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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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더 많은 용기를, 우리 모두에게 웹툰을 자주 본다. 솔직히 말하면 거의 중독 수준이다. 수만권의 만화책에 시간을 쏟아붓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더 건실한 인간이 되었을 것 같다는 후회 때문에 조금은 자중했지만, 몇번의 입원과 잦은 출장을 핑계로 결국 이 새로운 형식의 만화에 흠뻑 빠져들고야 말았다. 이제는 틈이 나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켜고 이 안온하고 유쾌한 세계로 자연스레 향한다. 만화책에 익숙한 독자 입장에서 요즘 한국 웹툰의 수준은 놀랍다. 스크롤을 이용해 좁은 스마트폰 화면에서 스펙터클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솜씨는 펼침면과 컷을 리드미컬하게 다루며 몰입감을 이끌어내던 전성기 출판 만화들에 비해서도 탁월하며, 서사는 대단히 날렵하고 정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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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왜 시민의 지성을 존중하지 않는가 얼마 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다녀왔다. 이것은 2009년 시작해 올해 열다섯 번째를 맞은 독립출판과 아트북의 축제다. 처음에는 갤러리나 카페, 미술관 등을 옮겨다니며 치러졌고, 2015년부터는 노원구 중계동에 위치한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다.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알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모습은 기묘했다. 디자이너, 사진가, 편집자, 시각예술가,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학생 등이 자신이 만든 책을 즐겁게 사고파는 중이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제외하면 어떤 예술이나 디자인 관련 행사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이들이 뒤섞여 웅성거리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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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해물찜’ 같은 출판은 없을까 서점 한복판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10여년 전이었고, 서점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며 집중적인 주목을 받던 다이칸야마 쓰타야에서였다. 예쁜 사진책도 사고 멋진 서점 구경도 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떠난 일본 도쿄 여행의 첫날, 나는 한숨을 쉬며 쓰타야의 매장 한가운데를 맴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쓰타야는 멋진 서점이다. 공간의 배치와 서가의 구성, 책의 선별, 다른 라이프스타일 상품과 책을 함께 배치하는 솜씨가 모두 놀라웠다. 하지만 내가 두려워한 것은 공간의 규모에 비해 책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대형 서점의 10분의 1이나 될까. 서가에 있는 책들 상당수는 책등이 아니라 표지를 앞으로 한 채, 우산이나 가방, 문구류 등과 함께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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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김태흠 지사의 책 추천을 기대하며 김태흠 충남지사를 좋아한다. 내가 출판 자영업자이기 때문이다. 김 지사는 민주주의와 기후변화에 관한 좋은 책을 거듭 추천하는 드문 정치인이다. 예를 들어 지난달 그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소개한 여름휴가에 읽을 책 3권 중에는 마이클 샌델의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가 포함돼 있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소비자’가 아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 되기 위해 모든 이가 자신의 생활 방식과 윤리적 가치를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는 책을 추천하는 유력 정치인에 큰 감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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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사랑하지 않고 노동할 수 있기를 나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다. 저마다의 출판 노동을 거쳐 이곳에 도착한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꾸린다. 지나친 호기심과 부족한 자제력 때문에 영 두서없는 일들을 하며 살아온 편이지만, 나 역시 책을 만들며 밥벌이를 해온 시간이 가장 길었다. 대부분 그렇듯 첫 직장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서른 살이 조금 넘어서 입사한 출판사는 두꺼운 학술서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는 내가 완전히 ‘초짜’였다는 것이고, 큰 문제는 어쩌다 편집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나이나 경력과 무관하게 탁월한 이들도 많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햇병아리 팀장은 나이 많은 팀원들의 교정지를 흘끗거리며 책 만드는 일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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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바다 사람의 ‘괴상한’ 그리움을 보다 요 몇달간 제주를 다녔다. 지역에 대한 잡지를 만드는 일은 낡고 오래된 연재만화의 이야기 구조와 좀 닮았다. 주인공은 사연이 있는 떠돌이로,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진다. 간신히 해결하고 익숙해질 때쯤 다른 곳으로 떠난다. 아쉬운 작별 후에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만남과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제주행 비행기를 탈 때면, 나는 이번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재만화에도 가끔 분량조절에 실패해서 길어지는 회차가 있지 않은가. 최근 몇달간 내게 주어진 도시의 삶은 무덥고 신산했다. 바쁜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의 이륙을 기다리다 악천후로 인해 지연되는 중이라는 안내방송을 들으면 마음이 설레었다. 어쩔 수 없이 비행기가 못 뜬다면 서울의 일정과 회의들이 ‘피치 못하게’ 취소되겠지. 그러면 멍하게 폭풍우나 바라보면서 책이나 읽을까. 배움에 늦은 나이는 없다고 했으니 담배나 배워 볼까. 하지만 활주로에서 기회를 노리던 비행기는 한사코 이륙에 성공하고, 파김치가 된 나를 김포공항에 가뿐히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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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갑자기 나이 든 너구리가 되어 넷플릭스에 가입했다. 오래전 해적판 비디오테이프로 보았던 영화 한 편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해적판이라고는 하지만 거칠거나 음란한 내용은 아니고, 밝고 동글동글하고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너구리들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다. 그들의 노래와 춤은 전형적인 어린이 만화영화처럼 익살스럽다. 하지만 이것은 싸움에 대한 영화다. 공격과 방어, 수비와 반격이 있으며, 전쟁과 전투와 작전이 나름대로는 있다. 심지어 몇몇 너구리는 두들겨 맞고 차에 치여 피를 흘리고 죽거나, 몇몇은 상대, 즉 인간을 살해하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긴박하고 거친 내용들은 꽤 능글맞게 봉합돼 있어 후반부에 다다를 때까지 두렵거나 서글프게 느껴지지 않는다. 너구리들은 포기하지 않고 두 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 내내 싸우고 또 싸운다. 어째 매번 좀 어설픈 실패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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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어느 강사의 즐거운 웃음 출강 중인 대학원에서 재임용 대상자 안내 메일을 받았다. 별 문제가 없다면 앞으로 두 해 동안 학생들과 함께 비평과 시각문화를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꽤 머뭇거리며 승낙한 강의였지만, 솔직히 계속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정규 강의를 맡은 것은 10여년 만의 일이었다. 공부가 얕고 부족한 탓이라며 짐짓 겸손한 척을 하고 싶지만, 대학원을 갓 졸업한 나를 이끌고 난해한 원전을 한 줄 한 줄 강독해 주셨던 스승들을 생각하면 그럴 면목은 없다. 시종일관 즐거웠던 배움의 시간은 오히려 내게 어떤 두려움을 남겼다. 즉 세상에는 바닷가에 있는 모든 조약돌을 뒤집어 보듯 텍스트를 읽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땅에 떨어진 남의 깃털을 주워 아무리 몸을 장식하려 해도 결국 누군가에게는 들킨다는 것을 그때 나는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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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기꺼이 당신들의 적이 되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전시장에 갔다. 벽에 걸린 사진들은 낡고 조악했다. 자신이 흉내내는 옛 수묵의 준법(皴法)과 대결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사진을 구성하는 기술적 이해는 얄팍했다. 프레임에 새어 들어오는 빛과 흐릿하게 퍼진 입자를 다루는 능력은 부족했다. 전시장 곳곳에 인쇄되어 놓인 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허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망연한 마음이 되어 전시장 바깥으로 나왔다. 오래전, 나의 스승은 비평을 쓰기 위해서는 사진 한 장을 20분 이상 대면해야 한다고 나를 가르쳤다. 하지만 그 사진들 앞에서는 5분도 버텨내기 쉽지 않았다. 나는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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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전통에 대한 잡지 마감 때의 생각들 나는 전통에 대한 잡지를 만든다. 그리고 곧 이번 호의 마감에 돌입한다. ‘마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졸린 몸에 카페인과 당분을 쏟아붓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좀 메슥거린다. 지칠 때까지 글을 고치고 사진을 다듬은 후에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딱히 푸념을 할 생각은 없다. 게다가 솔직히 마감의 나날이 지닌 기묘한 안온함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이 기간에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e메일에 답장을 하는 것도, 심지어 자동차를 고치거나 병원에 가는 것도 모두 미룰 수 있다. 신경을 집중해서 사진과 글을 한없이 들여다보다 보면, 가끔은 몸에서 어떤 현실감이 나른하게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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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우리의 책이 조금 덜 아름답더라도 종종 아름다운 책을 골라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런 말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책은 대부분 다 아름다운 것 같다고 대답하고, 곧바로 후회한다. 하지만 솔직히 서점에 놓인 책은 대부분 아름답다. 질투가 날 정도로. 서른 살 즈음, 오래된 대학출판부에서 일했다. 사진과 디자인 언저리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며 떠돌다가 결국 약간의 멀미를 느끼며 옮겨온 직장이었다. 아름답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에 쫓기는 것보다는 고즈넉히 자리 잡은 낡은 건물 한쪽에서 두툼한 교정지를 들여다보며 한 시절을 보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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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도끼 들고 숲을 향하는 당신들에게 옛 문헌을 보러 전주에 다녀왔다. 도심의 옛 건물 사이에는 생활한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마스크 없이 웃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지난 몇년의 일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지독한 역병의 시대가 끝나는 걸까. 우리는 답답하고 두려웠던 지난 시간을 웃으며 추억할 수 있게 될까. 전주의 도서관들은 좋았다. 나는 정작 열람실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어느 공공도서관의 로비에서 시간을 보냈다. 비치된 발간물의 수준이 높았고, 선별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메모를 하고 주석을 정리하는 동안, 함께 간 중학생 아이는 12~16세 전용 열람실에서 놀며 책을 읽었다. 몇 시간 후에 만난 아이는 즐거워했다. 도서관은 어땠니? “훌륭했어!” 어떻게 훌륭했는데? “총류 서가가 비어 있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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