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김해자 시인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여기 주민이오. 닭을 길렀소. 하늘에 별을 뿌리고 땅바닥에 등 깔고 누워 세었소. 하나도 빠뜨림 없이 세었소.

해가 떨어지더이다. 문에 뚫린 구멍으로 한 다발의 석양빛이 들어와 내 가슴에 꽂혔소. 빛이 나를 죽였소. 나는 빛에 살해당한 자요. 언어가 남쪽으로 기울더니, 나는 죽어 있더이다. 나는 언어로 살해당한 자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여기 주민이오. 내 발로 길을 새겼소: 개미 떼처럼 오가면서, 내 발로 길을 다졌소. 쇠와 밀알을 내 턱으로 물어 날랐다오. 밤과 낮도 내 턱으로 날았다오.

내게 며칠은 남아 있소. 내 몸에 둘려 있는 몇 가닥의 밧줄을 큰 쥐처럼 갉으려오.


돌아라, 내 위에서 맴도는 매야. 언덕 위를 맴돌아라. 나는 밧줄을 갉아 스스로 놓여날 테니.


좀생이별이 이울었소. 아침의 숨결이 내 얼굴에 끼치오. 내가 씨 뿌린 밀은 어디 있소? 내가 바람에 묶어둔 머리끈은 어디 있소?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이 들판을 누볐소. 내 발등에 흙이, 내 혀에는 사랑하는 이름이 얹혀 있소.


사랑하는 이여, 내 이마에 둘러 묶을 주홍빛 비단 리본을 주오.

나의 부활을 살 플루메리아 꽃을 주오.


- 시,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자카리아 무함마드 시집 <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9월에 씨 뿌린 상추와 쑥갓과 치커리와 겨자채가 손바닥만큼 자랐다. 가을에 쌈채를 파종한 것은 처음이다. 역시 올해 처음 모종으로 심어본 루콜라도 톱날 같은 이파리를 뻗는다. 갓처럼 알싸한 맛을 내는 루콜라는 이파리를 떼어내도 며칠 후면 속잎이 다시 자라 있다. 신기하다. 봄처럼 어린잎 채소를 뜯어다 샐러드를 해먹는 자연의 선물을 누리면서도 돌을 눌러놓은 것처럼 무겁다. 무엇을 해도 마음이 평화롭지 않다.

며칠째 가자지구에 폭격이 쏟아지고, 이스라엘군 탱크가 기관총과 포탄을 쏘며 가자지구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폭격 구덩이에서 생존자를 찾는 사람들의 낯빛도 무너진 잔해처럼 돌빛이다. 시멘트 더미에 묻힌 사람들도, 오열하는 사람들도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었을 게다. 오랫동안 조상 대대로 그 땅에서 닭을 기르고, “개미 떼처럼 오가면서” “발로 길을 다”진 그 땅의 “주민”이었을 게다. 4차에 걸친 침략과 전쟁으로 자기 땅에서 쫓겨나 가자지구라는 좁은 곳에 유폐되었다 끝내 “살해당한 자”들 아닌가.

며칠 전 파주에서 열린 DMZ평화축전에서 재회한 팔레스타인 소설가 아다니아 쉬블리 앞에서, 나는 차마 팔레스타인이란 낱말을 발음하지 못했다. “염소도 다른 염소가 도살장에 끌려갈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데, 사람이 (동료 인간에 대해) 그걸 못한다는 말인가?” 탄식하는 아다니아의 말이 동굴 깊은 데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감추려 애쓰나 고스란히 드러난 고통스러운 얼굴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지켜보는 일도 괴로운데 당신들은 대체 얼마나 죽을 만큼 아픈가. “이마에 둘러 묶”은 “주홍빛 비단 리본”을 달고 돌에 깔려 있을 아이들의 조각난 시신들 앞에서.

2023년 8월2일 영면한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팔레스타인 시인으로, 바그다드대학에 유학갔다 귀국 날짜가 하루 늦었다는 이유로 난민이 되었다. 이스라엘 점령군이 국경을 닫아걸었기 때문에 지척에 집을 두고 25년간 이라크와 시리아 레바논을 떠돌았다. “신이여, 우리에게 예전 머리를 돌려주세요. 꽃양배추의 꽃과 같았던 그 머리를 돌려주세요. 별들로 가득 차 있던 그 머리를”(시 ‘불가능’) 기도문처럼 들리는 자카리아 선생의 시구를 이어 읊조린다. 신이여, 우리에게 예전의 심장을 돌려주세요. 석류알로 가득했던 그 심홍색 등불을.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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