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 들고 숲을 향하는 당신들에게

옛 문헌을 보러 전주에 다녀왔다. 도심의 옛 건물 사이에는 생활한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마스크 없이 웃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지난 몇년의 일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지독한 역병의 시대가 끝나는 걸까. 우리는 답답하고 두려웠던 지난 시간을 웃으며 추억할 수 있게 될까.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전주의 도서관들은 좋았다. 나는 정작 열람실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어느 공공도서관의 로비에서 시간을 보냈다. 비치된 발간물의 수준이 높았고, 선별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메모를 하고 주석을 정리하는 동안, 함께 간 중학생 아이는 12~16세 전용 열람실에서 놀며 책을 읽었다. 몇 시간 후에 만난 아이는 즐거워했다. 도서관은 어땠니? “훌륭했어!” 어떻게 훌륭했는데? “총류 서가가 비어 있지 않았어!”

이는 사전이나 전집, 총서, 신문 합본 같은 것이 꼼꼼하게 수서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책은 비싼 데다 열람 빈도가 낮아서 청소년 열람실에서는 구색 정도만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식의 범위와 분류 체계를 보여주는 총류 서가야말로 도서관의 척추일지도 모른다. 대화를 조금 더 나누면서 나는 그곳에 청소년의 지성을 존중하는 사서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몇몇 도서관에서 정말 아름다운 서가들을 만난 적이 있다. 으리으리한 건축물에 들어선 도서관의 서가가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드물다. 오히려 한정된 예산과 공간의 범위 안에서 고민하며 일구어낸 흔적이 역력한, 평범한 공공도서관의 서가들이 훨씬 더 멋지다. 구로에 있는 한 도서관에는 세심하게 고른 동물권과 다문화, 성평등에 대한 책들이 촘촘하게 놓여 있었다.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내용이나 만듦새가 한결같이 훌륭했고, 사람들의 손을 많이 오간 책은 기분 좋게 헐거워져 있었다.

이 서가 뒤에는 분명히 악전고투를 벌이는 사서들이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발표하는 ‘우수도서’들의 목록과 신청도서, 베스트셀러를 적당히 섞어서 서가를 채울 수도 있다. 하지만 공들여 고르면 열심히 읽어 주는 시민들이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분투하는 사서들의 서가를 보면, 깊은 존경심이 든다.

하지만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열람실은 코로나19 시기에 만난 작은도서관에 있었다. 역병이 퍼져나가던 시절,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내가 사는 동네에 인터넷이 설치되지 않은 집이 있다는 것, 아빠가 퇴근해야만 스마트폰 테더링 기능을 이용해서 유튜브를 보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 텅 빈 놀이터도 친구 집도 갈 수 없어서 데이터가 말라 버린 폰을 들고 하루를 버티는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때 우연히 들른 작은도서관에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 서가 아래에는 작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사서들은 손소독제로 아이들의 손을 닦아 주고 바쁘게 책을 소독했다. 열람실과 서가는 마치 숲과 나무처럼 아이들의 쉼터가 되어주고 있었다.

도서관에 가본 적도 없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가 선출직 지자체장이 되는 것은 물론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대의민주주의의 일부다. 하지만 작은도서관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그 모습을 본 이라면, 지키려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예상대로 시민들은 거세게 싸웠고 내가 사는 지역의 작은도서관은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적잖이 걱정이 된다. 지난 몇 년을 버텨내게 했던 쉼터들 중에는 작은도서관에 비해 눈에 덜 띄는 곳도 많다. 요 몇 달간 나는 비효율을 청산하고 새로운 치적을 쌓겠다며 도끼를 들고 우리의 숲을 향하는 기이한 선출직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정성껏 숲을 가꿔 온 이들에게 나무를 베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작은도서관의 폐쇄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내가 존경하는 사서 중에도 울며 도끼를 들어야 하는 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슬픈 풍경이 더는 생겨나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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