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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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엊그제는 충남 서천에 특강을 갔다, 20년 가까이 그곳에 터잡고 사는 허정균을 만났다. 18년 전 정부가 새만금과 서천 장항 갯벌을 매립할 때 갯벌 살리기 투쟁을 하다 그곳에 눌러앉은 선배다. 허정균은 신문사에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지역 주간신문 ‘뉴스서천’에서16년째 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내가 ‘새님’이라 부르는 허정균은 장항제련소 환경문제를 특종 보도하여 전국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옛 장항제련소를 철수하고 이전하는 데 목소리를 보탠 것이다. 한 집 걸러 암투병하는 인근 주민들을 오래 들여다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겠다. 1989년 폐쇄되었지만 장항제련소에서 50여년 동안 대기와 토양으로 흘러나온 분진과 중금속으로 인한 것이었음이 2009년 건강영향조사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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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너, 먼 데서 이기고 올 사람아 봄이다. 꽃다지도 부추도 파도 시금치도 퍼렇게 올라오는 봄이다. 봄바람과 겨울 끝바람이 기싸움을 벌이긴 해도 봄이다. 간밤에 얼었는지, 이파리 가장자리마다 눈꽃 같은 흔적이 있긴 해도, 봄이 이길 것이란 믿음만은 흔들리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봄은 온다. 긴 겨울을 이기고 나온 별꽃도 꽃다지도 잡초 취급받는 개양귀비도 기특하다. 놀랍다. 봄은 솟구쳐 오르는 계절,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뭇가지에 잎이 돋고 꽃이 핀다. 갸륵하다. 산과 밭으로 둘러싸인 산골살이 10년차인데 봄이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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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슬픔이 한 숟가락은 줄어들기를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본 세상과 딴판이다. 마을 지붕도 산도 나무도 논밭도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하얗게 평등하다. 새가 잠깐 날아가다 금세 자취를 감춘다. 우수(雨水)부터 내리던 비가 나흘 넘기더니 눈이 되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아기 쑥처럼 고개를 내미는데 봄은 멀다. 덤불 사이에서 올라오던 쑥들은 어찌 될까. 눈 천지가 되면 새와 고양이는 무얼 먹고 사나. 설이 엊그제 같은데 대보름이 코앞이다. 어릴 땐 대보름날이 떠들썩하니 재밌었다. 꽹과리며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나면 장정들이 왁자지껄 들어와 마당을 몇 바퀴 돌다, 마루에 걸린 바구니를 내려 음식을 나눠먹었다. 김으로 동그랗게 감싼 찰밥과 색색 나물들과 전들이 든 소쿠리는 참 아름다웠다. “차례와 제사는 하나의 형식”이라지만, 음식을 차리다 보면 새삼 삶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생각하게 된다. “무연고자씨”들에게 음식을 차려 “문밖에 내놓”는 ‘뒷밥’은 더더욱 삶의 너머 혹은 이면을 되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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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사람값과 목,숨,값, 며칠 동안 내린 눈으로 세상이 하얗다. 산도 논도 밭도 비닐하우스도 지붕도 모두 새하얗다. 평등하게 희다. 눈이 오면 꼼짝없이 산골에 갇힌다. 새들과 산고양이는 뭘 먹고 이 한파를 견디나. 어젯밤 이 언덕길까지 올라와 스티로폼 박스를 눈 위에 던지고 간 택배기사는 오늘도 빙판길을 오르내리고 있겠지. 거창 산골의 그 꼬불꼬불한 길도 얼어 있겠지. 작년 마지막 날은 경남 거창에 갔다. 강연 겸 나눔은 일찍 끝나고, 비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밤을 옛 선배 임혜숙과 정쌍은 집에서 함께 보냈다. 두 분은 거창 산골에서 30년 이상 포도농사를 지으며 와인도 만드는 진짜배기 농부가 되어 있었다. 근처 성주에서 참외농사를 지으며 농민의 권익을 위해 헌신해온 윤금순씨와 강연을 주선한 사과 농사꾼 이이화씨의 고등학교 은사님도 함께했다. 다리를 절며 임혜숙 선배가 슬쩍슬쩍 내놓는 밥상엔 평안도식 김치밥과 시래기된장국과 안동찜닭이 이어졌다. 밤늦게까지도 모자라 아침 밥상머리와 떠나기 직전까지 이야기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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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나란히 엊그제는 면 소재지에 있는 우체국에 다녀오다, 달포 전 윗니를 뽑고 제법 돈이 든다는 이 시술을 앞둔 맹보살 집에 들렀다. 마침 재가노인지원 복지사가 다녀가고, 인지워크북이라고 써 있는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쟁반에 동그란 떡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미운 놈 ○ 하나 더 준다, 누워서 ○먹기다 등등이 써 있었다. 빈칸에 연필로 떡을 써넣어 빨간 색연필로 큰 동그라미를 받은 흔적도 보였다. 거의 다 동그라미를 받았는데, 호랑이 그림에만 칭찬용 동그라미가 없었다. 내가 보기엔 대한민국 지도같이 생긴 호랑이인데 맹보살은 새우란다. 아, 새우여서 왼편에는 색칠을 안 했구나 싶었다. 다시 보니 새우랑 흡사하기도 했다. 연잎차에 만두를 먹으며 맹보살이 칠하다 만 호랑이 새우를 함께 완성하고, 자목련집 언니네를 들렀다. 언니는 올해 내내 아프다. 특히 겨울 들어 더 심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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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꽉 껴안는다 어제는 청년들 몇이 집에 다녀갔다. 충북 옥천과 지리산 자락에 산다는 감자, 팔매, 아라 등과 강아지까지 여섯 명이 놀러와서 너댓 시간 동네를 젊게 물들여 놓았다. 농촌에서 오래 살아온 어른들께 궁금한 것들이 많다 했다. 미리 부탁해둔 언니들 댁도 두 곳 방문하고, 우리집에 함께 와서 본격적인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여든넷인 맹대열 어머니는 학생 신분을 마감한 지 오래인 30·40대 청년들에게 대뜸 ‘학생’이라 불렀다. 이짝에서 주고 저짝에서 빼간다는 기초수급 얘기며, 김대중 선생 버스기사며, 흙탕물 미꾸라지 이야기를 들으며 청년들은 재밌어 했다. 반쯤이 웃음으로 채워졌을 영상도 찍었다. 양승분씨는 힘든 것도 좋은 것도 다 사람 때문이라며, 일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김장도 같이하고, 서로 나눠 먹으며 웃음꽃 피우던 날들을 전해주며 눈시울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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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9월에 씨 뿌린 상추와 쑥갓과 치커리와 겨자채가 손바닥만큼 자랐다. 가을에 쌈채를 파종한 것은 처음이다. 역시 올해 처음 모종으로 심어본 루콜라도 톱날 같은 이파리를 뻗는다. 갓처럼 알싸한 맛을 내는 루콜라는 이파리를 떼어내도 며칠 후면 속잎이 다시 자라 있다. 신기하다. 봄처럼 어린잎 채소를 뜯어다 샐러드를 해먹는 자연의 선물을 누리면서도 돌을 눌러놓은 것처럼 무겁다. 무엇을 해도 마음이 평화롭지 않다. 며칠째 가자지구에 폭격이 쏟아지고, 이스라엘군 탱크가 기관총과 포탄을 쏘며 가자지구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폭격 구덩이에서 생존자를 찾는 사람들의 낯빛도 무너진 잔해처럼 돌빛이다. 시멘트 더미에 묻힌 사람들도, 오열하는 사람들도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었을 게다. 오랫동안 조상 대대로 그 땅에서 닭을 기르고, “개미 떼처럼 오가면서” “발로 길을 다”진 그 땅의 “주민”이었을 게다. 4차에 걸친 침략과 전쟁으로 자기 땅에서 쫓겨나 가자지구라는 좁은 곳에 유폐되었다 끝내 “살해당한 자”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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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소풍과 휴가 추석연휴 동안 짬짬이 고구마를 캤다. 땅이 마를 만하면 비가 오고, 캐야겠다 싶으면 다시 젖기를 반복하던 이상한 날씨 때문에 다소 늦어진 추수였다. 우북하게 덮인 고구마순을 보며, 혹시나 조금 더 땅속에 두면 그사이 더 자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큰 애는 동치미 무만큼 크고, 당근만 한 애가 많았다. 가운데 손가락만 한 두께에 젓가락 길이 정도로 늘씬한 애들이 태반, 한마디로 올 추수는 바닥이었다. 고구마를 캐는데 어디서 자꾸 삐약대는 소리가 들려와 찾아봤더니 잡초 무성한 호박넝쿨 아래 아기고양이들이 숨어 있었다. 옆집 펜스에서 날아온 한 장 천막 쪼가리가 그들의 집이었다. 가까이에 사람이 있으니 젖 먹일 어미가 접근하지 못해 배가 고파 우는 모양이었다. 두 놈은 담벼락 따라 어미를 찾아가고 어미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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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호미의 길, 생명의 길 올여름엔 “그 집 고추는 좀 어뗘?” 질문이 잦다. 표정들로 보아 올해 고추농사가 영 시원찮은 모양이다. “뭐 그냥 그럭저럭….” 답한다. 생각보다는 잘됐다는 말은 생략한다. 벌레약도 뿌리지 않고 제초제로 풀을 잡지도 않았으며, 고추에 달라붙은 노린재는 툴툴 털어냈으니까. 비 한 방울 뿌리지 않는 땡볕 더위가 보름, 장대비가 쏟아진 날들이 보름씩 번갈아 찾아왔으니까. 악조건에서 이렇게나마 자라준 고추가 대견하고 기적 같다. 아무리 이상기후라지만 지금처럼만 되길 기원하는 심정이기도 하다. 참외처럼 노릿한 토종오이 장아찌 몇 개 들고, 아랫집 언니집에 마실 가니 온 가족이 수돗가에서 고추를 씻고 있다. 큰 다라이 두 개에서 번갈아 씻겨지는 고추를 건지다 보니, 물속 고추 빛깔이 환상적이다. “이 색 좀 봐. 고추는 정말 이쁜 선홍색이고, 꼭지는 진짜 이쁜 녹색이다.” 나는 철없이 색을 찬양하고, 언니는 “올핸 고추 따는 재미가 없네. 고추가 죄다 떨어져서 줍느라…” 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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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흔들린다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 익선이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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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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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땅의 옹호 물봉숭아 쩔어붙은 골짜기 두꺼비 어정시러이 기어가는 저녁 돌 틈서리 바위굴마다엔 가재가 살고 가재굴 앞 돌멩이 밑엔 꾸구리가 살고 쇠똥 같은 초가지붕 아래 우리들이 살았습니다 가지나물에 마늘쫑다리 고추장 풀어 지진 감자 먹고 우리들이 살았습니다 호박잎 물들어 파란 밥 먹고 살았습니다 찬물구덩이 물 길어다먹고 도롱골 오박골 가릅재로 밭매러 다니며 우리들이 살았습니다 가위로 싹둑싹둑 오려놓은 할아버지 발톱 할머니 손톱 밥풀 으깨 하늘에다 붙이고 도랑물 소리 마당 가득 쟁여놓고 우리들이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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