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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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일삼아 연대! 시작은 ‘어쩌다’였다. 2011년 1월6일 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진숙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35m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고, 그해 7월 나와 친구들 몇명은 그 투쟁에 연대하는 ‘2차 희망버스’에 탑승했다. 그렇다고 대단한 대의명분을 갖고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에” “친구가 가자고 해서” “희망버스라는 방식이 신선해서” 어쩌다 동참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1년 후 우리는 또다시 삼성반도체 백혈병 유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게 된다. 한 세미나 회원이 이 소식을 전했고, 어쩌면 무심히 넘길 수도 있는 이 문제를 몇몇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공론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삼성에 취직한 지 1년8개월 만에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2007년 3월 사망한 당시 스물셋 황유미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삼성반도체 작업장의 현실을 폭로하는 <먼지 없는 방> 등을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다음해 개봉된 영화 엔딩 크레디트 펀딩 명단에서 공동체 이름을 발견했을 때 매우 뿌듯했다. 지리멸렬한 삶에 작은 숨통이라고 틔우려고 시작한 공부였는데 진정한 구원은 내 삶 바깥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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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건강이 신(神)이 되어버린 사회 조인성, 이성민, 김남주, 황정민, 이병헌, 비, 공유, 이선균, 전지현, 지성, 이정재, 송중기, 유재석, 정우성…. 이들의 공통점은? 얼마 전에 치러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과 관련이 있냐고? 아니다. 힌트로 BTS, 트와이스, 손흥민, 임영웅, 김호중, 박재범, 김신록, 그리고 아이유를 추가하면? 정답은 약 광고에 출연하는 톱스타 혹은 라이징 스타이다. 얼마 전 나는 흑백영화 같은 30초짜리 광고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게 관절 영양제 광고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싸잡아 약 광고라고 하면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면 광고에 등장하는 비타민, 유산균, 오메가3, 진통제, 자양강장제, 뇌 영양제, 눈 영양제 등이 모두 의약품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광고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일반의약품과는 구별되는, 이른바 ‘건강기능식품’이다. 의약품은 “질병의 예방과 치료”가 목적이고, 건강기능식품은 몸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지만 나 같은 일반인은 그냥 인터넷으로 살 수 있는 것(건강기능식품)과 살 수 없는 것(의약품)으로 구분하는 게 이해하기 더 쉽다. 어쨌든 건강기능식품 시장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6조원이 넘는 규모로 성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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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영초언니’에게 한발 가까이 지난 주말 요양원에 있는 선배를 보러 갔다. 지난해 말 첫 방문 이후 3개월 만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선배 옆으로 바짝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언니~” “언니~” “나, ○○야” “나, ○○야” “○○이 왔어요” “○○이 왔어요” 반향어를 사용하는 것은 지난번과 마찬가지였다. 한때 운동권의 대모라고 불렸던 선배가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것은 20여년 전이다. 그리고 몇 년 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해 불운하게도 뇌를 크게 다쳤고, 운동기능뿐 아니라 시력, 언어능력, 기억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바보가 되었다”라고 했다. 난폭한 행동을 일삼는다고도 했다. 다행히 몇 차례의 큰 수술을 통해 의식이 좀 돌아왔는데 그 이후엔 그녀가 종일 먹을 것만 찾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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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무심하고 민감하게, 나와 식물 이야기 입춘이 지나자 군자란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봄이구나. 마음이 분주해졌다. 베란다에 설치해놓았던 비닐하우스를 해체하고 겨우내 그 속에서 최소한의 물로 옹색하게 버틴 화초들의 상태를 살폈다. 마른 잎들은 털어내고 화분의 흙들을 보충하고 알비료도 조금씩 올려주고 오래간만에 커다란 물뿌리개로 화초들을 샤워시켜 묵은 먼지를 털어냈다. 다음엔 한쪽으로 밀쳐놓았던 높고 낮은 화초 받침대를 늘어놓고 실내에서 월동했던 스노 사파이어와 율마까지 데려다 모든 화초가 골고루 햇볕을 받을 수 있게끔 자리를 잡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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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자기 힘으로 이동한다는 것에 대하여 어머니와 합칠 집을 구할 때 가장 많이 신경 쓴 것은 두 세대가 살기에 적합한 구조인가 여부였다. 주변 환경이 조용하고 전망이 좋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고. 다행히 이런 것들이 웬만큼 충족된 곳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곳이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다는 것, 따라서 노인이 걸어서 이동하기 좀 힘들다는 사실은, 당시엔 내 안중에 없었다. 문제를 느낀 것은 한참 후였다. “나를 이 꼭대기에 처박아놓고…”라는 지청구가 빈말이 아니라는 것, 어머니의 우울증이 깊어진 것이 소일거리가 없기 때문이고, 또 그것은 자기 힘으로 이동하기 힘들게 된 사정과 관계있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예전 살던 곳에서 누렸던 이동권, 즉 혼자서 미장원에 가고, 한의원에 들르고, 약국에서 약사와 수다를 떨고, 돌아오는 길에 팥칼국수 한 그릇 사 먹는 행위가 주는 기쁨과 활력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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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우리들의 글쓰기, 자기돌봄과 상호돌봄 인문학 공동체도 추수를 한다. 단 가을이 아니라 겨울에, 나락 대신 에세이로. 농부의 가을걷이가 그러하듯 우리 에세이도 일 년 공부를 정직하게 반영한다. 누군가는 여문 글을, 누군가는 쭉정이를 얻게 된다. 하지만 막판 뒤집기도 언제나 가능한 법이라, 에세이 철이 다가오면 얼굴이 누렇게 뜬 채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뒤늦게 스퍼트를 올리는 학인들로 공동체가 후끈 달아오른다. 하지만 일 년 동안 성실했든 슬렁거렸든, 공부의 마지막 단계, 글쓰기는 예외 없이 어렵다. 우리 중엔 형식을 갖춘 글을 평생 한 번도 안 써봤다는 사람도 있고, 들여쓰기, 문단 나누기 같은 기본 용어조차 낯설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글쓰기의 어려움이 이런 숙련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책을 단순히 요약하는 것도 아니고 책과 상관없는 감정을 토로하는 것도 아닌 글, 우리가 읽은 책에서 길어 올린 개념을 통해 삶을 다시 써나가는 글을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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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내년에는 나도 ‘페스코’를 최근 공동체 공론장에 낯선 단어, ‘페스코’가 등장했다. 11월 한 달 동안 진행한 ‘잡식가족의 딜레마’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젊은 남성 회원 한 명이 자신을 페스코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페스코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의 준말이고, 소·돼지·닭 등의 고기는 먹지 않되 우유·치즈·달걀, 그리고 해산물은 섭취하는 채식주의의 한 종류를 뜻하는 말이란다. 알고 보니 채식에도 여러 등급이 있었다. 완전 채식인 비건부터 락토, 오보, 페스코, 폴로 그리고 상황에 따라 육식도 하는 유연한 플렉시테리언까지. 나는 오랫동안 잡식주의자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잡식이 인간의 본성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트렌드가 되어가는 채식이, 유기농처럼, 처음 시작과 달리 건강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고, 중산층 가족의 식탁에만 허용되는 계급적인 것으로 변질된 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적게 먹고 소박하게 먹고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함께 먹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실제 공동체에서 탁발에 의존해 식탁을 차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채소 중심의 식단이 꾸려진다. 그러다 가끔, 즉 공동체 김장 울력 날, 다 같이 둘러앉아 김장 쌈에 수육을 곁들여 막걸리 한잔하는 기쁨을, 혹은 외부 손님을 초청하는 인문학 축제 때 제육볶음을 메뉴에 추가하는 정성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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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숨 숨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확실히 알았다. 축농증이나 비염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닌데 코가 아니라 자꾸 입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운동 코치가 내가 숨을 잘 못 쉰다고, 정확하게 말하면 숨, 특히 날숨이 짧다는 지적을 한 적도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세월호 직후 108배와 명상을 할 때도 나는 내 호흡이 짧고 불안정하다고 생각했었다. 아, 나는 왜 숨쉬기조차 제대로 못하는 것일까? <장자>에 나오는 도를 체득한 사람, 진인(眞人)은 잠을 자도 꿈꾸지 않고, 깨어서도 근심이 없다. 그는 먹을 때는 맛있는 것을 구하지 않고, 대신 숨쉴 때는 깊고 고요했다. 거의 숨쉬기만으로도 생명을 유지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보통 사람은 목구멍으로 숨을 쉬지만, 진인은 발뒤꿈치로 숨을 쉬기 때문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시비 호오에 끌려다니지 않고 완벽한 평정심을 지닌 진인의 상태를 꿈꿨다. 그렇다면, 비슷하게라도 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얕고 짧은 나의 숨쉬기를 어떻게든 바꿔보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틈만 나면, 운동할 때든 산책할 때든 나름의 호흡 수련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지럼증이 오면서 쓰러질 뻔했다. 투머치 호흡! 숨을 잘 쉬어보겠다며 호흡을 무리하게 인위적으로 조절하다 부른 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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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간호사, 간병인, 요양보호사, 그리고 나, 보호자 현재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간호법 제정을 둘러싸고 찬반이 분분하다. 대한간호협회는 간호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업무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간호법이 필요하다며 300일 넘게 1인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 등은 간호법이 간호사들만의 이익 추구를 위해 타 업무영역을 침해한다며 ‘간호법 제정 저지를 위한 총력투쟁’에 나서고 있다. 나는 뭔가 기시감이 든다. 2000년 의약분업 때, 1993년의 한약 분쟁 때, 그리고 2년 전의 의사 파업 때가 떠오른다. 피로감이 몰려오고 정신건강을 위해 아예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늙고 병든 어머니의 직접적인 돌봄 제공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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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지난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어머니가 먼저 의지를 보이셨고, 이참에 나도 함께 진행했다. 어머니의 경우, 몇년 전엔 아들, 즉 내 남동생이 펄쩍 뛰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는데 이번엔 자식 모두 어머니 노화에 대한 경험치가 함께 쌓인 탓인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내 아이들이 펄쩍 뛴 것이다. 내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각자 독립해 살고 있던 남매는 서로에게 “엄마를 좀 말려봐”라면서 당황해했고 급기야 그런 결정을 왜 엄마 혼자 내리냐며 항의했다. 어이가 좀 없었다. 얘네들 MZ세대 맞아? 하지만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그냥 “얘들아, 이거 트렌드야”라고 답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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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더 이상 어깨동무를 할 수는 없어도 얼마 전 회전근개파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 간 이유는 아침 필사를 계속하던 어느 날부터 등살이 심하게 바르더니 어깨를 거쳐 팔꿈치, 손목까지 저렸기 때문이다. 사실 몇 달 전부터는 티셔츠를 입고 벗을 때마다 오른쪽 어깨와 연결된 팔뚝 윗부분에 ‘찌르르’ 통증이 왔다. 원인을 물었더니 의사의 짧은 답, “퇴행이에요”. 그러면서 팔이 저리는 건 어깨가 아니라 목 때문일 수 있다고 했다. 내친김에 목 엑스레이도 찍었다. 이번엔 퇴행성 목디스크란다. 노화된 디스크 찌꺼기가 옆으로 삐져나와 신경을 누르고 있어 통증이 심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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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공자님의 잠옷 얼마 전 <논어>를 공부한 친구들의 에세이 발표가 있었다. 그중 한 친구의 글이 인상적이었는데 이유는 주제가 인(仁)도 효(孝)도 군자(君子)도 아닌, 공자님의 잠옷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집에서 일상복 차림으로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다가 밤에는 그 옷을 입은 채 그냥 잔다고 했다. 심지어 술을 마시거나 너무 피곤한 날엔 퇴근 후 씻지도 않고 소파에 쓰러져 잠들어버린단다. 당연히 다음날 아침이 어수선해지면서 연초에 세운 그 어떤 ‘아침 루틴’도 공염불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다 <논어>의 “공자님은 주무실 때 반드시 잠옷을 입으셨다”는 문장에서 벼락 맞은 듯, “아, 이게 군자의 도이고 양생의 기술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