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에 대한 잡지 마감 때의 생각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나는 전통에 대한 잡지를 만든다. 그리고 곧 이번 호의 마감에 돌입한다. ‘마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졸린 몸에 카페인과 당분을 쏟아붓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좀 메슥거린다. 지칠 때까지 글을 고치고 사진을 다듬은 후에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딱히 푸념을 할 생각은 없다. 게다가 솔직히 마감의 나날이 지닌 기묘한 안온함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이 기간에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e메일에 답장을 하는 것도, 심지어 자동차를 고치거나 병원에 가는 것도 모두 미룰 수 있다. 신경을 집중해서 사진과 글을 한없이 들여다보다 보면, 가끔은 몸에서 어떤 현실감이 나른하게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떨쳐내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전통이 과연 뭐길래 이렇게 열심히 책을 만들고 있을까? ‘조상의 지혜’ ‘빛나는 문화’ ‘얼’ ‘슬기’ 같은 물렁물렁한 단어들을 보면 마음이 복잡하다. 전통에 대한 잡지를 만든다지만, 이 말들의 정확한 의미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과거는 언제나 복잡하며, 해석하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한문학자 강명관 교수가 바라보는 조선의 시공간은 사뭇 역동적이며, 다소 잔혹하다. 나는 그의 두툼한 노작인 <노비와 쇠고기>를 출장길에서 서둘러 읽었다. 그는 조선이 ‘사족들의’ 나라였으며, 지식의 중추라 할 성균관을 지탱하는 물적 토대가 노비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한 민중의 대응을 치밀하고 방대한 사료 독해를 통해 읽어낸다.

나는 10년 전에 출간된 강명관 교수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서 당시 책 만드는 일을 했던 장인들의 상당수가 노비였으며, 양반들이 사적으로 의뢰한 책의 마감을 못 지키면 채찍질을 당했다는 구절을 보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책을 만들어 밥벌이를 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때리는 사족들보다는, 장인들에게 더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족이나 왕족의 시간을 아름답게 채색하기 위해 나와 동료들이 이렇게 밤샘을 한다는 것은, 좀 편치 않은 일이다.

반면 중문학자이자 국학 문헌의 전산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허성도 교수는 조선을 ‘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낸’ 경이로운 나라로 해석한다. 10여년 전, 어느 강연에서 그는 조선이 정치와 경제, 법률, 문화, 과학 등 모든 면에서 합리성을 지닌 나라였다고 설명했다. 백성들은 왕에게 직접 언문으로 상소했고, 왕의 행차에서 징과 꽹과리를 치며 직접 민원을 해결해 달라고 호소할 수 있었다. 조선의 기록 시스템은 치밀하고 방대했으며, 왕조차도 함부로 열람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실록>을 비롯한 문헌을 직접 전산으로 입력했던 허성도 교수는 자신의 판단을 지탱하는 수많은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물론 방대한 문헌의 세계를 거닐며 깊은 연구를 해낸 대가들의 관점을 고작 몇 권의 책과 강연을 통해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과거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감을 앞둔 편집자는 언제나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힌다. 과거는 어떤 시공간인지, 전통은 우리가 존중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내가 편집하는 모든 책의 지면에서 왕족과 사족의 시간에 대한 지나친 경배를 삼가려 노력한다. 농투성이와 고기잡이꾼과 장돌뱅이들이 견뎌낸 삶을 함부로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삼을 생각도 없다. 그저 쨍한 순간들, 충분히 대답하지 못한 질문들, 달래주지 못한 두려움들, 길 잃은 것들, 귀환하는 것들, 악몽처럼 뒤엉킨 것들을 풀어헤쳐 독자들과 함께 잠시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낯설고 좁은 통로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마음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잡지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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