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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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빛, 부서진 밤을 비추는 며칠 강풍 불고 날이 추워지면서 누군가 자꾸 내 방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다. 문을 열자 천지사방에 흰 눈가루가 날리고 있었다. 무구하고 무고하게. 저 먼 곳에 잿가루가 날리는데, 왜 앞산의 나무들은 흰 눈을 맞고 있나. 얼어서 죽은 무함마드야, 태어난 지 사흘 만에 파묻힌 아가야. 미안해. 무고한 바라야 미안해. 2023년 가을 이후 날마다 세계는 목도해왔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을. “일곱살, 다섯살, 세살, 두살, 한살 …”, 숫자로만 전해지는 아이들의 죽음을. 거대한 감옥이었던 가자로부터 노골적인 학살지가 되어버린 참혹한 이름을. “전기도 연료도 식수도 빵도 끊겨버린 암흑천지” 속에서, 폭격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서 죽은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피라미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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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이날 평상 봄이 안 온 적이 없어 겨우내 마주한 만행산은 눈사람, 머리에서 발끝까지 흰 눈을 뒤집어썼다. 키세스 같다. 산이 통째로 흰 봉분 같다. 밤마다 새 은박지 두른 듯 나무 하나하나가 하얗게 빛났다. 세계를 하얗게 고쳐쓰며 한자리에서 나무마다 눈 맞으며 견뎠겠다. 잡지 <전라도닷컴>에서 만든 기획특집 ‘앞으로 봄’을 보다 오랜만에 오래 웃었다. 지난해 12월3일부터 하루하루가 그날인 듯, 불안하고 때로 낙담하던 마음을 단번에 날려버린 구수한 말씀의 주인공들은 오일장 장터를 떠도는 사람들의 “나도 하고자운 말이 있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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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굉장하고 신비한 불꽃 “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오래 불을 바라보”는 날이 요새 많다. 자루에 담아둔 낙엽 몇 줌 넣고 가는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올려 불을 붙인다. 무쇠솥 달구는 잉걸불도 구겨진 신문지 쪼가리에서 시작된다는 걸 눈보라 치는 아궁이 앞에서 배운다. 소리 없이 오래 타는 참나무도 저 혼자는 불붙지 못한다. 마른 대나무들이 펑펑 터지며 불을 살리고, 쉬이익 두꺼운 장작 속으로 가열차게 들어가는 리듬이 놀랍고 신비하다. 세찬 냉기를 이기며 서로를 불 속으로 불러들인다. 새의 깃털과 고양이, 강아지의 털도 섞여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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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엄마는 얼마인가 이틀 사이에 겨울이 왔다. 추위를 대비해 부직포를 덮어놓은 마늘밭과 무밭도 하얗게 눈이불을 덮고 있다. 몇 포기 남은 배추와 쪽파와 갓배추만 희푸르고 희붉은 빛. 엊그제는 눈 오기 전에 쪽파를 뽑다 놀랐다. 황갈색으로 껍질을 둘러쓴 쪽파 씨를 그저 땅에 묻어두었을 뿐인데, 두어달 만에 열 개 이상씩 새끼를 치다니. 매번 놀라지만 또 놀란다. 누가 어미인지 새낀지 모르겠다. 쪽파를 다듬다보니 생각난다. 아이처럼 신나서 상추와 쪽파를 솎던 사람. 봄빛 좋을 때 밭에 나가 빈 땅만 보이면 여기저기 쪽파 씨를 묻던 사람. 초여름 마늘밭 가장자리에 옥수수알을 묻어두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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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물의 말, 공기의 말 군데군데 이 빠진 배추들이 모종을 녹여버릴 정도의 가을 폭염을 증명하고 있다. 뒤늦게라도 씨앗을 메꿔 넣을 수 있는 무나 갓과 달리, 모종을 심어야 하는 배추는 방법이 없다. 보랏빛 열매를 잔뜩 단 가지가 밭의 체면을 살려주긴 하나 수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상강 지나 입동이 다가오는데 꽃 피우는 가지라니. “톳이 사라진 것은 7년차고 미역은 6년차고 모자반은 5년차예요. 그러니 해조류를 먹고사는 소라와 전복은 어떻겠어요?” 잡초도 타 죽어 버리던 여름에 만난 유용예씨의 말이 실감난다. 기록 작업차 갔던 제주 가파도에서 만난 유용예씨는 서울에서 잘나가는 대기업 디자이너를 때려치우고 사진작가로 살다가, 10년째 해녀로서 어촌계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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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정뜨르 비행장과 알뜨르 비행장 나는 옛말이 좋다. 우리 동네 행정 주소인 보산원리나 용이 밭을 갈았다는 용경마을보다 사구실이란 옛 이름이 좋다. 용텀벙이라는 웅덩이 옆에서 사기를 구웠기에 그리 불렀겠다. 어른들은 아직도 함박골이라거나 쑥가말 같은 이름을 쓴다. 우리말 중에서도 제주도 지명은 더 아름답다. 무등이왓이나 너븐숭이 같은 지명을 처음 들었을 때 너른 품속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새별오름이라거나 쌀오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코가 절로 벌어졌다. 해거름에 쌀 씻는 아낙이 보이고 저녁밥 짓는 연기와 지슬(감자) 굽는 냄새가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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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빵과 장미의 유통기한은 영원 김장배추와 무와 갓배추를 심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 하얗게 타버린 고추를 달고 있는 고춧대를 어찌할까. 가지가 처지도록 굵직한 고추를 달고 있어야 할 고춧대에 따야 할 고추보다 떼어내 버려야 할 고추가 더 많다. 빨갛게 익어가다 물컹해진 고추와 익지도 못한 채 하얗게 타버린 애들은 또 어쩌나. 제아무리 매운 고추라도 번갈아 들이닥치는 땡볕과 폭우를 고스란히 버텨야 했으니 온전하게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게 염치없는 짓 아닌가. 보름 전, 에어컨을 설치하던 20대 기사가 땡볕에서 죽었다. 토하고 헛소리하고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등 열사병 증상을 보이는데 제대로 된 응급조치도 받아보지 못한 채. “오늘도 죽고 있”다. “매일 죽고 있”다. 뭐 하다? 일하다. “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맞아 죽고 부딪혀 죽고 깔려 죽고 붕괴되어 죽고 있”다. 누가? “알버틴장미 사향장미 다마스크장미 백장미” 등 각자의 이름과 영혼을 지닌 존재들이. “제 몫의 이름을 달고 피어오르”던 장미들이 “땀 흘리다 죽고 피 흘리며 죽고 있”다. 죽어라 일하다 진짜로 죽어버리고 있다. 누가? 고장 난 신호등처럼 아무리 일해도 붉은 불만 켜진 경제를 떠안고 사는 자들이 “오늘도 죽고” “매일 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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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어둠 속에서 실패가 빛날 때 덥다.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니 올해가 우리 생애 가장 시원한 여름이겠다. 이상한 일이 늘 벌어진다. 모가 한창 기세 좋게 자라야 하는데 뽑아도 뽑아도 논에선 풀이 사라지지 않는다. 평생 벼농사를 지어온 농부도 모르는 풀이 벼 옆에 자란다. 나도 옥수수 때문에 애를 먹었다. 잎이 자랄 때는 폭우로 밭에 못 들어가고, 열매를 맺을 땐 땡볕이 이어져 이천알쯤 심은 옥수수 농사가 반쯤 실패했다. 친환경 우렁농법을 하는 농부는 일하지 않는 우렁이 때문에 죽겠단다. 풀을 베어먹으며 벼와 공생하는 우렁이가 굶은 채 짝짓기에만 열중이란다. 찜통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우렁이가 2세라도 빨리 남기고 죽겠다는 거다. 벌이 줄어들어 수분을 안 해주니 복숭아도 사과도 띄엄띄엄 열린다. 농사까지 이러니 서민들은 어떻게 먹고사나. 대파 875원 파동과 1만원 사과 파동이 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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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작은 것이 아름답다 흙을 깊게 갈아엎지 않아도 되는 농사법을 실험 중이다. 산마늘이나 아스파라거스 같은 귀족 식물은 물론이려니와 꽃나물이라 불리는 삼잎국화나 울릉도취라 불리는 부지깽이와 곰취 등 나물이 주종이다. 그 애들은 아무리 잎을 잘라먹어도 죽지 않고 다시 돋아난다. 인간보다 약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구나 싶다. 부추는 물론이려니와 일년 중 반 이상을 뽑아먹는 대파나 쪽파와 상추도 실험에 착수했다. 윗부분은 잘라먹고 흙 털고 뿌리를 좀 다듬어 심어놓기만 하면 자기들이 알아서 번식해간다. 그중 우리 토종이라는 삼종대파는 놀랍다. 대파 곁에서 새끼가 나오는데 작지만 기세 하나는 등등하다. 신기하고 놀라워 한참씩 들여다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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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며칠째 땡볕이 이어진다. 하지가 열흘 남았는데 7월인가 싶게 뜨겁다. 상춧잎도 헐떡거리고 여린 고춧잎도 기진맥진해 보인다. 붉은 꽃 수없이 피워내던 양귀비도 시들해지고 감자잎이 눕고 마늘대도 노리끼리해졌다. 하지 무렵 땅과 이별해야 할 감자와 마늘 너머 옥수수밭만 청청하다. 사춘기 아이들처럼 날마다 다르게 커간다. 귀촌해 사는 동안 땅이 공짜로 생기곤 한다.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뜬금없이. 그렇다고 내가 땅임자가 되지는 않지만, 최소 1년간은 그 땅을 감당해야 한다. “안간힘을 쓰”고 “기진맥진해 있”다, “한쪽 무릎이 주저앉”고 다른 쪽 무릎이 꿇리고, 누군가 밭고랑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간 소중한 땅이니까. 빌려서 쓰는 땅, 도지(賭地)는 누군가 아프거나 힘들어서 농사를 포기할 사연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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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비 갠 봄날 아침은 눈부시다. 온갖 열망이 터져나오는 듯 싱싱하다. 물방울 맺힌 풀 하나도 풀에 얹힌 물방울도 저마다 빛나며 서로를 비춘다. 새소리도 드높다. 비바람을 견딘 호박 모종과 어린 상추도 꿋꿋하고 저절로 땅에서 솟구친 개양귀비도 붉은 꽃을 피운다. “고요하게 몸을 부풀리”고 “아주 조금씩 늘어”난다. 자라는 대로 놔뒀더니 옆집 지붕 언저리를 스킨십하는 서부해당화 붉은 나뭇잎도 드높게 흔들리며 신령함을 완성해 간다. 허리와 팔이 꺾일 듯하던 어제의 바람을 견디고 열망을 이어간다. “일 초 일 초” 변신하며 자기를 피워가는 중이다. “물을 머금고 공기와 스킨십하며”. 비 맞고 해를 받으며 끝없이 변신하는 건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자연의 일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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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엊그제는 충남 서천에 특강을 갔다, 20년 가까이 그곳에 터잡고 사는 허정균을 만났다. 18년 전 정부가 새만금과 서천 장항 갯벌을 매립할 때 갯벌 살리기 투쟁을 하다 그곳에 눌러앉은 선배다. 허정균은 신문사에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지역 주간신문 ‘뉴스서천’에서16년째 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내가 ‘새님’이라 부르는 허정균은 장항제련소 환경문제를 특종 보도하여 전국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옛 장항제련소를 철수하고 이전하는 데 목소리를 보탠 것이다. 한 집 걸러 암투병하는 인근 주민들을 오래 들여다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겠다. 1989년 폐쇄되었지만 장항제련소에서 50여년 동안 대기와 토양으로 흘러나온 분진과 중금속으로 인한 것이었음이 2009년 건강영향조사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