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먼 데서 이기고 올 사람아

김해자 시인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너, 먼 데서 이기고 올 사람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시 ‘봄’,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


봄이다. 꽃다지도 부추도 파도 시금치도 퍼렇게 올라오는 봄이다. 봄바람과 겨울 끝바람이 기싸움을 벌이긴 해도 봄이다. 간밤에 얼었는지, 이파리 가장자리마다 눈꽃 같은 흔적이 있긴 해도, 봄이 이길 것이란 믿음만은 흔들리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봄은 온다. 긴 겨울을 이기고 나온 별꽃도 꽃다지도 잡초 취급받는 개양귀비도 기특하다. 놀랍다. 봄은 솟구쳐 오르는 계절,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뭇가지에 잎이 돋고 꽃이 핀다. 갸륵하다. 산과 밭으로 둘러싸인 산골살이 10년차인데 봄이면 설렌다.

봄에는 갈아엎을 게 많다. 숱하게 새끼를 친 부추도 뿌리를 나눠 옮겨 심고, 다닥다닥 붙은 상추도 간격을 넓혀 새 땅으로 이사시켜야 한다. 봄에 제일 중요한 것은 퇴비를 만드는 일이다. 먹고 남은 음식물이 퇴비의 주원료다. 퇴비 자리에 겨우내 모아둔 음식물 쓰레기와 산에서 가져온 부엽토와 흙과 검불들을 켜켜이 넣고 미생물 발효액을 사이사이 뿌린다. 지난해 삭혀놓은 깻묵액비도 조금씩 흘려 넣는다.

사람의 손이 하는 일은 거기까지다. 나머지는 지렁이와 눈에도 안 보이는 작은 생명체들이 협력해 새 땅을 만들 것이다. 봄이 무르익을 무렵이면 여지없이 보슬보슬한 흙으로 부활할 것이다.

며칠 전 세월호 관련 책 3권을 받았다. <520번의 금요일>은 참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는 세월호 생존자와 형제자매, 그리고 그 곁의 이야기를 작가기록단이 받아쓰고 엮은 책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는 ‘304낭독회’의 이름으로 작가들이 진행해온 낭독회 작품들을 뽑아서 엮은 기록이다. 10년 동안 520번의 금요일이 지나가도록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갔다. 10년쯤 됐으면 끝내도 되지 않느냐는 반문도 있을 법하지만 참사는 진행형이다. 세월호가 단독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억울한 죽음을 의미하는 이 시대의 보편적 명사로 거듭나는 한. 권력이 진실을 가리고 엄포를 놓고 피해자들을 조롱하는 한. 사람이 사람에게, 권력이 주권자에게 삶이 아니라 무덤을 주는 한. 이태원 참사와 오송 참사 등 제2, 제3의 참사가 이어지는 한.

“이렇게 모여, 우리는 사람으로 돌아가는 꿈을 꿉니다.”

“목숨이 삶으로, 무덤이 세상으로, 침묵이 진실로 돌아가는 꿈을 꿉니다.”

“떠오르도록, 떠오를 수 있도록,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끝날 때까지 끝내지 않겠습니다.”

‘304낭독회’가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함께 소리내어 읽은 위 글들을 따라 읽으며, 이 봄엔 새 세상을 꿈꾼다. 20일 후면 총선이다. 선거날 딱 하루만 국민이 주인이 되고, 내내 노예로 사는 게 대의민주주의라지만 수많은 민초들은 그조차도 절실하다. 그러니 간절하게 새봄을 기다린다. 목숨이 삶으로, 무덤이 세상으로, 침묵이 진실로 돌아가는 봄을. 그 꿈이 절박하고 언 땅에서 견디고 싸워낼수록 우리의 봄은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올 것이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올 것이다.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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