이 오면 “청년들과 중장년 세대의 연대”라는 화두를 붙잡고, 또 밀양과 엮이면 “에너지 정의와 탈성장의 삶”이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공부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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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아들 돌봄 시대가 오고 있다 노인은 병원 순례가 일상인지라 나 역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일이 점점 잦아진다. 그때마다 다른 보호자들을 관찰하게 되는데, 좀 티격태격한다 싶으면 영락없이 우리처럼 모녀지간이다. 상대적으로 며느리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반면에 병원 수발을 하는 아들은 많아졌다. 어머니 휠체어를 밀고 와서 접수하는 젊은 아들, 초고령의 아버지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고령의 아들도 보인다. 일본은 이미 가족 내 돌봄의 3분의 1을 남성이 담당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남성 돌봄에 대한 공식 통계가 없지만 내 주변엔 이런 사례가 적지 않다. 우선 60대 은퇴자인 지인은 은퇴와 동시에 파킨슨병에 걸린 장모를 아내와 함께 집에서 돌본다. 흔히 ADL(Activities of Daily Livig)이라고 부르는 식사, 보행, 용변, 목욕 등의 일상 돌봄은 아내가 맡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깜빡깜빡 인지가 저하되는 장모님의 말벗을 해드리고, 화초를 함께 가꾸는 등의 정서적 지원은 자기 몫이라 여긴다. 물론 기꺼이 수행하지만 그렇다고 은퇴 이후 꿈꿨던 제2의 인생이 미뤄지고 있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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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요가하는 마음 난 요가 마니아다. 특별한 장비 없이 요가 매트 한 장과 그것을 깔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되는 단출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갱년기 극복 프로젝트로 댄스 스포츠를 예찬하거나 헬스장에서 체계적인 PT를 받을 것을 권유했을 때도 의연히 요가 중심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그렇다고 요가 생활이 늘 소박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요가계의 샤넬이라고 불리는 고가의 M사 매트를 휴대용까지 두 개나 가지고 있으며, 여행 중 숙소 베란다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나무자세를 하는 모습을 찍어 주변에 은근히 뻐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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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어느 날 밀양, 그리고 잔소리와 밥 지난 주말 친구들과 함께 밀양에 갔다. 정확하게는 한때 ‘밀양의 전쟁’이라고 불렸던 탈송전탑 투쟁의 주역, ‘밀양 할매’들을 만나러 갔다. 더불어 2012년 이후 꾸준히 사람과 감과 책이 오가면서 정분을 쌓아온 단장면의 박은숙, 권귀영 등도 보고 싶었다. 여전히 밀양에는 한전의 보상금 수령을 거부하며 버티는 100여가구의 사람들이 남아 있지만, 할매들은 대부분 쇠잔해져 잘 모이지 못한다고 했다. 이번에 우리가 뵐 수 있던 할매도 덕촌 할매(89세), 동래 할매(82세) 두 분이었다. 140㎝, 34㎏의 바싹 마른 삭정이 같은 몸으로 산꼭대기 움막 농성장에서 꼬박 7개월을 살기도 했던 덕촌 할매는 이제 더 작아진 몸으로 딸네 바로 옆의 작은 농막에서 지내고 계셨다. 우리를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멀리서 온 연대자”에 대한 반가움은 감추지 않으셨다. 동래 할매는 우리를 많이 기다리신 눈치였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수 농사를 지었다는 땅콩과 생강꽃차 그리고 과일을 계속 내오셨다. 그런데 위암 수술로 15㎏이 빠져 너무 수척해진 나머지 더 이상 전국을 다니던 전투적 투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올해도 농사를 지어 꽃차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시는 목소리가 너무 힘없고 쓸쓸해서 난 좀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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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1월9일 이태원 특별법이 통과될까 심란한 일은 너무 많고 되는 일은 너무 없는 시절이라, 화병 나지 않으려고 뉴스를 ‘끊고’ 산다는 사람이 주변에 늘고 있다. 동생은 손흥민 축구 시합을 보는 낙에, 지인 한 명은 판다 푸바오를 보는 재미에 산다고 했다. 나 역시 뉴스를 설핏 보고 대부분 흘리면서 산다. 그러다 지난해 12월20일, 눈 내린 영하 7도의 언 땅에 이마와 두 팔꿈치, 두 무릎 등 온몸을 붙이며, ‘10·29 이태원 참사 특별법’ 국회 본회의 통과를 촉구하는 이태원 유가족의 오체투지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날은 이태원 참사 418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세월은 “차라리 (친구와) 같이 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심정으로, 회사 동료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다섯 개의 가면을 쓰고 다니는” 기분으로, 또한 “아직도 그 시간만 되면 심장이 떨리”거나 혹은 “왜 하필 우리였을까, 조금 억울해”하면서(<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이태원 생존자와 유가족이 겨우겨우 버텨온 시간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로 418일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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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마르지 않는 공동창고, ‘무진장’ 한없이 크고 많다는 뜻의 무진장(無盡藏). 원 출전이 <유마경>으로 부처님의 끝없는 자비심과 공덕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중국 남북조 시대에는 가난한 중생들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무진장’이라는 구제적 금융기관이 생겨나기도 했다. 우리 공동체에도 그와 유사한, ‘마르지 않는 공동창고, 무진장’이 있다. 시작은 7년 전이었다. 당시 공동체에는 갑작스러운 파산, 실직, 질병 등으로 삶이 취약해진 회원이 여럿 생겼다. 뭔가 공동의 대책이 필요했다. ‘다른 앎’은 ‘다른 밥’으로 나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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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상옥과 채영을 응원하며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보았다. 섭식장애를 겪는 딸 채영과 그 엄마 상옥의 이야기이다. 첫 장면의 채영은 자신이 잘한 일을 칭찬해보라는 상담사의 말에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어 상옥의 등장. 흰머리가 섞인 부스스한 단발, 주름이 깊이 팬 얼굴, 슬픈 눈의 그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엄마를 이해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다는 채영을 끌어안고 상옥은 “아프지만 마”라고 되뇌며 흐느낀다. 나는 명치끝이 아려온다. 상옥은 소위 386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소련의 멸망과 더불어 운동권이 흩어졌을 때, 가진 것 없는 싱글맘 상옥은 밥벌이에 나서야 했다. 삶의 전망 없이 과외로 근근이 생계를 꾸리는 일상은 지리멸렬했다. 상옥은 30만원 남짓한 전 재산과 단출한 살림살이를 빨간 ‘마티즈’에 싣고, 아홉 살 채영이와 함께 무주에 있는 대안학교로 향한다. 월급 50만원의 기숙사 사감으로 취직한 것이다. 다행히 그곳의 상처 많은 청소년을 돌보는 일에서 그는 삶의 열정을 다시 찾는다. 대신 채영은 조용히 뒷전으로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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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친애하는 나의 젊은 친구들 나는 한때 청년들의 ‘멘토’였다. 맥락이 있다. 우리 공동체에는 초창기부터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자퇴한 채 공부하러 온, 미래가 막막한 20대 전후의 청년들이 많았다. 중년들이라고 불안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학력, 삶의 경험, 인맥, 경제적 자산 등에서 청년들보다는 좀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정처 없는 청년들의 삶에 작은 버팀목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동료 시민으로 청년과 연대하기 위해 호주머니를 털어 청년기금과 청년기숙사를 마련했다. 청년 다섯 명은 마음을 내어 ‘공부와 밥과 우정이 함께 가는 청년 인문학 밴드’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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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병뚜껑을 열지 못한다고? 발단은 한 회원이 홈페이지에 올린 생활 글이었다. 3년 정도 느슨하게 저강도 필라테스를 했더니 선명한 복근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힘이 붙어 예전보다는 병뚜껑을 좀 쉽게 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거기에 줄줄이 붙은 댓글이었는데, 이슈는 운동이 아니라 병뚜껑이었다. 한 친구는 방아쇠수지증후군 때문에, 다른 친구는 약해진 악력 때문에 병뚜껑을 못 딴다고 했다. 압권은, 잼을 샀는데 뚜껑을 못 열어 남편 퇴근을 기다렸고, 생수병 뚜껑을 못 열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했다는 어떤 회원의 고백이었다. 결국 젊은 회원 한 명이 ‘다용도 만능 뚜껑 따개’를 구매해 모두에게 안기면서 이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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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사순이가 남긴 질문 사순이가 죽었다. 사설 농장에서 20년간 사람들의 볼거리로 살다 죽었다. 길이 2m, 무게 150㎏의 몸으로 4평 남짓한 사육장에 평생 갇혀 살다 죽었다. 어느 날 잠시 열린 문틈으로 첫 외출을 나섰다가 1시간10분 만에 죽었다. 처음 흙을 밟고 농장에서 20m쯤 떨어진 숲속으로 걸어가 가만히 앉아 있다 죽었다. 발견 즉시 사살된 이유는 사순이가 ‘맹수’라는 점이었다. 그는 지구에 250마리 정도만 남은 멸종위기 2급의 ‘판테라 레오(Panthera Leo)’종 암사자였다. 2023년 8월14일 오전 8시34분, 경북 고령군 숲에서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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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K장녀의 ‘독박 돌봄기’ 올해 초 독립선언을 했다. 정확히는 더 이상 어머니를 모시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어머니를 부양한 지난 9년 동안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 뻔히 아는 동생들은 군말이 없었다. 나의 대안은 4남매가 더 확실히 돌봄을 분담하고 책임지는 것이었다. 돌아가면서 한 달씩 어머니 모시고 살기. 그리고 병원케어는 신경외과, 정신과, 심장내과, 척추센터 등으로 나누어 담당하기. 이것에도 동생들은 이견이 없었다. 작년 초에도 나는 “돌봄을 하는 자도 돌봄이 필요하다”며 한 달에 일주일은 돌봄 휴무를 갖겠다고 말했다. 내가 우울증에 걸려 나가자빠질까 봐 걱정하던 동생들은 동의했고, 한 달에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어머니 식사를 책임지고, 병원을 모시고 가고, 복지사·요양보호사 등 다른 돌봄 관련자들과 필요한 소통을 하고, 어머니 말벗을 해드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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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녹색평론’이 돌아왔다 ‘녹색평론’이 돌아왔다. 잃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것이 있는데 나에게는 2021년 휴간한 ‘녹색평론’이 그랬다. 구독자 수의 감소와 재정위기라니, 나도 일조했구나,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받아 쌓아놓기만 했으니까.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서둘러 지나간 잡지들을 읽어보고, 구독을 유지하고, 후원회원이 되어 ‘녹색평론’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았던 것일까? 다행히 ‘녹색평론’은 약속대로 올여름 돌아왔다. 며칠 전 김종철 선생님의 3주기 추모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행사는 조촐하고 단정했다. 난 풀무학교 학생들의 낭독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글을 고를까 고민했으나 선생님의 그 어떤 이야기든 내면을 돌아보게 해주는 글이라는 점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들은 “마음만으로 되겠냐고 하겠지만, 마음 없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끝나는 글을 읽었다. 나는 ‘녹색평론’의 좋은 글을 읽을 때마다 왠지 슬픔이 차오르는데 비슷한 결일 것이다. ‘네’가 아니라 ‘내’가 저지르고 있는 짓에 대한 물음, 어리석음에 대한 안타까움. 슬픔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