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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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마중하는 중 입국장 문은 열리지 않았다폐쇄해야 할 것은 문이 아닌데무책임과 거짓과 무관심에붉은 경고문을 붙여야 하는데슬픔은 너무 오래 방치되고곳곳에 우리의 재회를 방해하는 것들이높은 둔덕을 쌓고 있다 성벽처럼 단단한저 둔덕 위에서 노려보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단단한 성벽 오래된 성벽풍경인 척 순응하고 망각하게 만드는얼마나 비겁한 성벽인가그러나단단한 슬픔은 벽보다 묵직하다밀어야 열리는 문온몸으로 밀어야 하는 문아교처럼 슬픔을 엮어 밀어야 하는 문너무 지연된 약속이지만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꽃밭을 한뼘쯤 돋우는 일 꽃밭을 한뼘쯤 돋우는 일을 생각하느라가을을 다 보냈다꽃밭의 위상을 높이는 일도 아니었고꽃들의 구두 뒤축을 받치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결국은 마사토 한 트럭을 주문했고세레스 일 톤 덤프트럭이 부어놓은 흙을 삽으로 퍼 꽃밭에넣었다 마른 꽃무릇은 숨고 구절초 꽃대는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꽃밭이 두툼해지면발목이 빠진 작약은 키가 낮아질 것이었다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 해발이 높을수록 아파트 분양가도 높다천국 속살 같은 햇볕에 조경수는 자라고 바다로 뛰어드는 불굴의 투지를투자로 바꾼 자는 영웅이 되어바다를 바닥처럼 내려다본다 바다는 천국과 멀다불굴의 투지가 투자가 되지 못하면바다에 들러붙어 살아야 한다치통이 있는 어금니 방향으로 볼을 누르고 자는 것처럼 누가 높고 빛나는 곳을 천국이라고 고정시켰을까?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배부른 달, 배부른 여자, 배부른 희망 부른 배 미싱판에 대고 헉헉대는 여자배는 만삭 월급은 초생달인데안 먹어도 불룩한 배는 늘 고픈 여자집들이 때 쌓인 슈퍼타이 슈퍼에 들고 가우유와 콩나물로 바꿔 먹는 여자위층 상가 갈빗집에서 솔솔 풍겨 나오는숯불갈비 냄새 킁킁거리다 깜박 잠에 빠진 여자블라우스 원단에 수놓은 꽃밭손으로 밀고 발로 밟으며 가는 여자밟아도 밟아도 늘 제자리배로 미싱을 밀고 가는 여자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하늘의 인간, 대지의 인간 자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자주 난민이었다자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자주 불법체류자였다자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자주 보트피플이었다 젊었을 때 그것은 젊은 날의고독한 낭만적 비애인 줄 알았다우리의 노동이 부족해서인 줄 알았다애국심이 모자라서인 줄 알았다불우한 민족의 슬픔인 줄 알았다 하지만 피땀을 쏟아내도 우리는 언제까지나정상 국민이 될 수 없었다우리의 배경으로는 정규 시민이 될 수 없었다우리의 신분은 종종 계약 해지된 상태였다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서정시를 쓰십니까? 서정시를 쓰십니까?아니요 벼락을 씁니다벼락 맞을 짓이라는 말을 들어봤나요?벼락 맞을 짓을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벼락에 고하는 글을 씁니다 벼락에 고하는 글화평한 서정시를 쓰고 싶습니다위선과 비열, 몰염치와 야비, 교활하기까지 한그 가면들을 순간의 빛 속에 가두고때리는 서정시를 쓰십니까?아니요 ‘서정시’를 씁니다벼락같은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아버지의 시간, 아들의 시간 무논에다 나무를 심은 건 올봄의 일이다벼가 자라야 할 논에 나무를 심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다수백 년 도작(稻作)한 논에 나무를 심으면서도 아버지와 한마디 의논 없었던 건 분명 잘못한 일이다하지만 아버지도 장남인 내게 일언반구 없이 여길 훌쩍 떠나지 않으셨던가풀어헤친 가슴을 헤집던 아버지 손가락의 감촉을 새긴 논은이제 사라지겠지만 남풍에 족보처럼 좍 펼쳐지던물비린내나는 초록의 페이지 덮고올봄엔 두어 마지기 논에 백일홍을 심었다백일홍 꽃이 피면한여름 내내 붉은 그늘이 내 얼굴을 덮으리백날의 불빛 꺼지고 어둠 찾아오면 사방 무논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나는 북카페를 낼 것이다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북카페를 열 것이다천 개의 바람이 졸음 참으며 흰 페이지를 넘기고 적막이 어깨로 문 밀고 들어와 좌정하면고요는 이마를 빛내며 노을빛으로 저물어갈 것이다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활자 앞에 쌀가마니처럼 무겁게 앉아아버지가 비워두고 간 여백을 채울 것이다무논에 나무를 심은 일이 옳은지 그른지부터곰곰 따져 기록할 것이다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씨알의 힘, 엉덩이의 힘 땅이 되고 싶었다 하늘은 제 앉을 자리 가장 낮은 데로 골랐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이 큰 공부, 부지런히 익혔다 읽고 쓰고 읽고 쓰고, 온몸이 귀가 되었다 황송했다 별빛을 듣고 빗방울을 듣고 땅강아지를 들었다 어미도 되었다가 새끼도 되었다가 배고픈 그림자들 품었다 기다리다 끌어안고 기다리다 끌어안고, 온몸 엉덩이가 되었다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전태일이 전태일에게 겨울을 건너지 않고서야 무슨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내 겨울의 추위와도 같은 존재였지요나는 당신의 추위 안에서 덜덜 떨며한 번쯤 얼어붙은 시간을 반드시 건너와서야이렇게 싹을 틔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 당신의 추위 안에서 나는 안으로 안으로만 울면서눈물 꽁꽁 얼려 꽃의 형상을 꿈꾸었습니다내가 여름을 기다려 꽃 피우는 까닭을 당신은 아시겠지요당신의 추위를 혼신으로 견디며 건너지 않고서야어찌 한여름 이 높은 산정에서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장화와 왕관 폭설에 세상이 갇히면토방에 장화 한 쪽 뒤집어 세워놓고그 신발 바닥 뒤축에 모이를 올려놓았습니다.마당에 뿌려놓지 그래요. 새 머리마냥 갸웃거리면쉿! 조용히 창호지 문구멍으로 내다보라 했습니다.저것 봐라. 힘 있는 새가 혼자 다 먹으려고장화에 올라타지. 그럼 어찌 되겄냐? 장화가 넘어지면서모이가 마당에 흩뿌려지지. 그러면 병아리도 먹고굴뚝새도 먹고 참새도 먹고 까치도 먹는 거지.처음부터 흩뿌려놓으면 되잖아요. 그건 다르지.크고 힘센 놈은 작은 새들 앞에서저렇게 굴러떨어져 망신 좀 당해봐야 해.혼자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우쳐줘야지.새대가리라서 번번이 까먹지만, 참새는 짹짹지빠귀는 뽁뽁, 날개짓으로 가슴 치며 웃어봐야지.장화 속에다 모이 한 줌 넣어놓으면, 왕관이라도 쓴 양몸통을 통째로 처박고서는 마루 밑을 기어다니는 꼴이야뉴스 첫머리에서 늘 보지만 말이다. 아버지는넘어진 장화를 가지런히 세우는 것이었습니다.장화의 검고 깊은 두 눈이 무섭기도 하였습니다.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초인(超人)과 비인(非人) 주저앉는다말뚝에 매인 염소처럼 도망치지 않는 돌계단은주저앉기에 좋지 무엇을 잃어버릴 때마다염소의 등짝 같은 돌계단에 앉아 생각한다 내려가는 중인지 올라가는 중인지 귀를 세워 듣는다저 높은 곳에서 굴러 내려오는 불안한 숨소리저 낮은 곳에서 걸어 올라오는 고단한 발소리 그사이돌계단은 천천히 식어가고 곧어떤 결심이 근육을 팽팽하게 한다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빛, 부서진 밤을 비추는 장벽 속에 몰아넣고 총알을 퍼붓는다 길이 사십, 폭 팔 킬로미터의 땅에 가두고 로켓과 미사일과 포탄을 밤낮으로 쏟아붓는다 하마스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하마스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차라리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의 자식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