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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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씨알의 힘, 엉덩이의 힘 땅이 되고 싶었다 하늘은 제 앉을 자리 가장 낮은 데로 골랐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이 큰 공부, 부지런히 익혔다 읽고 쓰고 읽고 쓰고, 온몸이 귀가 되었다 황송했다 별빛을 듣고 빗방울을 듣고 땅강아지를 들었다 어미도 되었다가 새끼도 되었다가 배고픈 그림자들 품었다 기다리다 끌어안고 기다리다 끌어안고, 온몸 엉덩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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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전태일이 전태일에게 겨울을 건너지 않고서야 무슨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내 겨울의 추위와도 같은 존재였지요나는 당신의 추위 안에서 덜덜 떨며한 번쯤 얼어붙은 시간을 반드시 건너와서야이렇게 싹을 틔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 당신의 추위 안에서 나는 안으로 안으로만 울면서눈물 꽁꽁 얼려 꽃의 형상을 꿈꾸었습니다내가 여름을 기다려 꽃 피우는 까닭을 당신은 아시겠지요당신의 추위를 혼신으로 견디며 건너지 않고서야어찌 한여름 이 높은 산정에서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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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장화와 왕관 폭설에 세상이 갇히면토방에 장화 한 쪽 뒤집어 세워놓고그 신발 바닥 뒤축에 모이를 올려놓았습니다.마당에 뿌려놓지 그래요. 새 머리마냥 갸웃거리면쉿! 조용히 창호지 문구멍으로 내다보라 했습니다.저것 봐라. 힘 있는 새가 혼자 다 먹으려고장화에 올라타지. 그럼 어찌 되겄냐? 장화가 넘어지면서모이가 마당에 흩뿌려지지. 그러면 병아리도 먹고굴뚝새도 먹고 참새도 먹고 까치도 먹는 거지.처음부터 흩뿌려놓으면 되잖아요. 그건 다르지.크고 힘센 놈은 작은 새들 앞에서저렇게 굴러떨어져 망신 좀 당해봐야 해.혼자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우쳐줘야지.새대가리라서 번번이 까먹지만, 참새는 짹짹지빠귀는 뽁뽁, 날개짓으로 가슴 치며 웃어봐야지.장화 속에다 모이 한 줌 넣어놓으면, 왕관이라도 쓴 양몸통을 통째로 처박고서는 마루 밑을 기어다니는 꼴이야뉴스 첫머리에서 늘 보지만 말이다. 아버지는넘어진 장화를 가지런히 세우는 것이었습니다.장화의 검고 깊은 두 눈이 무섭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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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초인(超人)과 비인(非人) 주저앉는다말뚝에 매인 염소처럼 도망치지 않는 돌계단은주저앉기에 좋지 무엇을 잃어버릴 때마다염소의 등짝 같은 돌계단에 앉아 생각한다 내려가는 중인지 올라가는 중인지 귀를 세워 듣는다저 높은 곳에서 굴러 내려오는 불안한 숨소리저 낮은 곳에서 걸어 올라오는 고단한 발소리 그사이돌계단은 천천히 식어가고 곧어떤 결심이 근육을 팽팽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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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빛, 부서진 밤을 비추는 장벽 속에 몰아넣고 총알을 퍼붓는다 길이 사십, 폭 팔 킬로미터의 땅에 가두고 로켓과 미사일과 포탄을 밤낮으로 쏟아붓는다 하마스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하마스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차라리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의 자식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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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이날 평상 봄이 안 온 적이 없어 쓰러진 한마리 개 옆에 주저앉아 떨며 죽음의 과속을 멈추려는 사람오염물 뒤집어쓴 흙과 죽어가는 벌레와 풀, 잘린 나무의 신음을 듣는 사람저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 먹고 먹히는 계산법을 넘어 자연의 경이에 무릎을 꿇는 사람자비와 분노가 한통속인 사람서로 밥이 되어주기를 바라 마지않는 사람저는 그를 형제이자 스승으로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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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굉장하고 신비한 불꽃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왔는데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 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또 늦은 건 나다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 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다 들킬 거면서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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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엄마는 얼마인가 책을 보다가 엄마를 얼마로잘못 읽었다얼마세요? 엄마가 얼마인지알 수 없었는데,책 속의 모든 얼마를 엄마로읽고 싶어졌는데 눈이 침침하고 뿌예져서안 되었다엄마세요? 불러도 희미한 잠결,대답이 없을 것이다 아픈 엄마를 얼마로계산한 적이 있었다얼마를 마른 엄마로 외롭게,계산한 적도 있었다밤 병동에서엄마를 얼마를,엄마는 얼마인지를알아낸 적이 없었다눈을 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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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물의 말, 공기의 말 바닷물은 차고 볕은 한없이 따가운 칠월 초순 첫 멍게 작업이었다휘이휘이 숨 트며 방파제 돌아 나오던 춘자 형님이 그만 정신을 놓았다후불 형님과 돌돌이 형님이 둥둥 뜬 몸 끌고 와물옷 물고 찢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119, 119, 사람 간다. 119 전화해라 순식간에 모여든 해녀들이 둥그렇게 에워싸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백지장처럼 하얗게 돌아가는 목숨을 붙들겠다고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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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정뜨르 비행장과 알뜨르 비행장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 짓누르며 내려앉는다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빠직 빠직 빠지지지직빠직 빠직 빠지지지직 시커먼 아스팔트 활주로 밑바닥반백년 전까닭도 모르게 생매장되면서 한 번 죽고땅이 파헤쳐지면서 이래저래 헤갈라져 두 번 죽고활주로가 뒤덮이면서 세 번 죽고그 위를 공룡의 시조새가발톱으로 할퀴고 지날 때마다 다시 죽고그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뼈소리 들린다빠직 빠직 빠지지지직빠직 빠직 빠지지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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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빵과 장미의 유통기한은 영원 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미래가 있는 사람처럼 죽고 있습니다 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맞아 죽고 부딪혀 죽고 깔려 죽고 붕괴되어 죽고 있습니다이 시각에도 땀 흘리다 죽고 피 흘리며 죽고 있습니다미래? 죽음을 갈아 넣는 세계와 헛된 죽음의 죽음을 멈추지 않는 이곳에 미래가 있습니까 알버틴장미 사향장미 다마스크장미 백장미 캐비지로즈 아일랜드의불꽃 아도니스 레이딩리딩 스노우퀸 붉은 글자의 날 튜터장미 노수부 바스의 아내 토마스 베케트 에밀리 브론테 티 로즈 ……장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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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어둠 속에서 실패가 빛날 때 어둠 속에서 새벽이 오는 것을 보았다어둠이 어떻게 물러나는가를 찬찬히 보았다 유리창이 내 얼굴을 꽉 붙들고 있었다내 눈에 비치는 내 눈 세숫대야에 담그고 있는 것처럼어둠 속에 얼굴을 담그고 있었다 어둠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더니서서히 얼굴을 풀어 놓아 주었다 돌아서서 검은 얼굴을 씻는다묻어나지 않는 어둠, 손바닥으로 훑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